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자판기에서 커피는 나오지 않는다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한국 생활보장체제 전환을 위한 3대 과제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 전개된 한국의 개발국가형 생활보장체제는 이미 해체되었지만, 이 체제가 남긴 문제들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활보장체제 자체의 전환이 필요하다. 물론 체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된다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다른 체제로의 전환은 정책의 변화나 정부의 교체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체제 자체의 변화는 사회경제 연합의 교체, 정치경제 제도의 수정과 공공정책의 변화 모두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생활보장체제의 전환을 위해서는 복지정책 수준에서의 변화와 개혁보다는 더 깊고, 넓은 차원의 개혁과제가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 생활보장체제의 전환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3가지의 과제로 정치제도의 개혁, 재정지출 구조의 개혁, 그리고 비공식 취업의 축소를 제시한다. (필자)

개발국가형 생활보장체제가 남긴 문제

인간의 생활(the livelihood of man)을 집합적으로 조직화하는 등가교환, 재분배, 그리고 호혜라는 세 가지 방식들이 일정 기간 동안 안정성을 가지고 결합되어 있는 구조를 나는 생활보장체제라고 말한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복지체제라는 말 대신 생활보장체제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복지, 특히 국가가 주도하는 다양한 사회보장 프로그램에만 주목하는 것은 실제로 사회성원들이 생활과정에서 제기되는 각종 사회위험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살펴보는데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의 2017년을 살아가는 75세 노인이 적절한 수준에서 생활을 조직화하기 위한 방편은 무엇인가? 적절한 수준의 공적연금 급여(재분배)가 우선 떠오르겠지만, 자녀로부터 제공되는 적절한 수준의 규칙적인 용돈(호혜)도 가능한 방편이며, 일자리를 통해 근로소득을 확보하는 방법(등가교환)도 고려할 수 있다.

특히 국민국가 발전과 자본주의 산업화의 긴 경로 속에서 복지국가를 만들어 낸 서구 복지국가와는 상이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복지, 혹은 복지국가 프로그램에만 주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서구 복지국가에서 복지 프로그램이 수행한 기능을 한국에선 다른 프로그램이 대신 수행하는 경우가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기능적 등가물(Functionally Equivalent Programs)로 칭해지는 이러한 프로그램의 한 축은 복지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기능적으로 복지를 대신하는 것들로 구성되는데 ①영리적 사보험이나 기업복지 등 민간복지를 촉진하는 프로그램, ②시장경쟁을 축소하거나 규제하여 일자리와 소득을 보호하는 프로그램, ③공공부문 일자리를 직접 창출하는 프로그램 등이 있다. 또 다른 축은 가계와 개인을 직접적 수혜자로 하진 않지만 기능적으로 대신하는 것들로 ①도시 생산자(중소기업과 소상공인)를 수혜자로 하는 재정지출과 조세지출 프로그램, ②농어촌 생산자(농어민)를 수혜자로 하는 재정지출과 조세지출 프로그램 등을 포함한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 전개된 한국의 생활보장체제를 나는 개발국가형 생활보장체제라고 부른다. 계약적 지대(contingent rent)―경제의 파이를 확대하는 과정에 헌신할 것을 전제로 참여자들에게 개발 국가가 제공하는 각종 산업정책과 관치금융 등의 특혜―에 기초한 개발전략의 실행과 확산이 ①국가복지제도의 탈정치화(de-politicization)와 저발전, ②고생산성 부문과 저생산성 부문에 대한 각기 다른 생활보장 프로그램의 적용이라는, 지금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국 생활보장체제의 특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생산성 부문을 중심으로 한 산업적 발전과 그에 기초한 경제성장은 닫혀있던 고용의 기회를 대폭 확대하여 빈곤과 실업이라는 사회위험을 줄였고, 가족임금과 장기고용, 기업복지 등으로 이루어진 고용보장제도가 사회보장제도를 기능적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또한 시간이 가면서 고생산성 부문의 노동시장에는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적 규제와 보호가 강화되었고, 사회보험제도를 기업별, 직역별로 점진적으로 적용하게 되었다. 반면에, 영세중소기업과 소상공인, 농어촌자영자로 구성된 저생산성 부문에는 보호와 규제의 사각지대에 방임한 비공식 취업과 복지의 기능적 등가물인 연(緣)복지, 감세 및 면세를 통한 조세지출, 생산자 보조금 등이 주어졌다.

한국의 개발국가형 생활보장체제는 적어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순조롭게 기능했다. 경제성장은 고용을 매개로 빈곤층을 축소하는 한편 분배상황의 개선을 이끌었다. 하지만 개발국가형 생활보장체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국제적인 경쟁 격화와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탈공업화와 기술혁신의 숙련편향성, 경제와 정치의 글로벌화에 따라 해체되었다. 해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과 관련된다.

