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옥자>는 봉준호의 여섯 번째 장편 영화이다. 영화는 2007년 뉴욕, 농화학 대기업 미란도에 새로 부임한 총수 루시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프리젠테이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루시는 세계 식량난 해소에 일조하게 될 슈퍼돼지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세계 곳곳에 26마리의 슈퍼 아기돼지를 분양하겠다고 발표한다. 루시는 슈퍼돼지가 적게 먹고 적게 싸고 체구가 클 뿐 아니라 아름다운 특별한 존재라고 강조한다. 한국에서는 강원도 산골의 우수축산농 주희봉이 그 중 한 마리를 키우게 된다. 조실부모한 주희봉의 손녀 미자는 슈퍼 아기돼지를 ‘옥자’라고 부르며 동생이자 친구로서 애지중지 한다.
효율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하는 기업의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친환경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옥자가 울트라 슈퍼 돼지로 자라는 데는 10년이라는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다. 10년이라면 어떤 동물과도 가족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대상에 관계없이 ‘인간적인 특성’을 발견하면 어떤 정서적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로봇이 기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간을 닮은 로봇이 넘어지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창조된 옥자는 미자와 함께 있는 알콩달콩한(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1988)의 몇몇 장면 같은) 장면뿐만 아니라, 미자가 벼랑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 과감하고 영리하게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해내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럼으로써 관객은 미자가 옥자에게 갖는 끈끈한 애정에 공감하게 된다.
강원도 산골에서 학교도 다니지 않고 친구도 없이 할아버지와 살아가는 미자를 보면서, '산골소녀 영자 이야기'가 떠올랐다. 약초 캐는 아버지를 도우며 산 속에서 살아가던 영자가 2000년 7월, 매스컴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결국 배금주의 사회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비극이었다(그런데 정말 이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 봉준호는 <스타뉴스>와의 인터뷰(2017/06/08)에서, "시놉시스가 하나 있었다. 산골소녀 영자 사건처럼 산에서만 살던 한 소녀가 정말 큰 산삼을 발견하고 나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다"고 말한다). 10년이 지나자 미란도에서는 본격적으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슈퍼 돼지로 자란 옥자를 회수하러 온다. 그들에게 옥자가 잡혀가자, 미자는 물불 가리지 않고 옥자를 찾아 나선다.
'잃어버린 것을 찾아다니는 설정'은 봉준호 영화에서 계속 반복된 모티브이다. 장편영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에서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경리직원 현남이 아파트 주민의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아다닌다. <살인의 추억>(2003)에서는 형사들이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으러 동분서주한다. <괴물>(2006)에서는 아버지 강두가 괴물에게 잡혀간 딸 현서를 구하려고 한강일대를 헤맨다. <마더>(2009)에서는 엄마가 여고생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아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진범을 찾아다닌다. 다시 말해서, 봉준호는 동일한 설정을 다른 여러 가지 장르에 대입했을 때,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계속 시험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남이 찾던 강아지는 경비아저씨의 보신탕이 되어버린다. 형사들은 끝내 살인마를 잡지 못하고 여중생의 죽음도 막지 못한다. 강두는 죽은 현서와 조우하게 된다. 엄마는 아들이 진짜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 아들을 되찾는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것을 찾아다니는 설정’의 결말은 모두 비극으로 끝난다.
<옥자>는 이전 봉준호 영화를 결산한 작품이라고도 평가 할 수 있는데, 특히 <괴물>과 미묘한 대구를 이루고 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괴물'과 '옥자'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동기부터 유사하다. 봉준호는 괴물에 대해서는 "한강다리를 기어 올라가는 괴물을 본 적이 있다"고 했고, 옥자에 대해서는 "운전 하다 도로 가운데 있는 이상한 동물의 비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괴물이 인간을 잡아먹는 반면, 인간은 슈퍼 돼지를 잡아먹는다. 그러므로 강두는 괴물에게서 여중생 현서를, 현서와 비슷한 또래의 미자는 괴물 같은 기업 미란도에게서 옥자를 구해내야 한다. 강두가 하려는 일을 막는 장애물은 괴물의 위험성을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의 위험성으로 바꿔치기 하려는 공권력과 미군이다. 이 설정에 개연성을 더 하기 위해, 1980년대 한국사회의 상흔들이 소환되었다. 이를 통해 이 영화는 정치영화의 면모를 보이면서, 한국 사회를 향한 풍자와 냉소 그리고 불안을 감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다시 봐도 언젠가 직접 경험한 듯한 기시감을 준다.
<옥자>에서, 미자 앞에 놓인 장애물은 대기업 미란도이다. 미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미란도 기업의 실체를 폭로하려는 동물해방전선(ALF) 단원들이 도움을 주려고 등장한다. 여기서 사악하고 잔머리 잘 굴리는 루시와 미란도 기업 그리고 엉뚱한 괴짜 같은 ALF 단원들의 행태는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일종의 클리셰 같다. 또 공장제 축산업의 문제 등은 제기되지만, 실재 도살장이 컴퓨터 그래픽의 슈퍼 돼지 도살장으로 대체됨으로써, 도살의 잔혹함은 훨씬 완화되었다. 도살장 장면에서 마음의 동요를 느끼게 되기는 하지만, 크게 불편하지 않게 볼 수 있다. 옥자가 당한 끔찍한 학대도 마찬가지다.
<괴물>의 현서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어린 소년 세주를 괴물에게서 구한 것처럼, 또는 할리우드 영화의 결말처럼, 결국 미자는 옥자를 구해낸다. 동일한 모티브의 봉준호 영화 가운데, 최초의 해피엔딩이다. 심지어 봉준호 영화답지 않게, 이차대전의 나치수용소 같은 동물농장에서 옥자가 슈퍼 돼지부부의 새끼 한 마리를 구해 한국으로 데려오는 훈훈한 장면도 있다. <마더>를 보면, 봉준호가 모성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옥자>에서는 소녀와 암컷이 옥자와 아기 돼지 구하기에 성공한다. 그러나 옥자에게 하나 달린 가슴을 클로즈업 하는 쇼트에는 여전히 모성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엿보인다.
<옥자>는 할아버지와 미자가 한 상에서 밥을 먹는 장면으로 끝난다. <괴물>의 마지막 장면의 반복이다. 이 때 강두는 한강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총을 들었다. 반면 <옥자>에서는 엔딩 타이틀이 지나간 다음 에필로그가 등장한다. ALF의 리더가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또 다시 단원들을 이끌고 큰 소란을 벌이러 가는 장면이다. 기나긴 엔딩 타이틀을 인내심을 갖고 지켜본 관객을 위한 서비스일까? 이 에필로그 역시 이전 봉준호 영화와는 다른 지점이다.
결국 <옥자>는 루시/틸다 스윈튼이 입은, 한복을 많이 개량한 옷(사진1)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또는 돼지가 슈퍼돼지로 변형된 것처럼, 봉준호의 한국영화가 넷플릭스 영화로 부풀려진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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