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부터 일찌감치 독감 예방주사를 맞은 이들도 독감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독감주사를 맞았는데도 왜 소용이 없느냐는 하소연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백신의 효용성에 의문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다.
독감인줄 알고 병원에 갔다가 유행성 독감이 아니라 증세가 심한, 독한 감기라는 진단을 받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들도 있다. 반면 A형과 B형 독감바이러스에 동시에 감염됐다는 검사결과에 나에게는 어찌 이리 재수 없는 일이 벌어졌냐고 한탄하는 환자도 있다.
어떤 백신은 질병 예방에 거의 만능 구실을 하지만 독감 백신은 그렇지 않다. 예상되는 유행바이러스균주를 넣어 백신을 만들지만 그것이 들어맞지 않을 때도 왕왕 있다. 올해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독감 백신은 독감을 예방하기 위한 플랜 A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유행 예측이 빗나갈 수도 있고 백신을 맞았다고 해서 모두가 바이러스에 대항할 수 있는 면역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독감은 플랜 B가 필요한 감염병이다.
독감 백신만으로 해결 못해 플랜 B가 필요
여기서 플랜 B는 평소 섭생을 잘 하고 면역력을 기르면서 독감바이러스가 몸 안에 들어오더라도 잘 견뎌내는 몸 상태를 만들어 잘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플랜 A만 철석 같이 믿고 플랜 B를 소홀히 하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지금 그런 사람들이 기침과 몸살을 앓고 있다.
플랜 B가 때론 플랜 A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감염병 관리뿐만 아니라 최근 벌어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에서도 그 중요성이 드러났다. 소방당국이 뒤늦게 인정했지만 2층 여성목욕탕 진입이 늦어진 까닭은 백드래프트(창문을 깰 경우 급격한 공기 유입으로 내부 불길이 폭발하는 현상)에 대한 판단 잘못과 본부와 현장 간 무전교신이 18분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구조의 골든타임은 흘러갔다.
현장과 본부 간 무전 교신은 가장 기초적인 플랜 A에 해당한다. 현장에서 화재건물 도면을 실시간으로 본부로부터 전송받는 것도 플랜 A에 속한다. 하지만 플랜 A가 늘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제천 화재참사에서도 이는 작동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플랜 B가 작동되어야 한다. 하지만 작동됐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화재진압 매뉴얼에 플랜 B가 있는지조차가 의심스럽다. 만약 플랜 B가 있었다면 본부와 현장 진압 지휘부 책임자와 휴대폰으로라도 도면을 주고받고 소통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18분간 무전 불통, 왜 휴대폰으로 소통하지 않았는가?
대한민국은 IT강국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오고 있다. 무전 교신의 감도가 떨어져 골든타임 동안 제대로 교신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변명이다. 페이스북 동영상 생중계까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세상이다. 거의 모든 정보를 휴대폰으로 상대방과 주고받지 않은가.
만약 현장에 출동할 때 건물도면을 제때 챙겨가지 못했거나 이를 디지털로 전송하는 시스템이 제천소방당국에는 없다면 아무런 손을 쓸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본부에서 가지고 있는 도면을 휴대폰 사진으로 찍어 문자메시지나, 카톡 등 다양한 휴대폰 소통 방법으로 현장 지휘관에게 실시간 전송해주는 것이 바람직한가. 답은 분명하다.
미국 워싱턴 정가의 유명 여성로비스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미스 슬로운>을 보면 플랜 B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총기규제 법안을 놓고 벌어지는 찬반 양쪽의 치열한 로비전에 뛰어든 슬로운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상원의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애쓴다.
한 상원의원이 연설하는 모임에 부하직원을 보내 그에게 질문 기회를 얻어 규제법에 찬성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실행에 옮긴다. 하지만 반대쪽의 로비로 첫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 부하 여직원이 당혹해 할 때 다시 반전이 일어난다.
슬로운이 플랜 A가 실패할 것에 대비해 플랜 B의 그물을 짜놓았던 것이다. 플랜 B에 따라 대학교수로 신분을 위장한 전문배우가 현장에서 질문 기회를 얻고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상원의원은 찬성을 약속한다. 이를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던 부하 여직원은 술로운의 주도면밀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전장에서든, 선거에서든, 사업에서든, 협상에서든 플랜 B는 늘 가동돼왔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것이 근래 들어서 플랜 B란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플랜 B뿐만 아니라 나아가 플랜 C, D가 필요할 수도 있다.
안전 포함 모든 분야에서 플랜 B, C, D를 마련해 가동해야
특히 사람의 생명, 더군다나 많은 인명 손실을 가져올 수 있는 참사나 재난의 경우 대개 여러 계획과 전략이 동시에 먹혀들지 않아 생기기 때문에 다양한 플랜들을 마련해 순차적으로 가동해야 한다. 그리고 평소에 플랜 A만 가동하는 연습을 할 것이 아니라 B. C, D 등도 동등한 자격으로 연습 대상에 올려야 한다.
만약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참사나 재난, 그리고 최근 제천 화재참사와 같은 재난 때 플랜 B나 C만이라도 제대로 가동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버스 지나가고 난 뒤에 손을 들어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 많은 생명을 구했을 것이고 방재당국이 유가족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이다.
올해는 모든 분야, 특히 안전 분야에서 플랜 B와 C가 마련돼 있는지 철저하게 점검하자. 만약 없다면 최상의 플랜 B와 C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 머리를 맞대고 심사숙고해 정해두자. 이와 함께 지금까지 플랜 B와 C를 실행하지 못해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 재난과 사고가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교훈을 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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