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이 원장에게 '스프링클러 설치하자' 할 수 있을까?

[서리풀 논평] 문제는 '불평등한 권력관계'다

밀양에 있는 중소병원에 이어 서울의 대학병원에서도 불이 났다. 빨리 불길이 잡혔다니 다행이고, 무엇보다 사람이 상하지 않았다니 고맙다. 이번에는 그래도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작동하고 방화 셔터도 제구실을 한 덕분이라고 한다.

날씨가 추운 것이 한 가지 이유겠지만, 병원 화재가 계속되는 모양이 영 불안하다. 이번 신촌세브란스 병원의 경우는 큰 사고로 번지지 않았으니 다행이지만, 병원이나 요양시설 화재는 발생하는 것만으로 큰일이 되기 쉽다. 거동할 수 없거나 불편한 환자가 많으니 다른 시설과 옆에 놓고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인구 고령화 때문에 더 걱정이다 싶더니, 마침 일본에서도 비슷한 화재 사고가 생겨 나라가 시끄럽다. 삿포로에 있는 노인거주시설에서 큰불이 나 11명이나 희생자가 생겼다는데(☞관련 기사 : 일본에서도…'하류 독거노인' 화재 참사…삿포로 노인생활보호시설 화재로 11명 사망), 이번만 문제가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여러 차례 노인 시설에 화재 사고가 났다고 한다(바로 가기).


꼭 병원 화재가 이어져 그런 것이 아니라, 인구 고령화 때문이라도 남의 일로 보이지 않는다. 밀양 병원도 말이 병원 환자지 주로 노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고령사회에서는 화재와 사고의 패러다임 자체가 달라지는데, 화재 진압과 대피가 다 무슨 소용인가. 결코 남 일이 아닐진대, 우리 사회가 다가오는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우리는 한 주전 '서리풀 논평'을 통해, 병원과 요양시설의 화재를 막는 데는 국가권력(공권력)으로도 시장(경쟁)으로도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바로 가기 : 포항, 장성, 제천, 밀양,…참사를 막을 '제3의 길'이 있나?).

"시민과 지역사회 주민, 병원 직원과 노동조합, 환자와 보호자가 실질적인 권력을 축적하고 안전/생명/건강 시스템에 개입"하는 것이 핵심이고, 달리 표현하면 '민주적 공공성’에 기초한 안전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권력'이라는 표현에 주목하기를 부탁드린다. 새 거버넌스는 다름 아니라 새로운 권력관계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일상 표현으로 권력을 말할 때는 그 의미가 누가 일자리를 주고 자를 '권한'을 가졌다든지 또는 정부 예산을 따와서 자기 땅 바로 앞으로 도로를 낼 정도로 '힘'을 가졌다든지 하는 때의 그 권한이나 힘과 가깝다.

이론적인 권력 개념은 이런 일상 용법을 포함하되 범위가 훨씬 더 넓지만(한 가지만 참고한다면 다음 문헌이 좋을 것 같다. (바로 가기), 오늘 논지를 뒷받침하기로는 일상적 뜻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정도로 충분하다. 권력에 관한 고전적 정의를 응용하면, 권력은 "A가 B에게 행사하여 B를 성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


병원 화재와 권력을 연결하는 이유는 의사결정의 과정과 역동 때문이다. 밀양 화재의 원인과 경과 또한 여러 내·외부 의사결정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데,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 핵심 요인 한 가지가 바로 권력이다. 시설을 어떻게 갖추고 돈과 인력을 어느 정도나 쓸지, 또는 환자 안전과 건강을 어느 정도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든 의사결정은 권력과 그것의 상화관계 문제다.

