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트럭섬 日위안부 26명, 그것은 사실이었다

서울시-서울대 연구팀, 당시 자료 통해 26명 피해 사실 밝혀

일제 강점기 남태평양의 '트럭섬(Chuuk Islands)'에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의 존재가 처음 밝혀졌다.

생전 피해 사실을 밝혔음에도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되지 못한 고 하복향 할머니의 피해 사실도 자료를 통해 공식 확인됐다.

일제에 의한 조선인 피해 사실을 입증할 자료로서 가치가 큰데다, 남태평양 일대에서 일어난 조선인 피해 사례를 구체적으로 밝힌 사례여서 주목된다.

11일 서울시는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이하 연구팀)과 함께 일제 강점기 당시 미군의 전투일지, 조선인 위안부들이 귀환 당시 탑승한 호위함 이키노(Escort Ikino)호의 승선 명부, 귀환 당시 사진자료, 관련 사실을 다룬 <뉴욕 타임스>의 1946년 3월 2일자 기사 등을 검토한 결과, 그간 피해자 등의 증언으로만 확인 가능했던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의 실체를 처음 규명했다고 밝혔다.

▲ 트럭섬에 끌려간 조선인. ⓒ서울시 제공

트럭섬 조선인 귀환자 3483명... 이 중 위안부 26명 확인

정확한 명칭이 '축(chuuk)'인 트럭섬은 미크로네시아연방의 4개 주 가운데 하나로, 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부르던 '트루크 제도(トラック諸島)'라는 이름이 조선인 사회에 '트럭'으로 변경돼 소개됐다.

시가 확인한 전투일지에 따르면 이 섬에서 귀환한 총 1만4298명 중 3483명이 조선인이었다. 이 중 군인이 190명, 해군 노무자가 3049명, 민간인이 244명이었다. 이 중 조선인 위안부 26명과 아이 3명은 1946년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귀환했다.

함께 발굴된 당시 <뉴욕 타임스> 기사 '트럭의 일본인들은 포로가 아니다(Japanese on Truk are not prisoners)'는 당시 상황을 두고 "트럭섬 사령관인 해병 준장 로버트 블레이크에 의해 조선인과 27명의 조선인 위안부(comfort girls)들이 보내졌다. 블레이크 장군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남아서 미국인을 위해 일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다른 조선인들이 일본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바다에 빠뜨릴 것이라고 두려워했지만, 블레이크 장군은 그러한 일을 듣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가 위안부를 26명이 아니라 27명으로 기재한 이유는 아이 3명 중 한 명을 위안부로 분류했기 때문이리라고 연구팀은 추정했다.

이키노호의 승선명부에는 368명의 탑승인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 중 조선인은 249명이었고 여성과 아이는 29명이었다. 이 명단에 조선인 여성 26명(위안부)과 아이 3명의 이름과 직업, 조직, 주소가 기재되어 있다.

이름은 대부분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으로 기재되었다. 직업은 여성의 경우 모두 노동자(labourer), 아이는 무직(unemployed)으로 기재되었다. 시는 다른 문서와의 비교를 통해 이 여성들이 위안부임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트럭섬을 비롯해 남태평양 일대에서 조선인이 입은 피해 사실은 그간 구체적으로 입증되지 못했다. 최근 <프레시안>에 연재된 이동석 PD의 '이동석의 남태평양 아리랑',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기획에 따르면, 아직 남태평양 곳곳에 제대로 발굴되지 못한 조선인 유해 등이 상당수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동석의 남태평양 아리랑' 기획,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기획 바로 보기)

이복순 할머니 증언과 자료 일치 확인

특히 이번 조사를 통해 정부에 공식 등록된 239명의 위안부 피해자 중 트럭섬으로 끌려갔다고 밝힌 유일한 증언자인 고 이복순 할머니로 추정되는 인물을 발견했다고 서울시는 강조했다. 증언과 사료가 일치함을 입증해낸 것이다.

시는 추적 결과, 이키노호 승선명부 중 대구에 주소지를 둔 '히토가와 후쿠준'이 고 이복순 할머니였다고 밝혔다.

연구팀이 수집한 자료와 이복순 할머니의 생전 증언을 종합하면, 이 할머니는 1943년 트럭섬에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다. 이 할머니를 포함해 위안부 피해여성 26명과 아이 3명은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 '우랑가와'에 도착해 도쿄로 갔다가, 기차를 타고 하카타로 다시 이동했다. 이 할머니가 언급한 '우랑가와'는 일본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요코스카시(横須賀市)의 우라가(浦賀) 항이다. 이 할머니는 하카타항에서 부산행 배를 타고 귀국했다.

▲ 고 이복순 할머니. ⓒ서울시 제공

하복향 할머니 피해 사실 공식 확인

시는 아울러 생전 위안부 피해 사실을 밝혔음에도 정부에 등록되지 못하고 2001년 숨진 고 하복향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였음도 이번 조사를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위안부 피해자 중 본인 증언이 아니라 사료를 통해 피해 사실을 증명한 최초의 사례다.

시는 필리핀으로 끌려간 위안부 피해자의 포로 심문카드 33개를 확보, 사진과 생일날짜, 주소지, 지문 등을 토대로 하복향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증명했다고 밝혔다.

하복향 할머니는 공장에 일하러 가면 집을 살 수 있다는 꼬드김에 속아 1941년 만 15세의 나이에 타이완으로 갔다. 이곳에서 이른바 '색시 장사'를 하던 업주는 하복향 할머니 등 여성 40여 명을 필리핀 마닐라로 보냈고, 이에 따라 하 할머니는 그곳에서 3년여 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할머니는 생전 과거를 밝히기 두려워 피해 신고를 하지 않다, 2001년 2월 한국정신대연구소 고혜정 소장에게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고백했다. 이후 할머니는 열흘도 지나지 않아 별세했다.

시는 "정부에 공식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는 239명이지만, 하복향 할머니와 같이 피해사실을 밝히지 않아 공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피해자가 많을 것"이라며 "이번 자료를 정리·분석해 위안부 피해에 관한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실태 파악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시는 지난해부터 2년간 새롭게 발굴, 축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료를 바탕으로 내년 1월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두 권의 책으로 출판할 예정이다. 아울러 2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자료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한국과 중국, 일본의 관련 전문가와 단체를 초청, 각국 위안부 자료의 성과를 공유하고 향후 협력 방안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자료를 검토한 박정애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는 "(위안부 피해 사실) 진상 규명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 전제"라며 "자료의 체계적 조사와 수집, 연구해제 및 공공 제공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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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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