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가뭄, 기후변화의 증거인가

[서리풀 논평] 기후변화의 정치, 문제의 '국지화' 경향

어느 지역을 가릴 것 없이 가뭄 피해가 크다. 충남 서북부 등 일부 지역에서는 저수율이 0%가 되어 기능이 정지된 저수지가 속출한다니, '최악의 가뭄'이란 표현이 빈말이 아닌 모양이다.

어떻게든 농사 피해를 줄이는 것이 큰 걱정거리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걱정이겠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생계가 달린 중대사가 아닌가. 정부는 가뭄 대책뿐 아니라, 곧 현실이 될 가뭄 피해를 어떻게 할지 미리 생각하기 바란다.

뉴스에 늘 나오는 것 같지만, 가뭄에 대한 관심과 의제는 보편적인 것이 되기 어렵다.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면 급수 제한, 상수도 정도가 문제일까 직접 영향 받을 일이 거의 없다. 아직은 대부분 지역에서 수도가 멀쩡하니, 걱정은 간접이고 추상이다.

일부만 관심을 보이는 문제면 정부와 사회가 힘을 모아 대응하는데 동력이 달린다. 대처 방식도 몇 가지, 그것도 당장 효과가 있을 법한 기술적인 방법밖에 없다. 예를 들어 굴착과 양수기 같은 전통적 방법들이다.

일이 벌어질 때마다 '항구적' 대책을 마련한다 하나, 그때뿐이다. 그나마 수계연결이나 추가 용수원 확보, 댐 만들기 같은 (때때로 저의가 의심스러운) 토목 패러다임. 가뭄이 있을 때마다 비슷한 대책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그 일조차 지지부진인 모양이다.

오늘 우리는 가뭄으로부터 기후변화를 생각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이를 정치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피해에 대한 대응(부분)에서 '기후변화'의 정치(보편)가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뜻 별개의 문제거나 관련이 있더라도 꽤 먼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근본에서 두 문제가 (완전히) 만난다고 생각한다.

첫째, 현재를 위해 미래를 소비하는 문제. 가뭄이든 기후변화든 현재와 미래를 둘러싼 갈등과 투쟁이 되면, 둘은 정치의 장이자 대상, 그리고 세대 간 정의의 문제가 된다. 가치 있는 것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두고 투쟁하는 것은 당연하다.

미래에 생길 문제를 부인하고 피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세대간 정의 문제를 우회하는 것이 기후변화를 둘러싼 정치의 중요한 특성이다. 과학과 지식 차원에서 아예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것이 한 경향이라면, 현재 사건을 미래와 분리하는 것이 또 다른 방법이 아닌가 한다.

기후변화를 부인하기는 쉽다. 올해 가뭄이 기후변화, 지구 온난화와 직접 관련된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2015년에도 일부 지역에서 제한급수를 할 정도로 가뭄이 심했지만, 단지 몇몇 사건만으로 '경향성'을 확립할 수는 없다.

기후변화의 과학을 부인하는 정치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국 대통령까지 기후변화를 믿지 않는다고 공언할 정도면, 미래 세대를 인질로 잡고 현재에 '올인'하는 정치가 과학적 지식을 압도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과학을 부인하는 정치의 동기는 무엇인가? 나오미 클라인의 말로 답을 대신한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요구되는 행동들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탈규제 자본주의와 충돌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며, "이제 기후 행동은 우리 경제 모델의 핵심을 이루는 근원적인 명제, 즉 성장 지상주의와 싸워야 한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열린책들 펴냄).

한편,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원인, 경과, 대처는 (미래와 분리하여) 현재만 생각하는 정치가 작동하는 장이다. 주로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핑계를 대지만, 어떤 대응과 실천 행동도 유예되거나 지연된다.

실천이 개인으로 환원되는 것도 큰 몫을 차지한다. 에너지, 산업, 자동차, 농업과 식품, 모든 실천의 영역은 개인화되고 그리하여 기후변화에 미칠 효능을 의심하게 한다. 미래의 가치는 '할인'되며, 이는 다시 자본주의 또는 성장지상주의라는 지금 우리의 삶과 연관된다.

