새로운 사회적 대화, 필요한가? 가능한가?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전략적 기획과 노동정책을 지휘할 컨트롤타워 구성 시급

촛불정부, 문재인정부가 새로운 사회적 대화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기존의 노사정위원회를 고집하지 않고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실로 20년 만에 온전한 사회적 대화가 새로이 시작될 기운이 무르익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우리 사회에는 제대로 된 사회적 대화를 위한 구조적 조건이 없으며 노사정 주체들의 의지나 능력도 부족했다. 그 구조적 조건에는 노사 간의 힘의 균형, 강한 노조 조직이나 노동정당 등이 포함된다. 사용자와 국가에 비해 노동 측의 힘이 크게 약한 우리의 조건이 쉽사리 바뀔 수 없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국가의 의지와 능력일 것이다.

현재 새로운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정치적 지형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양호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촛불혁명의 정언명령(定言命令)에 더해 여러 모로 유리한 정치지형이 더해져 있는 것이다.

최근 ‘노동시간 단축 논란’을 보면 정부 내에서 새로운 사회적 대화나 노동개혁을 지휘하는 컨트롤타워가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가 생긴다. 사회적 대화의 성공 여부는 단순히 노동행정 일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포용적 성장, 일자리 정부, 노동존중사회를 지향하는 국정목표의 핵심적 관건적 사안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국가기구 내에서 총체적이고 전략적인 기획과 함께 전체 노동정책을 지휘할 컨트롤타워의 구성이 시급하다.

노사정 사회적 대화는 주고받는 정치적 행위이자 결정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 것인가에 대해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눈앞의 단기적 경제적 이익을 일부 포기한다면 장기적 정치적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전략적 이해는 노동기본권과 조직화 확대, 나아가 비정규 미조직노동자와의 연대구축이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

'새로운 사회적 대화'의 시작

2017년 출범한 새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다. 촛불혁명의 요구를 실행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노동문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촛불시민들이 외친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에는 촛불이 단순한 정치혁명을 넘어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못하는 나라, 비정규노동자 천지의 자살공화국, '헬조선' 대한민국을 바꾸어야 한다는 절절한 목소리였다. 그 요구의 핵심에 노동문제가 놓여있었다.

촛불정부, 문재인정부가 새로운 사회적 대화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기존의 노사정위원회를 고집하지 않고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1월에는 노사정 간의 첫 만남으로 민주노총이 참가한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리기도 하였다. 실로 20년 만에 온전한 사회적 대화가 새로이 시작될 기운이 무르익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실패의 경험과 거듭된 실패의 이유

노사정 당사자 간의 사회적 대화, 혹은 사회적 합의는 지난 20여 년이 넘는 시기동안 대체로 실패해왔다. 지난 1월 말 민주노총의 노사정대표자회의 참가가 그렇게 여론의 주목을 받았던 것도 오랫동안 노사정위원회 참가를 거부해왔기 때문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사정 사회적 대화의 지난 경험들은 쓰라린 것이었다. 1996년 김영삼 정부 시절 노사관계개혁위원회는 불법조직으로 탄압받고 있던 민주노총을 합법화하는 노동개혁을 천명하였었다. 그런데 노동이 1년 가까이 적극 참여한 대화의 결과는 그 해 연말의 유명한 '날치기 노동법 개악'이었다. 참담한 결과의 원인은 약속했던 개혁을 국가가 손바닥 뒤집듯이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한겨울 엄동설한의 양대 노총 총파업을 거쳐 노동운동은 겨우 날치기 악법을 제지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쓰라린 경험은 1998년 2월의 정리해고 합의였다. 외환위기 상황과 미국과 한국정부의 강한 압박 속에서 민주노총은 서둘러 대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몇 가지 노동개혁과 정리해고 노동자파견법을 교환하는 합의였다. 그런데 그 합의로 말미암아 노동 내부에서는 큰 반발이 발생하였고 민주노총 지도부는 사퇴하였다. 더 큰 문제는 각종 노동유연화 조치들은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법제화되었으나 노동의 요구사항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던 점이다. 노동민주화 합의사안들은 노골적으로 이행이 거부되었다. 예컨대 전교조 합법화는 민주노총 위원장의 한겨울 국회 앞 거리 단식농성을 거쳐 겨우 다음 해에 이루어졌고 해고자의 노조가입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또다시 참담한 결과였고 결국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하게 된다.

