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신과 함께>를 보고나서, '쌍천만 감독'으로 불리는 흥행의 귀재 윤제균의 말이 떠올랐다. <해운대> 시나리오를 컨설팅 하는 자리에서 그는 "쓰나미 전에 관객들을 웃기다가 쓰나미가 몰려오고 인물들이 죽어나가면서 관객을 울리면 됩니다. 그렇게 웃고 울리면 관객들은 만족스럽게 극장 문을 나서게 될 것이고, 그러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고 자신했다. 반신반의 했지만, <신과 함께>까지는 맞는 말인 것 같다. 특히 신파를 동원해 최대한 관객을 울릴 수 있으면, 흥행은 떼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 13편 가운데 세 편(<국제시장> <7번방의 선물> <해운대>)은 그것을 증명해준다. 나머지 흥행작들 중에도 신파적 요소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평생을 바친 남자(<국제시장>), 어린 딸을 위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채 사형당하는 장애인 아버지(<7번방의 선물>), 쓰나미가 몰려와 차례로 죽어가는 인물들(<해운대>). 그들의 안타까운 처지와 비극을 최대한 증폭시키는 장면을 접하면, 울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저승편', '이승편', '신화편'으로 구성된 주호민의 만화 <신과 함께>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각색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승편'을 예로 들면, 저승과 이승을 오가며 두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다채로운 저승세계와 다양한 인물들이 출몰한다. 김용화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저승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보다 각색이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순제작비 175억 원(후편까지 합하면 350억 원)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관객 600만 명. 한국영화 흥행의 또 다른 보증수표가 스펙터클이라면, CG를 통해 지옥의 풍경을 구현해내면 볼거리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 많은 관객을 동원하려면, 스펙터클만으로는 부족하다. 김용화 감독은 <국가대표>를 통해 관객을 울리고 흥행에도 성공한 경험이 있으니 신파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원작에서, '저승편'의 주인공 김자홍은 회사원이다. 그는 탈모가 될 정도로 직장에서 고생하다 업무상 억지로 마시던 술로 병을 얻어 39살에 결혼도 못하고 죽음에 이른다. 그가 특별히 나쁜 죄를 지은 적 없는 평범한 인물이라 해도 죄를 촘촘하게 찾아내는 지옥의 관문을 통과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국선변호사 진기한의 유능하고 헌신적인 변호 덕분에, 김자홍은 49일 동안 7개의 지옥을 무사히 통과해 환생하게 된다. 김자홍의 이야기가 저승에서 전개된다면, 억울하게 죽어 원귀가 된 유성연 병장의 이야기는 이승에서 펼쳐진다.
영화는 김자홍의 이야기는 원작과 완전히 다르게 바꾸고, 유성연의 이야기는 거의 그대로 각색했다. 김자홍은 소방관이며, 불을 끄던 중에 아이를 구하려다 사망한다. 김자홍과 일면식도 없던 유성연은 영화에서 동생 수홍으로 설정된다. 그는 군대에서 복무하다 관심사병 원동연의 실수로 총에 맞는다. 김자홍의 49제가 끝나기도 전에 동생이 죽은 것이다. 형제가 젊은 나이에 잇따라 세상을 떠난 것도 기가 막힌데, 혼자 남게 된 그들의 늙은 어머니는 말을 못하는 장애인이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남편 없이 온갖 고생을 감내하며 키운 자식들을 한꺼번에 다 잃은 것이다. 이 정도 설정으로는 관객의 눈물을 짜내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김자홍은 더욱 비극적인 인물로 설정된다.
김자홍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어머니는 치료가 어려운 중병에 시달리고 동생은 영양실조에 걸린다. 그는 어머니를 살해하고 동생과 함께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고 했지만, 동생에게 들키는 바람에 실패한다. 그 후 그는 가출을 하고 죽을 때까지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집에 오지 않는다. 대신 낮에는 소방대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도 쉬지 못하고 번 돈을 어머니와 동생의 생계를 위해 쓴다(어떤 방법으로 돈을 전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자홍은 단 한순간도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다가 결국 남을 구하고 죽은 가련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의 가족은 여전히 가난한 상태이며, 동생은 고시에 매달린다. 영화의 시대배경은 1970~1980년대가 아니라 2016년이다.
신파를 극대화하기 위해, 원작의 지옥도 많이 변형했다. 원작은 '불교의 저승시왕(죽은 자를 심판하는 열 명의 왕)과 열개의 지옥'에 근거해, 망자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49제 같은 전통 의식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이야기의 설정에 따라 편의대로 지옥의 순서를 바꾸고 지옥명도 바꿔버렸다. 어머니와 아들의 신파를 클라이맥스에 배치하기 위해, 3번째 송제대왕의 한빙지옥을 7번째 염라대왕의 천륜지옥으로 바꾸는 식이다.
천륜지옥에서 김자홍은 어머니가 아들의 행위를 알아챘으면서도 의식이 없는 척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들이 집을 나가는 건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자신을 죽이려는 아들을 방치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는 차라리 병든 자신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어머니, 죽어서 그 사실을 알게 되는 큰 아들, 죽어서 어머니의 꿈에 나타난 둘째 아들, 동반자살을 감행하려 했던 가난한 가족의 비극을 전시하면서, 영화는 관객의 눈물을 충분히 짜내는데 성공한다(이 신파의 기술은 <7번방의 선물>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아버지가 영문을 모른 채 '아빠'를 부르는 어린 딸에게 애써 웃음 지으며 작별하는 장면과 쌍벽을 이룬다). 물론 이밖에도 관객의 더 많은 눈물을 위해 자질구레한 장치들이 널려있다. 이 신파로부터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결국 '효도'인 것일까? 그런데 효도를 말하면서, 김자홍에게 어머니의 살해 시도와 어머니의 용서라는, 엄청난 '죄책감'까지 얹어야 하는 것일까?
신파의 문제는 개인에게 벌어진 사건을 오로지 감정에 호소하면서 전후맥락과 배경을 가려버리는 데 있다(예를 들면, 국정농단자들이 초췌한 모습으로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고, 중병을 호소하고, 아이가 보고 싶다고 울먹이는 식이다). 원작의 김자홍의 죽음에는 한국의 직장문화와 관행 같은, 사회적 원인을 제시하고 있지만, 영화의 김자홍의 죽음은 그저 불운한 사고일 뿐이다.
인터넷으로 <신과 함께>를 검색하면, 천만관객 운운하는 기사들이 뜬다. 한편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흥행기록을 갱신하는 건 뉴스거리가 될 수 있고, 그 영화를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에게는 너무나 기쁜 소식이겠지만, 사실 관객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저 돈과 시간을 투자했는데 관객이 많이 든 영화가 되었다면 실패하지 않은 선택이라고 만족하는 정도일 것이다. 5000만이 좀 넘는 남한 인구에서, 천만관객이라는 수치는 그렇게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천만관객을 영화흥행의 화제 중심에 두고 그 수치에 집착하는 분위기가 만연해있다(지금까지 롯데엔터테인먼트에서 배급한 영화 중에 천만관객 영화가 없었는데 그래서 <신과 함께>의 흥행에 롯데의 기대가 아주 크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올해 등장한 한국영화의 블록버스터 또는 텐트폴 영화는 이상할 정도로 감독의 개성이 사라져버렸다. 대부분 흥행의 공식을 최대한 동원해서 이리저리 끼워 맞춘, 규격화된 상품 같았다. 결국 천만관객 영화라는 레테르 속에서, 한국영화는 질적인 면에서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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