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의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 최소한의 기본조건

[김성훈 칼럼] "이제 농업문제는 90%가 정치, 10%가 현실 응용문제"

지난 겨우내 그리고 올봄까지 수천만의 촛불이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며 행진한 끝에, 마침내 '문재인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어쩌나. 그전과 똑같은 정경유착에 찌든 정치인, 관료, 학자, 교수와 기레기들이 아직 세상을 뒤덮고 있고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실권을 장악하려 든다면? 나라와 겨레 형성의 최소한의 기본조건(National Minimum Requirement)인 안전한 먹거리(식량과 식품)의 안정적인 공급을 담보하는 농업과 농촌, 농민 등 3농의 존재 가치가 우리 사회에 부정되거나 부(不)존재한다면?

오늘날 식량농업을 단순히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적 상인 정신으로만 접근하는 신자유주의적 천민자본주의로 우리나라 정치·사회·학계·언론계가 시나브로 이명박-박근혜 정권 이후 한없이 가볍고 천박한 비즈니스적 농업 관을 마치 상식인 양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경쟁력이 낮은 산업은 도태되어야 하고 생산성이 낮은 업종은 퇴출당하는 풍조가 국가와 국민의 기초산업인 식량 및 농업 부문에 무차별하게 적용된 뒤, 농정의 주체인 농민 생산자의 존재 가치가 정치 사회 지도자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윤 개념과 생산성 경쟁력 효율성만이 판을 치고 있다. 지극히 얄팍한 '영혼이 없는 상인 정신'과 허울뿐인 이윤이란 잣대가 우리나라 농업·농촌·농민 부문에 몰아쳐 바야흐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최하위권인, 식량자급률 23.3%라는 퇴출 대상 산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는 과연 온당한 국정 운영의 결과이며 현재와 미래에 용인될 국가 지표인가? 도대체 이게 나라 꼴이어야 하는가.

국가와 민족형성의 최소한의 기본조건

우리 사회가 산업화·정보화·세계화의 길에 빨리 진입했다지만, '농업의 기본 가치'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 중요성이 더 커지고 단단해져야 한다. 우리나라 백성들의 생명을 지탱해 주는 먹거리와 환경생태계의 소중함은 시공을 초월하여 변함이 없다. 비교역적인 고려사항(Non-Trade Concerns)으로서 '농업의 다원적인 공익 기능'은 일찍부터 서구 유럽 사회에서는 사회적 기간산업(Social Infrastructure)으로 떠받들어 왔다. 또한 친환경적인 지속가능 농법과 공동체 상생 원칙은 농촌 농민은 물론 도시소비자 국민들에게 변함이 없이 소중하고 중요하다.

친환경 생명산업으로서 농업은 ① 종(種)의 다양성을 보존하고 생태환경을 보전하는 효과와 ② 경관을 아름답게 살리는 효과, ③ 홍수 재앙을 막고 지하수와 맑은 공기를 생성하는 효능, ④ 공동체 문화와 전통 및 지역사회를 보전하는 사회 문화적 기능, ⑤ 식량안보와 식품의 안전성에 대한 고려, ⑥ 국토의 균형발전과 지역공동체의 활성화를 보장해 주는 기능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공익적 기능(multifunctionality)을 수행하고 있어 아무리 저평가하려고 해도 더욱 두드러질 뿐이다.

세계적으로 현대 유기농법을 실천을 통해 학문적으로 이론을 정립한 영국의 알버트 하워드 경(Sir Arbert Howard)은 그가 1940년에 저술한 <농업성전(An Agricultural Testament)>(최병칠 옮김, 한국유기농보급회 펴냄)에서 고대 거대했던 로마제국의 멸망이 요즘 말로 화학농법과 거대기업자본 농업의 실패에서 기인했음을 밝히고 있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농업·농촌·농민, 3농 부문이 쇠퇴하면 나라를 제대로 유지하고 국민을 제대로 살게 한 나라가 어디 단 한 곳이라도 영구적인 곳이 있던가.

해가 지지 않는 로마제국과 영국농업의 멸망 : 로마클럽의 경고

하워드 경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농민 생산자이고 흙(땅과 대지)이라고 말한다. 농업과 농민의 건전성과 사기가 쇠퇴하도록 방치한다면, 일시적으로 다른 산업 부문에 의해 나라의 경제가 부유할 수 있다 해도 필연적으로 파멸로부터 나라를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이 로마제국의 농업멸망사다. 대(大)토지 자본가 조직과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농지 제도의 사유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토지 이용과 지력의 유지가 자본가들의 이윤과 생산성 위주로 행해짐에 따라 로마제국을 필연적인 파멸로부터 구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족농(Family Farming) 중심의 소규모 친환경 유기농법이 대기업농(Corporate Farms) 중심의 농약 및 비료 등 화학농법의 강행으로 농업과 자연과의 균형이 파괴되고 토양이 오염돼 죽어 버리게 됨으로써 화학성분에 찌든 농작물과 그 섭취로 인해 병들어 가는 로마 사회의 종말을 초래한 것이다. 그것이 1972년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 선언문에 경고로 등장하였다. 세계 인류는 100년 이내에 안전한 식량부족, 생태환경 파괴로 지구상에서 성장의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경고다.