노무현 정부에서 노사정위원회 참가는 다시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사회 통합적 노사관계'라는 비전으로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는 대통령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도 다시금 참담한 비극으로 끝났다. 노동개혁의 약속은 2003년 여름 화물연대 파업 등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채 6개월이 안 돼 파기되었다. 그리고 2005년 이후 참여정부는 비정규직 고용을 확대하는 기간제법 제정에 나섰고 한미FTA 등 재벌 자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강하게 실행하였다. 다른 한편 정부정책에 저항하는 노동자를 강하게 탄압하였는데 노태우정부 이후 가장 많은 노동관련 구속자가 발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의 입장에서 볼 때 노사정위원회는 이런 배신과 기만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통제기구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2015년 9월에 있었던 사회적 합의도 마찬가지였다. 수구정부인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 대타협'은 전혀 사회적 대화나 합의랄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한국노총을 압박하여 이루어진 강제된 합의였다. 합의 의제들은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등 반노동적 내용 일색이었다. 또 박근혜 정권은 그조차 합의 직후부터 왜곡하였고 결국 한국노총의 합의파기를 불러오고 말았다. 합의라기보다 노동영역에서 발생한 박근혜 정부의 적폐였다.

오랫동안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이유가 무엇일까? 연구자들이 내린 결론은 비교적 단순하다. 우리 사회에는 제대로 된 사회적 대화를 위한 구조적 조건이 없으며 노사정 주체들의 의지나 능력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 구조적 조건에는 노사 간의 힘의 균형, 강한 노조 조직이나 노동정당 등이 포함된다. 사용자와 국가에 비해 노동 측의 힘이 크게 약한 우리의 조건이 쉽사리 바뀔 수 없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국가의 의지와 능력일 것이다. 지난 20년 한국의 국가가 제대로 된 사회적 대화를 진행할 의지와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 실패의 일차적인 이유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의 여론은 사회적 대화 실패의 책임을 불참입장을 고수한 민주노총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지난 10년 수구정부 시기를 제외하면 공식적 불참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참여의 여지를 끊임없이 타진했었다. 그러나 비정규직을 늘리고 사회를 양극화하며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국가정책은 변화하지 않았고 참여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지금 민주노총, 민주노조운동은 우리 사회 양극화나 비정규직 차별의 주범으로 몰려있는 실정이다. 집단이기주의나 귀족 노조라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에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이것은 과도하고 사실과도 크게 다르다. 촛불의 주도세력 중 하나가 민주노조운동이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제대로 맞서 싸운 유일한 사회세력이 민주노총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여론에서 지탄받는 것에는 과거의 사회적 대화, 노사정위원회라는 노동통제장치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 통제의 결과인 것이다.

▲ 노사정위원회 개편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노사정 대표자 6차 회의가 1월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에스타워에 있는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오른쪽)의 발언 중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가운데)이 맞은편에 않은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사회적 대화는 매우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

