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법정은 우리 사회가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는 영국일 것인지,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러시아 차르체제일 것인지 선택되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달 22일,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을 운영하며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이른바 금서를 소지·반포·판매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진영 씨의 결심 공판에서 변호인들은 이같이 최종변론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재판부는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는 영국'의 길을 택했다.
20일 서울남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심규홍)는 이 씨에 대해 "일부 표현물에 이적성이 있으나 이 씨의 행위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이 씨는 지난 1월 5일 구속된 이후 약 6개월 만에 자유를 되찾았다.
"자본주의 비판, 국가 존립에 대한 실질적 해악 아니다" 재판부 공언
검찰은 이 씨가 노동자의 책 사이트를 이적 목적에서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이 씨가 올린 서적 가운데 북한을 찬양·선전하는 표현물이 있으며, 평소 이 씨가 체제 전복 의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검사는 이 씨가 이메일, 노동자의 책 자유게시판 글을 통해 '혁명', '자본주의 분쇄', '능지처참할 자본주의', '계급 투쟁' 등을 언급한 사실을 근거로 제시했다. 검사는 "겉으로는 단순 자료 제공을 위해 노동자의 책을 운영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평소 글을 보면 내심의 이적 의사가 드러난다"며, 또한 "북한과 대적하는 상황에서 미세한 흠집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씨에 대해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우선 이 씨가 노동자의 책에 올린 서적 가운데 일부는 이적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국가 체제를 위협하는 적극적인 표현이 아니라고 해서 이적성이 없다고 볼 수 없고, 표현물 내용뿐 아니라 작성 동기, 정황 등을 종합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1만2000명에 달하는 회원에게 이적 표현물을 볼 수 있게 한 것은 '반포' 행위로 인정되며, 피고인은 이적성이 인정되는 표현물을 인식하고 반포했다"고 했다.
그러나, △반포한 이적 표현물을 직접 작성한 게 아니며, 그것들이 본인 가치관에 전적으로 부합된다고 볼 수 없다는 점, △이적 표현물 대부분이 공공도서관 등을 통해 쉽게 열람 가능한 점, △노동자의 책에 올라온 표현물 가운데 이적 표현물이 극히 일부인 점, △노동자의 책 회원들을 상대로 학습 모임을 시도한 점은 인정되지만 실제 운영된 적이 없으며 모임이 이적 목적인지 불분명하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재판부는 결국 검사가 지적한 '이적 위험성' 대신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손을 들어줬다. "북한과의 연계성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적 표현물을 개제한 것 자체로 체제에 실질적인 해악을 끼쳤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철도노조원이었던 이 씨가 노동자의 책 자유게시판을 통해 '전면 파업' 등을 주장한 데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판단했다.
"피고인이 평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글을 올렸지만 이미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견해가 펼쳐지고 있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대한민국에서 자유로운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가졌다고 해서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해악이 되는 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낭독하는 사이 여러 번 '국가보안법의 엄격한 제한 해석'을 강조했다. 과거, 무리한 적용으로 수많은 인권을 침해했던 국보법의 폐해를 에둘러 꼬집은 것이다. 국가보안법 1조 2항은 "이 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서는 제1항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고 적시하고 있다.
재판부는 "결과적으로 이적 목적을 밝히기에 검찰의 입증이 부족하다고 판단한다"면서 "피고인에 대해 무죄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무죄 선고에 이 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환하게 웃으며 퇴정한 이 씨는 베이지색 미결수 옷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6개월 만에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어 법원을 나섰다.
"국보법, 어겨서 깨뜨리자"
이날 선고공판에는 노동자의 책 국가보안법 탄압저지 공동행동 회원, 철도노조 동료 등 30여 명이 참석해 이 씨의 무죄 석방을 지켜봤다.
이들은 이 씨의 무죄를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공동행동은 기자회견을 준비했지만, 무죄 판결에 대비한 기자회견문은 만들지 못 했다며 즉석에서 참가자 발언을 청했다.
이 씨 또한 "사실 (무죄를) 생각하지 못했다"며 "보석도 거부당하고 재판 과정에서도 여러 점이 찝찝했는데 제가 어리벙벙할 정도로 무죄를 받았다"며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0.75평 감옥에서 명상 호흡으로 6개월간 겨우 버텨냈지만 그 가운데서 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어 "한 번의 샤우팅(외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꼼꼼히 공부함으로써 선전하고 조직하는, 그런 활동가의 자세를 얻기 위해 학습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며 "국보법을 비롯한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자"고 했다.
이 사건 변론을 맡은 김종보 변호사는 이날 판결에 대해 "지극히 상식적이고 법리적이고 너무나 타당한 결정을 했다"며 "사법부가 국보법의 폐해를 인정하고 엄격하게 해석한 것"이라고 총평했다.
그는 "나아가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인권으로서 보장되고 옹호되어야 한다"며 "이번 판결은 그런 점에서 우리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국보법이라는 희대의 악법을 통해 깨닫게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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