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국회개혁이라는 문제의 논의를 위해 이 시리즈는 몇 차례에 걸쳐 시론적 제안을 싣고자 한다.
과연 국회는 누구를 대의하고 있는가?
흔히 현대 사회에서 직접민주주의는 실현 불가능하므로 대의제도로 대체됐다고 설명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국회는 지금 국민의 의사를 올바르게 대의(代議)하고 있을까?
18세 연령 선거권 문제도 실현되는 듯 보였으나, 결국 일부 정당의 당리당략 때문에 거부했다. 이것이 국민 의사의 대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국회로서 할 일은 아니다. 특검 연장을 비롯해 국민적 열망이 담긴 개혁 요구도 국회 앞에서 속절없이 좌절되고 말았다. 강력한 권력기관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최소한의 견제장치가 될 수 있는 국민소환제나 시민의회는 아예 국회 문턱에도 가지 못한다. 도리어 국회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명분으로 해 이제 자신의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고자 한다. 개헌 문제도 국회는 분권형 개헌을 추진하면서 정부도 이에 따르라고 권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국회로 넘겨받아 그 막강한 권력을 각 정파가 나누겠다는 발상이다.
이렇게 국회는 '국민 주권'을 부정하고 오로지 '국회 주권'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 그간 우리 정치사에 숱하게 출현했던 정당들은 하릴없이 명멸(明滅)해갔고, 명칭만 거창했던 각 정당 정책연구소는 그 이름도, 그 어떤 아웃풋(output)도 없이 사라져갔다. 그러면서도 국민의 혈세로 엄청난 규모의 국고보조금이 정당들에게 지급되고 있다. 2015년 각 정당과 정당연구소에 지급된 국고보조금은 총 394억 여 원이다. 정당의 분당 사태 때도 이 국고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 때문에 분당을 망설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지금껏 공개를 한사코 거부하는 국회의 특수활동비와 업무추진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독일 의원들의 이야기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들에게 의원으로서 무슨 특권을 가지고 있느냐 물으면, 그들은 의원이 돼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고 입법과 정책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지 무슨 다른 특권이 필요 있느냐 반문한다. 미국 의원들 중에도 손수 운전을 하는 의원들이 많다. 이에 비해, 운전기사까지 친절하게 제공하는 우리 의원들의 경우에는 제도적으로 심리적으로 "상류층으로의 편입"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이러한 "상류층으로의 편입"은 국민들과의 거리를 그 만큼 멀게 만들고 대의 역시 더욱 불가능해진다.
대의(代議)하지 않는 대의기관, 왜곡된 국회 구성
본래 영국에서 '군주 주권'에 저항하고 귀족들에 의한 통치를 도모하기 위해 발생했던 대의제도는 '군주 주권'만이 아니라 국민이 주권을 갖는 '국민 주권론'도 부정하면서 결국 '의회 주권론'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렇게 해 국가의 진정한 주권자인 국민은 대표자의 선출에 있어서만 주권자일 뿐, 정작 구체적인 국가 의사의 결정과정에서는 소외되는 극단적인 대의 제도가 확립됐던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대의제도는 발생 초기의 이러한 대의제도의 한계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한계를 심화시키고 있다. 특히 현재의 선거구제는 국민들의 민의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민의를 왜곡하고 정당의 독과점을 심화시키는 주범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 표라도 더 얻은 후보가 당선되는 현 선거제도에서 선출된 후보에게 던지지 않은 50% 혹은 때로는 60%도 넘는 사표(死票)를 제도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보완책이 전혀 없다. 나아가 선출된 의원수에 비례해 비례대표 의원을 뽑음으로써 민의의 왜곡은 더욱 심화되고 정당의 독과점은 확대된다.
즉, 현재의 선거제는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민의를 왜곡시키며 동시에 정당의 독과점을 심화시킴으로써 국회 구성 자체의 심각한 왜곡을 초래한다. 결국 민의에 배치되고, 그리해 '원천적으로' 대의할 수 없는 국회가 구성된다. 더구나 국회의원 선거가 결국 이러한 독점적 정당이 공천하는 후보끼리의 '독점적' 선거로 진행되므로 국민의 선택권은 그 만큼 제한되고 대의(代議)는 그 만큼 취약해지며, 그 결과 정당의 독과점은 더욱 확대 재생산된다.
선거제 개혁, 국민주권주의와 민주주의 실천의 선결과제
사실 정당(政黨)이라는 한자의 '당(黨)'이라는 글자는 과거 동양에서는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돼 왔다. <논어>에는 "군자, 군이불당(君子, 群而不黨)"이라 했다. "군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무리를 이뤄 사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설문(說文)>에는 "당, 불선야(黨不鮮也)"라고 풀이돼 있다. '당(黨)'이란 '흐릿해 선명하지 못하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듯 '당(黨)'이라는 글자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함께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해 우리의 '정당'들은 결국 '당(黨)'의 동양 고전적 의미를 너무도 충실하게 '실천'하기 위해 '모두 모여서 잘못을 감추고',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고', '싸우고' 있는 셈이다.
만약 선거제도가 독일식 정당명부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뀐다면, 정당투표에 의해 먼저 소속 정당의 전체 의원수가 결정되고 그 수에서 선출된 지역구 의원수를 오히려 빼게 되므로 사표가 방지되고 전체적으로 정당이 균형 있게 표를 얻을 수 있게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진다. 또한 소수 정당의 진입도 용이해져 현대 사회의 다양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다. 이렇게 해 국민의 정치적 의사가 가장 정확하게 반영될 수 있고, 의회도 그 민의에 기초해 구성될 수 있게 된다.
현재의 선거제가 존속하는 한, 국회 구성은 왜곡되고 독과점적 정당 구조는 영속될 수밖에 없다. 대의하지 않는 대의기관으로서의 국회는 국민 주권을 부정하고 오직 국회 주권의 길로 치닫게 된다. 오늘 참된 국민주권주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그리해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선거제 개혁은 그 선결적 과제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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