다른 한편, 2차 세계대전 후 한때 전승국 영국은 식량자급 달성이라는 외형적 기적을 이룩한 듯 그 성공을 자랑하던 공장식 산업농업이 1990년대까지는 생산성과 품질면에서 세계 여느 지역 못지않게 효율성과 경쟁력이 높아 유럽농업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후 지금 공장식 영국 농업은 정부 농정시스템의 탈선과 잇따른 농축산업 대재앙으로부터 지구상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현실적 비참한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1996~2001년 사이 세계 최초로 잇단 구제역과 광우병, 달걀 속 살모넬라 발생 그리고 GMO(유전자조작 식품)의 범람 등 영국 전역에서 일어난 산업적 농업의 대재앙과 국민들의 안전성 히스테리 증상, 식품 공포 등이 만연해 2000년 한 해만 해도 일거에 2만2000여 명의 농부가 이농하고 77명의 농부가 자살한 것을 신호로 농산물 가격이 40%나 폭락해 영국 농업부가 가치는 5년 전에 비하여 3분의 1 이하로 급감하였다. 농업의 GDP 비중은 0.6%로 농산물 무역수지적자는 연 300억 달러, 식량자급률은 50%대로 현저히 추락하였다.

<영국 농업의 붕괴, 한 기간산업의 비극적 몰락>(리처드 노스 지음, 김영욱 옮김, 교우사 펴냄)은 이 같은 영국 농업 몰락의 원인으로 영국 정부, 구체적으로 농정 당국의 이상한 대응 방식과 농업행정 관료들의 경직된 태도, 무위무능을 꼽았다. 대한민국 정부의 차관급 농촌진흥청장직을 역임한 김영욱 박사는 그의 고뇌 섞인 분석 결과를 피를 토하듯 말한다. "한국 농업도 몰락한다면 그 주범은 다름 아닌 농림수산식품부 소속 공직자들"이라고.그는 후배들에게 한국 농업을 파괴한 주역으로 지탄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기가 번역한 이 책을 읽고 반성과 변신의 기회로 삼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원저자 리처드 노스는 "이제 농업문제는 90%가 정치이고, 10%가 현실 응용문제"라고 단언한다. 저자와 역자의 고충이 묻어나는 충고를 갓 출범한 문재인 대통령과 그 정부가 경청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농업도 몰락의 길을 걷는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해를 걸러 발생하고 있는 구제역 사태, AI 조류독감 피해 발생 등 잇단 위해(危害) 사태를 목격할 때마다 뜻있는 국민 중에 왜 농림축산식품부가 존재하는가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 아무리 대통령과 농정 당국이 농업을 창조산업이니, 6차산업이니, 미래성장산업이라고 나팔을 불어대도 생산력 주체인 농민들의 가슴에는 와 닿지 않는다. 정부 당국의 농정성과 셀프 선전, 자화자찬도 농민들에게 거꾸로 들릴 뿐이다.

수출 농업이 몇십억 달러를 넘었다는데, 오히려 신선농산물의 수출은 더 줄어들었고 수입산 원료에 기반을 둔 커피·라면·초코파이·음료 등이 수출의 대부분이다. 지난 10년 사이에 50여 개 국가와 무역자유화 FTA 협상을 체결했고, 쌀마저 완전히 개방했다.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 중에서 가장 짧은 기간 안에 가장 많은 국가와 FTA를 타결한 기록을 세웠는데도 당해보기 전까지는 그 협상 내용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정작 농민 당사자들은 확인할 길도 없다.