우선, 저생산성 부문에서의 자원 추출은 경제의 확대 재생산에 따라 점점 그 비중이 감소했다. 확대재생산에 요구되는 자원은 이제 외부로부터 조달되어야했다. 확대재생산에서 필수적인 최종생산물 또한 수출에 의존해야했다. 결국 경제의 확대 재생산은 자원의 조달과 최종생산물의 판매 모두에서 대외 의존성을 심화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심화된 대외의존성은 경제의 글로벌화가 진전될수록 더 자주, 그리고 더 깊게 한국 경제를 위기국면에 몰아넣고, 이로 인해 사회성원들의 생활보장은 쉽게 훼손된다.

둘째, 글로벌화의 진전과 경제구조의 고도화는 정부가 제공하는 계약적 지대에 대한 고생산성 부문의 의존성도 약화시켰다. 정부 개입보다는 시장의 자율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원리의 확산과 ‘급진적 혁신’에 기반을 둔 신산업 영역의 확장은 기업복지와 장기고용으로 대표되는 ‘경직적’ 노동시장을 영미식의 유연한 노동시장구조로 대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셋째, 심화된 경제적 불안정에 따라 생활보장에 대한 사회성원들의 불안은 커진다. 하지만 연(緣)복지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과 가족 간 이전소득의 급격한 감소에서 보이듯 급격하게 쇠퇴해버렸고, 기능적 등가물들의 효과성과 효율성은 빠르게 훼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된 삶의 피폐와 고용 상황의 악화, 인구 고령화, 교육 및 주거의 심각한 문제들은 생활보장에 대한 불안과 욕구를 더 증폭시켰다.

▲ 쪽방촌 거주 노인. ⓒ프레시안(최형락)

생활보장체제의 전환이 필요하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복지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외환위기가 초래한 경제의 구조조정이 실업자와 빈곤층의 규모를 늘렸지만, 그들을 보호할 복지제도가 전혀 없다는 현실에 대한 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제도의 개혁과 새로운 제도의 도입은 한국이 시장경제의 발전, 민주주의의 확립과 함께 복지국가의 길로 나섰다는 국내외의 평가를 이끌어 낼 만큼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간 진행된 경제구조와 노동시장의 변화는 확대된 복지로도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산출해왔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사회의 변화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이 한국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대기업의 호조와 중소기업의 침체, 정규직의 소득증가와 비정규직의 소득불안정, 상층과 하층 사이의 점증하는 소득격차, 세계 최저의 출산율과 빠른 속도의 고령화는 삶의 불안정을 가속화했다. 한편에서는 복지가 확대되었지만 또 다른 편에서는 그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증가한 상황, 그것이 바로 외환위기 이후 오늘까지 전개된 상황이다. 외환위기 이후 지난 이십년은 한국에서 복지국가의 태동을 지켜볼 수 있었던 시간이지만, 그와 동시에 불평등의 증가, 고용 불안의 확대가 일상화된 시간이기도 하다.

복지의 확대, 발전에도 불구하고 왜 빈곤층의 규모가 커지고, 소득 불평등 정도가 심화되었으며, 중산층이 붕괴되었는가? 복지 발전의 불충분함이 그 원인일 수 있다. 복지가 그 동안 이 정도나마 확대, 발전하지 않았다면 빈곤층 규모의 확대나 소득불평등의 심화, 중산층의 붕괴 정도는 더욱 심각했을 것이다. 복지의 확대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새로운 프로그램의 도입과 확충, 예산투입의 확대를 통한 복지 강화가 문제 해결의 중요한 방안일 수 있다. 새 정부의 복지 관련 공약과 그것을 입안한 정책 전문가들 또한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하지만 고장나버린 커피 자판기에 아무리 많은 동전을 넣어봤자 제대로 된 커피가 나올리는 없다. 커피 자판기, 즉 한국 생활보장체제 그 자체를 고쳐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체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된다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다른 체제로의 전환은 정책의 변화나 정부의 교체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체제 자체의 변화는 사회경제 연합의 교체, 정치경제 제도의 수정과 공공정책의 변화 모두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개발국가형 생활보장체제는 이미 해체되었지만, 새로운 체제로 전환되지는 못했다. 프로그램 수준의 개혁은 있었지만, 교체 없는 사회경제 연합과 수정 없는 정치경제 제도, 그러한 제도적 구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는 정책의 변화는 없었다.

생활보장체제 전환을 위한 3대 과제

한국 생활보장체제의 전환을 위해서는 복지정책 수준에서의 변화와 개혁보다는 더 깊고, 넓은 차원의 개혁과제가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체제전환의 개혁과제로 3가지를 제시한다.