이렇게 암담한 과거 경험에 비춰볼 때 지금 새로운 사회적 대화가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 대화의 가능성과 함께 그 한계는 무엇인가? 결론을 먼저 말하면 필자는 지금 사회적 대화는 매우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 가능하지만 많은 난제들을 해결하면서 만들어가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라고 판단하고 있다. 지금 새로운 사회적 대화의 정치지형은 '후퇴할 수 없는 지뢰밭 건너기' 쯤에 해당한다고 비유할 수 있겠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은 충분하다. 지금 이대로의 한국사회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촛불의 명령이었다. 취업문제, 경제적 궁핍 때문에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사회는 존재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또 십년이 넘도록 자살률 1위의 자살공화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모든 사회문제의 뿌리에 노동문제가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장의 노동시간, 최악의 산업재해, 과반에 이르는 착취 받는 비정규노동자가 세계 10대 경제 강국 대한민국의 민낯인 것이다. 그래서 현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노동문제의 근본적 전환을 공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재인정권의 노동관련 대선공약은 이전의 국가정책들과 비교해 크게 달라졌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최저임금을 인상하며 비정규직을 줄이겠다는 약속이었다. 특히 취약한 노동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노동기본권을 대폭 강화하고 노동조합 조직률을 높이겠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노동존중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체제 전환적 노동개혁방안을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를 만들고 거기서 실행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노동체제의 전환 약속이 소득주도성장이나 포용적 성장이라는 경제정책 전환방침과 정합적으로 제시된 것도 큰 변화였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가 가능한 것은 사실 문재인정부의 약속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정부정책 변화는 보다 근본적으로 촛불혁명이 불러온 정치적 지형의 변화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듯이 촛불혁명은 단순한 국정농단에 대한 저항을 넘어선다. 그 바닥에는 헬조선 대한민국의 근본적 변화, 특히 사회경제적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적 열망이 깔려있었다. 한겨울 2000만 명이 수개월동안 거리로 나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촛불혁명의 요구와 함께 이전의 사회적 대화 환경과 달라진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짚어보자. 먼저 수구 정치세력의 힘이 크게 약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재 수구정당들은 과거와 같이 노동개혁에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들은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고 사회적 정당성을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 국가기구 내부의 수구세력, 곧 공안 정보기관의 힘도 크게 약화되어 있다.

다음으로 사회적 대화를 가로막거나 실질적으로 왜곡시켰던 사회세력의 힘도 약화되어 있다. 한국사회의 지배세력인 재벌 대기업들은 국정농단의 주역으로 처벌받고 있으며 사회적인 정당성을 다시금 크게 상실했다. 또 조중동과 종편, 공중파방송 등 여론을 지배하던 보수언론의 위세도 크게 약화된 상태이다. 따라서 사회적 대화에서 매우 불균형했던 힘의 균형이 일시적으로나마 회복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사회적 대화의 성사에 매우 중요한 경제적 상황도 과거와는 다르다. 1996년과 1998년 그리고 2005년 전후 한국경제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외환위기 시기에는 더 그러했지만 기업들의 양보 여력이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 업종의 구조조정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양호한 상태이며 재벌 대자본이 엄청난 사내 유보금을 갖고 있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넷째, 새로운 사회적 대화에 핵심 추동자인 정부와 대통령의 정책의지가 이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명료하다는 점이다. 대통령을 위시한 현 정부의 정책담당자들은 촛불혁명과 노동개혁, 그리고 사회적 대화의 관계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다. 이들이 10년 전 참여정부 노사정위원회 실패의 당사자였고 그 경험을 나름대로 성찰하는 것으로 보이는 점도 긍정적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운동 측의 변화도 뚜렷하다. 민주노조운동은 현재 내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해있다. 산별노조운동의 한계와 더불어 정치세력화도 중단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런 내적 어려움은 비정규직과 연대하고자 하는 나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노동 내부의 양극화와 차별 심화로 귀결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거세지는 여론의 질타와 함께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진지한 변화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조직되어 있는 대기업과 공공부문 정규직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만 앞세워서는 미래가 없다는 절박한 인식이다.

요컨대 현재 새로운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정치적 지형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양호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라는 대명제에 노사정이 과거에 비해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촛불혁명의 정언명령(定言命令)에 더해 여러 모로 유리한 정치지형이 더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사회적 대화 앞에는 꽃길보다는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런가?

전략적 기획과 노동정책을 지휘할 컨트롤타워 구성 시급

최근 노동시간 단축문제와 관련한 근로기준법 개정 논란이 있었다. 정부 여당이 주도한 법 개정의 내용은 주 68시간까지 허용했던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언뜻 보면 매우 개혁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노동적폐를 상식수준에서 정상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주 40시간 법정노동이 68시간까지 허용되었던 것은 그간 노동부가 1주에서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는 말이 되지 않는 자본 편향적 법해석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 사안을 다루는 정부 여당의 태도와 방식이었다. 양 노총이 반대하는 가운데 국회합의안을 일방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 측의 목소리나 의견은 대체로 무시된 것으로 보인다. 일방처리 시 노사정대표자회의 참가 재고를 공언했던 민주노총이 계속 참가하기로 결정하여 현재 문제가 일단락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대화의 관점에서 볼 때 끝난 사안이 아니다. 또 하나의 쟁점인 최저임금 산입범위 재조정문제의 결말도 매우 우려스럽다.