권력의 범위를 너무 넓히지는 말자. 집단적으로 형성한 문화와 규범, 관습, 가치관(이른바 '안전 불감증'이라 부르는 것)이 직원의 행동이나 결정을 지배하면 이 또한 권력으로 부를 수 있겠지만, 일단 개인이나 집단의 상호관계, 그 사이에 있는 권력의 균형과 불균형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에서 권력과 상호관계가 드러난다. 병원의 직원은 원장이나 이사장에게 스프링클러 시설을 갖추자고 말할 수 있었을까? 간호사는 담당 의사에게 환자에게 이롭도록 이런 저런 조치를 하자고 할 수 있을까? 환자나 보호자는 의사나 간호사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 공무원은? 주민과 시민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누구는 거리낌 없이 불평하고 요구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누구는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삭여야 한다. 침묵이 버릇되면 나중에는 억압하는 권력을 의식하지 못하며, 종국에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도 잊는다. 더 나아가면, 힘을 가진 쪽의 논리와 시각을 스스로 자기의 것으로 여겨 내면화하기에 이른다. 권력이 갖는 힘이다.

이런 상호관계에는 당연히 개인적 요소와 특성도 영향을 미치지만, 사회적으로 형성된 '권력관계’가 더 중요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대체로 병원의 '주인’, 의사, 부자, 남성, 성인, 고학력이 권력의 원천이 되며, 이 권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불평등하게 분포한다.

권력의 시각에서 보면 중소병원의 의사결정은 병원의 주인('오너')이 독점한다. 미시적으로는 의사-간호사, 의료인-환자, 성별, 빈부에 따라 권력관계가 달라지지만, 병원 시설과 운영에 관한 한 '소유권'이라는 권력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짐작하건대 밀양 병원에서는 집단적 의사결정 과정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직원, 환자, 주민들은 불법, 벌금, 조치 등을 아예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이사장, 병원장과 직원, 환자와 주민의 역량이나 '스타일' 때문일까? 우리는 전적으로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신촌세브란스 병원의 화재 원인이 무엇인지, 무엇은 잘하고 무엇은 잘못했는지, 자세하게 아는 바가 없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개인의 잘못이나 실수로 보이는 많은 일이 사실은 불평등한 권력관계에서 빚어지는 일일 수 있다는 것. 개인의 품행이나 실수가 문제가 아니라, 좀 더 심층에 자리 잡은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가능성을 따지고 살펴봐야 한다.

전통적으로 병원에서 문제가 된 권력은 의사권력이었다. 의사와 다른 의료직, 의사와 환자, 전문의와 전공의 등의 관력관계. 그런 권력 중 일부는 여전하고 일부는 이동하는 중이다. 기존 권력을 대체하는 한 가지가 바로 '경제권력'. 병원에만 해당하지는 않지만, 최근에는 수익과 경영을 장악한 쪽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이 든 남성 의사가 독점하다시피 한 권력은 이제 '재단'과 '오너'로 옮겨간다.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성추행' 문제와 병원 화재는 바로 이 지점, 즉 불평등한 권력관계에서 서로 연결된다. 지금 문제가 되는 성추행 또한 개인의 품성과 인력, 일탈, 그리하여 도덕과 규범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젠더, 연령, 고용, 소유와 부, 지위, 상징자본 등 여러 축으로 '상호 교차하는(intersectional)' 사회적 권력관계가 표출된 것이다. 큰 항공사의 사주가 저지른 성추행을 '중첩되는' 권력관계가 아니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권력관계의 불평등이 근원에 있으면, 일제 점검이나 전수조사, 개인별 책임 묻기로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개별 사건과 개인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종결이 아니라 근본에서 권력관계를 재편하는 길고 어려운 과정의 한 단계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병원과 요양시설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합당한 조치를 해야 하지만, 이는 직원, 환자와 보호자, 시민이 참여하는 새로운 방식과 '체계'를 만드는 과정이 되어야 마땅하다. 아주 적극적으로 개인 병원이 아닌 공공병원을 생각해보자. 안전을 둘러싼 권력관계와 그 양상은 극적으로 바뀔 것이다.

대학, 의료기관, 기업, 언론, 검찰과 권력기관, 행정부, 문화계의 성추행도 마찬가지다. 어떤 조치라도 개인을 넘어 어그러지고 추악한, 그리고 굳어진 권력관계를 다시 편성하는 새롭고 넓은 '운동'과 발맞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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