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유행 당시 정부가 메르스 대응을 부실하게 해 메르스 환자가 발생했다며 한 환자에게 국가가 위자료 1000만 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는 민사소송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은 재난이나 재해, 안전사고 때 국가가 어떤 이유로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것과 관련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1심은 국가의 과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패소 판결을 내린 바 있어 대법원 최종심 결과에 관심이 쏠린다.
이번 재판에서 승소한 환자는 메르스 유행 초기인 2015년 5월 22일 발목을 다쳐 대전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가 메르스 환자와 같은 병실에 입원하는 바람에 메르스에 걸렸다. 이 피해자에게 메르스를 전파한 환자는 메르스 최초 환자가 입원했던 평택성모병원 8층 내 다른 병실에 입원해 있다가 메르스에 옮았다.
재판부는 만약 삼성서울병원 쪽이 최초 환자를 의심 신고했을 때 곧바로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졌다면 민사소송을 제기한 피해자에게 메르스를 전파한 환자의 추적 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며 또 평택성모병원 내의 접촉자 조사만이라도 정부가 제대로 했더라면 병원에서 메르스 환자와 소송 제기 환자의 격리가 이뤄졌을 것으로 보았다.
재난·재해 국가 책임 판결은 매우 드물어
재난이 발생하거나 감염병 확산, 해난사고, 산사태, 홍수 등 자연재해, 화재 대응 등과 관련해 국가나 지자체 등 정부의 책임을 묻는 민형사 소송은 그동안 심심찮게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민형사 모두 피해자나 유족들이 승소한 경우는 많지 않다. 특히 감염병과 관련해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늑장·부실 대응과 구조가 문제가 됐으며 최초 구조에 나섰던 해경 123정장 등 관련 공무원의 형사책임을 물어 재판부가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 제천 화재의 경우도 부실 구조와 대응과 관련해 소방관의 형사적 책임을 두고 유족과 일부 시민들의 의견이 엇갈려 논란을 빚고 있다.
한편에서는 각종 사고와 재난, 재해와 관련해 공무원과 국가의 책임을 강하게 물을 경우 특히 구조·구난 업무를 맡은 소방관 등 공직자들의 업무가 움츠러들 수 있다는 반론을 펴고 있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쪽과 그 유족과 가족들은 적어도 공무원의 업무태만과 직무유기, 그리고 결정적인 판단 잘못 등이 있었을 경우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만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법·제도를 만들거나 고치고 구조·구난에 온 힘을 쏟을 것으로 보고 있다.
메르스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이 과정에서 생명을 살릴 수 있거나 메르스에 걸릴지 않아도 될 사람이 감염된 데는 분명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질본)를 비롯한 정부 쪽과 병원 쪽의 업무태만과 직무유기 등이 있었다. 이번에 재판부가 메르스 감염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물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병원 쪽이 입원 환자의 메르스 감염을 의심해 검체 진단을 질본에 의뢰했을 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고, 기술적으로도 어렵지 않게 메르스 바이러스 유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재판부는 감염병 진단과 방역은 국가의 기본 임무인데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이를 태만히 해 메르스 창궐이 이루어졌고 억울한 환자까지 발생한 것에 대해 국가 책임을 물은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민사1심은 국가 무죄 판결
이 재판 결과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국가 책임 여부이다. 현재까지 이 사안과 관련해 정부나 공무원의 책임을 민형사적으로 물은 적은 없다.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1심 민사배상소송에서 재판부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지난 2015년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3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4명이 국가를 상대로 4억 원을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공산품은 기업의 자율적 안전관리 대상이고, 국가의 확인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이에 대한 법적 수단도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국가에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검찰도 2016년 관련 공무원들을 상대로 업무상 과실 여부 등을 조사한 적이 있지만 단 한명도 기소하지 않았다.
재판부의 당시 이 판결에 대해 피해자와 그 가족, 환경시민단체, 그리고 일부 법조계 인사들은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한 정부 책임 부분에 대해 사법부가 매우 좁은 시각으로 보고 국가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 반발하거나 반론을 폈다.
이들은 가습기살균제 피해는 안방에서 농약(가습기살균제 성분은 선진국 등에서 농약으로 사용함)을 매일 마구 뿌려댄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제품 때문에 빚어진 것이며 1994년 첫 상품 출시부터 참사의 원인이 드러난 2011년까지 17년간 국가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국가 책임을 물을만한 성격이라고 지적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8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대통령으로서 정부를 대표해서 가슴 깊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직접 끝까지 챙기겠다"고 강조하며 위로한 바 있다.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공식 사과한 것이지만 정부의 법적 책임까지는 인정하지 않았다.
사회적 참사 특조위, 국가책임 입증에 힘 쏟아야
우리 사회는 올 1월 '사회적 참사의 진상 규명 및 안전 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사회적 참사법)을 제정해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세월호 참사 등 최근 일어난 대표적 사회적 참사의 실체적 진실과 이를 토대로 안전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항해를 시작했다. 이 두 참사 모두 기업의 책임이 일차적이기는 하지만 대응과 구조·구난, 그리고 피해 구제와 관련해 정부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책임 소재를 놓고 최근 한 여론조사기관이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표본조사한 결과 다수가 옥시레킷벤키저 등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 기업을 첫손가락에 꼽았지만 정부 또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응답도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다. 따라서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세월호 참사 발생 원인과 구조·구난의 정부 책임 정도와 함께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한 정부 책임을 어느 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물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진상규명에 힘을 쏟아야 한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국가 책임은 앞으로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를 다양한 환경재난과 생활화학물질 내지는 생활용품 사용으로 인한 인명·건강 피해에 대해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다. 만약 국가 책임을 사법부가 어떤 식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생명과 안전을 다루는 시각과 법제도, 그리고 시스템의 패러다임이 확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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