이 사안은 향후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의 구성과 운영에서 중요한 하나의 준거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의 참가 결정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배제하는 노동행정에 관한 현장 노동자들의 불만은 이미 새 사회적 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에서 대화를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에서 일방적으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과거 실패를 불러온 핵심 원인이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된다면 민주노총 지도부의 의사와 무관하게 대화참가 자체가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이 문제는 새로운 사회적 대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 먼 곳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개혁국면의 사회적 대화에 대한 저항은 대재벌자본과 보수 정치세력이나 보수언론에서 발생할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저항은 국가 내부의 보수적 국가장치들을 매개로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말하자면 정부 내 경제부처나 치안부처, 그리고 집권 여당 내 일부에서 대화를 가로막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를 위한 구조적 조건이 취약한 우리 사회에서 이를 주도하는 국가기구마저 일치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대화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노동시간 단축 논란'을 보면 정부 내에서 새로운 사회적 대화나 노동개혁을 지휘하는 컨트롤타워가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가 생긴다. 사회적 대화의 성공 여부는 단순히 노동행정 일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포용적 성장, 일자리 정부, 노동존중사회를 지향하는 국정목표의 핵심적 관건적 사안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촛불정부의 역사적 정당성이 걸린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기구 내에서 총체적이고 전략적인 기획과 함께 전체 노동정책을 지휘할 컨트롤타워의 구성이 시급하다. 새로 구성될 사회적 대화기구가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는 도전이자 기회

민주노조운동의 입장에서 새로운 사회적 대화는 도전이기도 하고 기회이기도 하다.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전술적 선택이어야 한다. 전술적 참가는 모든 것을 사회적 대화에 맡기는 그런 운동방식과는 다르다. 언제라도 ‘탈퇴’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갖되, 노동운동 스스로의 전략적 목표와 실천이 먼저 전제되는 참가인 것이다. 이런 주체적 전략과 실천이 없다면 참여는 포섭이 되고 새로운 노동존중사회, 노동체제 전환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같은 '사회적 합의주의'의 혼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민주노조운동의 일차적 전략적 과제는 여전히 산별노조건설과 정치세력화를 매개로 한 연대 확장임을 끊임없이 확인할 필요가 있다. 미조직, 비정규노동과의 연대를 위한 조직과 투쟁이 언제나 사회적 대화나 정치교섭에 앞서는 일차적인 전략적 사업이라는 원칙이다.

사실 지난 20여 년 동안 민주노조운동은 조직된 정규직이 지배하는 노조에서 비정규 미조직노동자를 대표해야 하는 딜레마로 고통 받았다. 산별노조 전환이나 진보정당운동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딜레마는 좀 더 정확히 살펴보면 딜레마가 아니다. 즉 정규직 조직노동자의 양보나 비정규노동자 연대는 장기적으로 볼 때, 그리고 정치적인 수준에서 정규직 노동자의 이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노사정 사회적 대화는 주고받는 정치적 행위이자 결정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 것인가에 대해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눈앞의 단기적 경제적 이익을 일부 포기한다면 장기적 정치적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에서 민주노총의 전략적 이해는 노동기본권과 조직화 확대, 나아가 비정규 미조직노동자와의 연대구축이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저임금이나 노동시간 등 경제적 의제에 매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정규직 양보론 결사반대'와 같은 협소한 경제주의와 전투적 투쟁만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음은 과거의 실패들에서 모두가 확인한 바 있었다.

어려운 구조적 조건에서도 촛불혁명으로 사회적 대화를 위한 정치적 지형은 만들어졌다. 이제 노동운동 주체의 자기 혁신과 전략적 실천이 매우 중요한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사회적 대화의 성패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미리 예단하여 현재 상태를 고수하는 오류를 민주노조운동이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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