두 번째 기후변화의 정치는 문제의 '국지화' 경향이다. 물리와 자연 현상으로서 기후와 그 피해가 지리적으로 일부에 국한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가뭄만 그런 것이 아니라 태풍과 더위, 심지어는 지진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일부 지역의 주민이 아니면, 기후는 (주로 텔레비전을 통해) '허구적 공정'을 통해서만 전체에게 도달한다.

문제는 지리적 국지화가 정치적, 사회적 국지화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심각한 가뭄 피해가 대다수 도시민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한, 더구나 일회적 사건으로는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 의제가 되기 어렵다. 지리적으로 연관성이 없으면 더하다. 방글라데시, 남태평양의 섬나라, 몰디브에서 해수면이 올라간다고 해도,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사람들이 눈이라도 끔쩍할까.

국지화는 곧 불평등이다. 가뭄만 하더라도 일부 계층과 집단, 그것도 본래 불리한 쪽에 영향이 두드러진다. 한국에서 농업, 수산업, 축산업은 흔히 경제적 불리함과 무관하지 않다. 정치적, 사회적 권력에서 배제된 상태이기도 하다.

기후변화도 마찬가지다. 주로 개발도상국이 영향을 받는 것은 국제적 불평등이지만, 그 나라 안에서 피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중된다. 방글라데시에서 해수면이 상승하면 해변 저지대에 홍수가 잦아지고 자주 콜레라가 유행한다. 감염병이 번질 때마다 이 지역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관련 자료 바로 가기).

단기 조치, 그것도 기술적인 면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 기후변화의 또 다른 정치다. 한국에서 이번 가뭄 피해에 대처하는 방식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큰 가뭄을 겪은 지 2년 만에 다시 비슷한 일이 생겼지만, 경향으로서의 기후변화를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후변화에 연결할 만한 대응을 말하는 경우란, 더욱 찾기 어렵다.

보편적 위험으로서의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도 기술에 집중하기는 마찬가지다. 가장 큰 것이 대체 에너지 정도일까, 나오미 클라인이 주장하는 사회경제체제 수준에서의 탈성장 또는 자본주의 이후는 좀처럼 논의되지 못한다. 기존 사회경제체제를 유지, 온존하는 힘과 충돌하는 한, '대안'이 논의의 주류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에게 기후변화는 무엇인가? 한국만큼 이 문제에 관심이 적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특히 기후변화를 유발하는 중요 나라 중 하나로 꼽히면서도 이토록 무감각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아무 일에든 세계화를 끌어다 붙이지만, 정치, 사회 의제가 된 것으로 치면 ‘글로벌 스탠다드’에 턱없이 모자란다.

이번 심각한 가뭄 사태로부터 기후변화 논의의 동력이 되살아나기를 바란다. 코앞에 문제를 두고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바로 그런 유예와 연기가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경로이자 도구다. 모종의 권력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기후변화가 어떤 의미인지 일 년 반 전의 <서리풀 논평>을 다시 인용한다.

"영토가 물에 잠긴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후 변화의 본질적 위협은 인간 삶 전체를 뒤바꿔놓을 수도 있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가장 큰 걱정 한 가지가 건강과 질병이다. 그 가능성과 이유 그리고 영향은 세계적으로도 여러 차례 검토된 적이 있다. 폭염 피해처럼 직접 건강에 영향을 주거나 새로운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이 가장 먼저 거론된다. 공기와 물, 농산물 생산이 영향을 받아 건강과 질병의 조건을 크게 바꿀 가능성도 있다." (<서리풀 논평>, 2015년 12월 14일, ☞바로 가기).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한, 실용에만 초점을 둔 기후변화의 영향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후변화는 인류의 삶 전체, 그리고 현존하는 삶의 양식과 연관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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