우선, 정치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소선거구제에 기초한 단순다수제, 선거에서 승리한 다수당이 단독으로 정권을 맡는 단독 정부, 절대 다수당이 출현하기 어려운 현실에서의 국회선진화 법 등은 생활보장체제의 전환을 막는 정치제도이다. 저복지-저부담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여러 과제들이 있지만, 복지 친화적인 정치제도를 마련하는 일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다수대표제는 비례대표제에 비해 보편적인 복지 프로그램보다는 기능적 등가물의 확대를 유인하는 경향이 있다. 복지를 기능적으로 대신하는 프로그램의 모습 또한 정치제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다수대표제가 중대선거구제(MMD)와 결합하면 조직화된 유권자의 동원이 중요한 만큼, 각종 직능단체와 산업협회의 구성원들에게 혜택을 주는 보조금이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처럼 다수대표제가 소선거구제(SMD)와 결합하면, 지리적 선별성이 강한 보조금이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단독정부 체제와 연립정부 체제의 차이 또한 중요하다. 특정 정책의 입안과 법제화를 주도한 정파가 누구인지를 유권자들이 인지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하는 인지성은 단독정부 하에서 크며, 연립정부 하에서는 작다. 또한 특정 정책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얼마나 용이한가를 말하는 책임성은 소선거구제 하에서 크며, 중대선거구 하에서 작다. 소선거구제와 단독정부가 결합된 정치제도는 인지성과 책임성이 크기 때문에 증세와 같은 인기 없는 정책이 추진될 가능성은 낮다. 증세 정책을 어떤 세력이 주도했는지 유권자들이 쉽게 인지할 수 있을뿐더러, 다음 선거에서 그에 대한 심판 또한 용이하기 때문이다.

의회에서의 의사결정 규칙도 중요하다. 국회 선진화법은 쟁점법안의 통과를 위해서 재적의원의 3/5, 즉 국회의원 180명의 동의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즉, 재적의원의 3/5 이상을 점유한 절대 다수당이 아닌 한 국회에서의 법안 통과는 다른 정당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대통령과 여당이 복지와 관련하여 아무리 좋은 정책대안을 준비하고 제안한다 해도 절대 다수당이 아닌 한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게 되었다. 재분배를 통해 사회성원들이 차지하는 몫을 변화시키는 복지제도의 변화는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의 지형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쟁점법안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재정지출 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 OECD에서는 국민계정 부표의 하나인 기능별 지출의 분류체계로 정부활동의 기능을 일반공공서비스, 국방 등 10개의 기능으로 분류하는 '정부기능분류'를 사용한다. 이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재정지출 구조가 가지는 특징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은 경제사업, 환경, 주택 및 지역사회개발 등 소위 ‘개발’과 관련한 부문의 비중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크지만, 사회보호로 대표되는 '복지'와 관련한 부문의 비중은 작다. 나는 한국의 재정지출 구조에서 '개발'과 관련된 부문의 재정지출 중 상당한 규모가 앞서 말한 복지의 기능적 등가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경제사업 부문에 속하는 농업직불제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2016년 기준으로 약 2조8000억 원에 달하는 직접지불금들은 경제사업 부문의 지출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복지제도의 기능을 수행한다. 가령, 쌀소득보전직불제는 쌀 가격 하락 시 목표가격과 시장가격과의 차이를 고정 및 변동직불금 명목으로 지급하여 소득안정을 도모하는 제도이며, 농어민건강보험료지원이나 농업재해보험, 농업인안전재해보험은 사실상 사회보험의 기능을 수행하는 제도이다. 정책금융지원을 위주로 수행하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에 대한 재정지출 또한 기업과 생산자를 직접적 수혜자로 하지만, 이 또한 해당 산업에 종사하는 가계와 개인의 소득을 보전하고 지출을 감소하는데 기여한다. 결국, 경제사업 부문의 재정지출로 분류하고 다뤄지는 농어가와 중소기업, 자영업에 대한 지원제도들은 한국에서 복지를 기능적으로 대체해 온 기능적 등가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들이 적절하게 기능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효과성과 효율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도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필요하면 개혁하는 작업, 즉 재정지출 구조를 개혁하는 일은 한국 생활보장체제의 개혁을 위해 우선적으로 추진해야할 과제이다.

세 번째는 비공식 취업의 축소와 관련한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한다. 근로자의 비공식 고용에 초점을 두어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 2011년 8월 기준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약 40.2%가 최저임금이나 근로기준, 혹은 사회보험의 보호로부터 배제된 비공식 근로자이다. 또한 5인 미만 사업장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78.5%는 비공식 고용의 성격을 가지며, 전체 비공식 근로자의 37.4%가 5인 미만 사업장에 종사하고 있다. 비공식 고용의 발생 원인은 법적인 적용대상에서 제외되어 있기 때문이거나 법적인 적용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는데, 법의 미비로 인한 비공식 고용이 20%이며, 나머지 80%는 법규를 준수하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공식 취업은 경제성장과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해소될 후진국의 과도기적 현상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공식 취업은 한국 생활보장체제를 구성하는 핵심적 고리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비공식 취업자들은 복지국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 사회보험제도의 규제와 보호에서 제외되거나, 규제와 보호의 대상임에도 실제로는 준수되지 않는 방식으로 국가가 자신들을 무시한 데 대한 되갚음이다. 이들에게 국가는 회피와 무시의 대상이지, 인정하거나 신뢰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전체 임금근로자의 40% 정도를 차지하는 비공식근로자, 여기에 정확한 실태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영세자영자를 더하면 비공식 취업자는 근로 시민의 절반을 훨씬 넘는다. 이들로 하여금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 사회보험제도의 규제와 보호를 경험하도록 해야만 국가는 이들로부터 복지국가의 역할을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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