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11일 이전 정권에서 있었던 정치 개입 의혹 13건에 대해 조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원회를 통해 공개한 조사 대상은 다음과 같다. △2012년 SNS 대선 개입 의혹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 △노무현 전 대통령 논두렁 시계 사건 △문화계 블랙리스트 △헌번재판소 사찰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 사찰 △우파단체 지원 △세월호 참사 관련 의혹 △좌익효수 필명 사건 △해킹프로그램(RCS)을 통한 민간인 사찰 의혹 등과 함께 △박원순 서울시장 관련 문건 △청와대 비선 보고 사건이 꼽혔다.
이 가운데 박원순 문건, 청와대 비선 보고 사건은 서로 깊이 연관돼있다.
특히 박근혜 정권의 '국정 농단'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 두 사건을 연결하는 핵심 인물이 있다. 추명호 전 국정원 국장이다. 추 전 국장은 박근혜 정권의 비선 실세 최순실 씨와 유착 의혹을 받고 있다.
그간 추 전 국장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제대로 진상 규명이 된 부분도 없었다. 따라서 추 전 국장에 대한 이번 조사를 통해 박근혜 정권의 또 다른 국정 농단의 내막이 드러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추 전 국장이 누구이고, 어떤 의혹에 휩싸였고, 박근혜 정권의 어떤 실세들과 어울렸는지 추적해 봤다.
추명호 누구?...박원순 제압-반값등록금 문건 작성자
이명박 정부에서부터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추 전 국장은 국내 정치에 전방위 개입한 인물로 악명이 높다.
추 전 국장이 처음 알려진 것은 국정원이 이날 조사 대상으로 포함한 '박원순 제압 문건' 작성 논란 때였다. 추 전 국장은 바로 이 '박원순 문건'의 실제 작성자로 지목돼 있다.
박원순 문건의 정확한 명칭은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방향'이다. 2013년 5월 당시 민주통합당 진선미 의원이 공개해 문건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으나, 실제 작성일은 그보다 1년 6개월 앞선 2011년 11월 24일이다.
문건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 이후 세금 급식 확대, 시립대 등록금 대폭 인하 등 좌편향·독선적 시정 운영을 통해 민심을 오도, 국정 안정을 저해함은 물론 야세 확산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어서 면밀한 제어 방안 강구 긴요" 등 상황 진단과 함께, "여당 소속 시의원(28명)들에게 시 예산안에 대한 철저한 심의를 독려", "자유청년연합·어버이연합 등 범보수 진영 대상 박 시장의 좌경사 시정을 규탄하는 집회·항의 방문 및 성명전 등에 적극 나서도록 독려" 등 구체적 대응 전략이 나와 있다.
추 전 국장이 작성한 문건은 이뿐만이 아니다. 반값등록금 운동을 차단하기 위한 계획이 담긴 문건 작성도 주도하며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에 앞장섰다. 2011년 6월 작성된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로 파상 공세 차단' 제하의 문건에는 "야권의 등록금 공세 허구성과 좌파인사들의 이중처신 행태를 홍보자료로 작성, 심리전에 활용함과 동시에 직원 교육 자료로도 게재"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특히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과 정동영 민주당 의원을 겨냥, "자녀를 해외로 유학보내는 등 표리부동 행보"라고 비난한다.
'좌편향' 인물‧이슈 등에 대응한 공적을 인정받은 덕분인지, 추 전 국장은 박근혜 정권 출범과 함께 청와대로 직행했다. 박근혜 정부 인수위원회를 거쳐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실에도 입성해 박 대통령 관리 업무를 맡았다. 추 전 국장은 그러나 2013년 박원순 문건으로 논란이 커지자 국정원에 복귀했다.
우병우와 '한 팀'으로 대법원장 사찰했나?
물의를 일으켜 국정원으로 돌아왔음에도 추 전 국장은 더욱 승승장구했다. 2014년 8월경 단행된 정기 인사에서 국내정보 수집을 총괄하는 부서의 국장(1급)으로 승진한 것이다. 이병기 당시 국정원장은 추 전 국장을 제외한 인사안을 청와대에 올렸다. 그러나 청와대로부터 'OK 사인'이 나지 않았다. 결국 추 전 국장 인사를 포함해 올리자 가까스로 통과됐다.
추 전 국장을 봐주는 뒷배로 의심을 받는 인사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 가운데에는 추 전 국장과 우 전 수석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 등장한다. 2014년 8월 7일 자 메모에는 "우병우팀, 허수아비 그림", "애국단체 명예훼손 고발"과 "경찰과 국정원 팀 구성"이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리고 그 국정원팀은 "6국 국장급"이 맡는 것으로 돼있다. 비망록 기록대로라면 당시 6국장은 추 전 국장이다. 우병우 당시 민정비서관을 중심으로 한 팀이 있었고, 추 국장이 그 밑에서 일했다는 뜻으로 유추할 수 있다.
우 전 수석과 추 전 국장은 '한 팀'으로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2014년 9월 23일 자 김영한 비망록에 따르면 추 국장은 '정보 수집' 담당으로 등장한다.
지난해 12월 국회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장에 대한 사찰 의혹이 제기됐다. 지난 2014년 '정윤회 문건'을 보도했다가 경질된 조한규 전 세계일보 사장이 청문회에서 공개한 양 대법원장 사찰 관련 대외비 문건에는 국정원 보안 마크를 나타내는 '차'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문건에 대해 김영한 비망록을 근거로 들며 "(추 전 국장이) 국정원의 모든 수집 정보를 장악하는 위치로 간다. '리스트를 만들어 추적하여 처단토록, 정보수집, 경찰과 국정원에 팀을 구성하도록'이라고 돼 있다"며 "무시무시하다. 이 정도면 사찰공화국"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추 전 국장은 우 전 수석에게 최순실 씨 관련 자체 첩보 보고서를 만들어 비선 보고하기도 했다. 국정원장의 재가 없이 국정원 내부 자료를 외부에 유출하는 것은 불법이다. "찌라시(정보지) 수준에 불과해 원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사전 정보가 유출되는 바람에 공식 보고가 차단됐다고 보는 게 설득력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진짜 뒷배는 우병우 아니라 최순실?
추 전 국장의 청와대 비선 보고 사실이 알려진 것은 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소용돌이치던 지난해 11월이었다. 이후로는 더욱 충격적인 사실들이 밝혀졌다. 추 전 국장이 우 전 수석이 아닌 최 씨와 직접 소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증언, 제보가 속출했다.
최 씨의 입김은 추 전 국장을 타고 결국 국정원 내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F4'로 불리는 추 전 국장의 최측근 네 명이 주요 보직을 독점하는 등 전횡을 휘두른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전해졌다. 이들이 승진 등을 위해 최 씨 정보를 청와대 비선으로 빼돌렸을 것이란 해석도 나왔다.
추 전 국장을 둘러싸고 '국정원 내 최순실 라인' 의혹이 제기되자, 국정원은 감찰에 착수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 별다른 불법성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셀프 감찰'의 한계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제 국정원과 청와대, 추 전 국장과 최순실의 상관관계를 푸는 일은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적폐청산TF에 달렸다.
13명으로 구성된 적폐청산TF는 위원장인 정해구 성공회대 정치학 교수를 비롯해 외부 전문가가 8명이 포함돼있다. '제 식구 감싸기' 등 한계가 명확한 내부 조사와 달리 외부 전문가 주도의 조사이니만큼 기존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날 시 정식 수사로 이어질 가능성도 열려있다. 이번 조사를 통해 박근혜 정권의 새로운 비리가 드러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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