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이 시댁 식구들과 저녁을 먹고 쌓인 정을 나누는 동안 저는 혼자 있습니다. 혼자 있는 저를 위해 가족들은 시댁에서 자지는 않습니다. 첫해에는 가족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혼자 일산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가족들을 기다렸고, 두 번째 해에는 아이들이 늦은 시간에 다시 강화 집까지 가는 걸 너무 피곤해해서 비어 있는 엄마 집에서 몰래 잤습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엄마 집에 들어서자마자 실내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둬야 합니다. 도둑잠을 자고 다음 날 엄마 집을 떠나기 전, 이불장에 이불이 들어 있던 순서, 침대에 놓여 있던 사물들의 위치 등을 전날 사진을 보며 함께 복원하며 아이들은 마치 첩보원이라도 된 듯 즐거워합니다. 가족만의 비밀은 갖는다는 것은 일체감과 죄의식을 함께 줍니다. 하지만 평생 아버지 대신이었던 오빠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당연히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저는 친정에도 못 가게 되니 이 비밀은 계속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B급 며느리>의 주인공 진영도 시댁에 가지 않는 며느리입니다. 며느리라면 집안 대소사를 챙겨야 한다고 믿는 시어머니와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생활을 중시하는 진영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습니다. 고부간 갈등은 갈수록 깊어지고 이들의 아들이자 남편인 선호빈 감독은 카메라로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들여다봅니다. 영화 안에서 선호빈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독립영화판 <사랑과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통째로 갈아 넣는 듯이 고통스러웠다며 '에밀레 다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B급 며느리>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관객 반응은 '폭발적'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습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영화를 보고 난 후 관객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고려대학교와 출교생들 간의 갈등을 담은 <레즈>(2011)로 데뷔한 선호빈 감독에게는 이러한 관객 반응이 새로웠을 것입니다.
"엉성한 구석이 많은 영화인데 관객들이 이야기의 빈자리를 스스로의 기억으로 메워 가며 감상해 주었다."
SNS에 올린 감독의 이 말에는 '사적 다큐멘터리'의 효용과 가치가 압축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다수가 선택한 결혼이라는 삶 안에서 우리들 모두는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이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저 같은 사람에게 결혼 생활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떨어진 이상한 무대였습니다. 그 무대에서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힘껏 노력했고, 지금도 여전히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쉬쉬해 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상한 여자와 결혼했다"라는 선호빈 감독의 내레이션 첫 문장이 통쾌합니다. 주인공 진영은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상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참으로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결혼하자마자, 첫 명절을 맞았고 시댁에 다녀온 후 저는 급체로 앓아누웠습니다. 안타까워하는 엄마 옆에서 남편은 억울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려 깊은 시댁 식구들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온 뒤였거든요. 환대받는 사위의 입장에서는 시댁에서 제가 느끼는 심리적 부담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화제 상영 후 객석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진영 씨가 B급 며느리면, 감독 자신은 몇 급 사위라고 생각하나요?"
사회자는 관객들에게 박수로 등급을 매겨 보자는 재치 있는 제안을 했고 결과는 'F급'이었습니다. 선호빈 감독은 그 결과를 순순히 인정하더군요. 영화를 만들면서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맺는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감독의 고백은 그래서 참 반가웠습니다.
저도 이 영화가 참 반갑습니다. 12년간의 육아일기인 제 영화 <아이들> 상영회에서 관객들은 왜 친정 식구들만 나오냐는 질문을 합니다. 시댁에서 며느리는 그저 전 부치고 밥 차리고 설거지하는 사람인데 그런 일 안 하고 카메라 들고 있으면 큰일 나죠. 이게 한국 사회에서 며느리라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위치이기 때문에 시댁 얘기는 단 한 장면도 등장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B급 며느리> 덕분에 관객들은 결혼생활로 확장된 가족관계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들>(2010)을 보고 난 후 육아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던 것처럼요.
제가 참여하지 않았던 바로 전날 상영회에서는 한 남성이 사위로서의 고민을 펼쳐놓았고 관객들이 함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고 합니다. 내내 명랑하던 진영이 영화 막바지에 눈물을 쏟으며 말합니다.
"이 결혼 생활에 뛰어들기 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건강했던 사람이었는지 그냥…. 오빠가 영화랍시고 이거 찍는 동안 나는 이 집에서 병들고 늙어 가고 있다고."
고부간 갈등이 미스터리인 이유는 갈등의 당사자 모두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한다면, 갈등의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으면 안 되겠죠. 하지만 우리들 모두는 각자 고군분투합니다. 더 힘든 상황을 견뎌 낸 앞 세대 사람들에게는 말도 꺼내지 못합니다. 아직 이 상황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왜 이혼하지 않지?' 의아해합니다. 결국 혼자서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영처럼 용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저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협상하고 때로는 거짓말하면서 최선을 다해 이 결혼 생활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B급 며느리>의 진영을 만났고, 그래서 이렇게 저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이것이 사적 다큐멘터리의 힘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문의 : 박진석 PD 010-2532-2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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