해마다 신년 농림축산식품부 업무 보고는 문자 그대로, 윗사람만 기쁘게 하려는 현란한 신조어투성이고 농민·소비자들을 위한 현장 농정과 민생 농정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도나 시군 단위 신년 농정계획이 오히려 농민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농정의 기본 중의 기본인 농지 소유실태는 문란할 대로 문란해져 헌법이 금하는 소작 행태, 임차농 실태 등의 통계가 정부의 농업 통계 발표에서 언제부터인지 슬그머니 빠졌다. 농지의 투기적 소유 상황을 알 길이 없다. 그동안 우리 고유의 왜성사과나무, 배나무 등 과수 묘목과 인삼 종자가 얼마나 중국에 수출되어 그 과실이 부메랑처럼 우리나라에 되돌아오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왜 해마다 중국 김치는 대한민국 식당과 식탁을 휩쓰는데, 지난 정권 우리나라 국산 김치는 한 포기도 수출을 못 하고 있는 건지 몇 년째 묵묵부답이다. 100% 외국산 수입 곡물로 사양한 축산은 대기업농만 포만케 하는 반면, 환경생태계와 영세농민은 피폐 일로이다.

식용 유전자조작 농산물(콩, 옥수수, 유채 카놀라, 면실, 사과, 알팔파, 연어 등)을 수입하면서 우리나라가 세계 1등 소비국가(1인당 65㎏ 이상)이며 1등 수입국가(연간 210여 만 톤의 식용 GMO 농산물과 120만 톤의 가공 완제 식품)인데도 우리 시장 상점에서 서민 백성들이 사 먹는 일상적인 식품 중에는 어느 한 품목도 GMO 함유 표시가 없다. 이제는 어느 부서, 어느 관료가 은밀히 수입을 허용한 것인가. 태백산 유채꽃 축제에서도 홍성 유채꽃밭에서도 GMO 유채(카놀라)꽃이 발견되어 소동이 일어나고, 전국 16곳에서는 농촌진흥청이 은밀히 GMO 벼를 시험 재배하고 있다. 주식을 GMO로 재배하는 지구상 첫 번째 국가를 만들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위해(危害) 농약 중에 최독성 유해 농약인 발암성 제초제(주요 성분 글리포세이트)와 각종 농약을 공개적으로 안전하다고 세계보건기구(WHO)의 발암성 경고에 대놓고 덤벼드는 기관이 다름 아닌 농촌진흥청인가 하면, 심지어 GMO로 찌든 농산물도 잘 세척만 하고 기록만 잘하면 우수 안전농산물이라고, 이름도 취지와는 걸맞지 않은 'GAP(Good Agricultural Product)' 농산물로 농림축산식품부 당국이 공식 인정해 전체 농산물의 50%까지 확대 추진하고 있다. 대체 누구를 위한 대한민국 농업 식품 정책인가. GMO와 제초제 세계 최대기업인 몬산토사와 GMO 가공식품 대기업들, 그리고 농약협회 등과 그 장학생들만 좋아한다.

한 마디로 농림축산'수입부', '농약 및 화학농업 진흥부', '대기업 농약 비료 기계 산업부' 등으로 뒤늦게나마 부처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영국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잇단 대재앙으로 농축산업이 병들어 나라가 기울어지니, 공식명칭을 '환경·식품·농촌부'로 고쳐 각오를 새롭게 했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농업·농촌·농민이 걷잡을 수 없이 연쇄 몰락하고 있는데 새삼 이름표라도 고쳐 달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새로 출범하는 문재인 정부의 시급한 농정 과제 다섯 가지

하나, 농정수반은 농업의 기본가치를 존중하고 사람(농민) 중심의 농정을 펼 수 있는 실천적인 전문가를 영입

둘, 대선 공약대로 학교 및 공공급식에서 GMO 식품퇴치와 GMO 식품의 원료기반 완전의무표시제 실시

셋, 농촌진흥청 GMO 개발사업부를 즉각 폐지하고 농촌진흥청의 기구 및 예산을 대폭 재조정

넷, 농정의 획기적인 지방분권화 실시: 농림축산식품부와 그 산하기관들의 기능과 조직을 축소 재정비하고 그 권한과 예산을 지방자치 정부로 대폭 이양하여 현장 농정, 지방 농정 체제를 강화

다섯, 농업기본소득제도 실시와 여성 농업인과 농촌 청년 그리고 귀농 귀촌인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그리하여 국가의 기본, 기간산업에 종사하는 농업인이 그들이 기여하고 있는 다양한 다원적인 공익 기능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현재 선진제국이 취하고 있는 '농자천하지대본'의 국가와 민족 경영의 백년대계이다.

(이 글은 전국농민회가 발행하는 <한국농정신문> 6월 5일 자 '농사직썰'란에 게제될 예정입니다.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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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농업 및 환경문제 전문가로 김대중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프레시안> 고문을 맡고 있다. 대학과 시민단체, 관직을 두루 거치며 농업과 농촌 살리기에 앞장 서 온 원로 지식인이다. 프레시안에서 <김성훈 칼럼>을 통해 환경과 농업, 협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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