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여혐'에 맞서자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 추모글] "여혐에 맞서 계속 시끄럽게 소리낼 것이다"

#거부할 수 없게 된 나의 운명, 페미니즘을 만나다

2016년 2월. 설레는 대학 새내기의 삶이 한 달 남은 어느 날이었다.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훑는 심드렁한 엄지손가락이 한 문장의 글에 멈칫 했다.

"전 혐오와 차별에 아주 민감한 현재 해외 거주 중인 이십대 여자입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말만 기계적으로 반복해오던 나에게 '혐오'와 '차별'이라는 두 단어는 익숙한 듯 낯설게 느껴졌다. 호기심이 일었고 꽤나 길었던 글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글의 주제는 총 네 가지였다.


1. 차별이 만연한 곳일수록 차별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2. 차별이 만연한 곳일수록 강자에 대한 약자의 폭력에 더욱 예민하다.
3. 언어는 차별을 상징하는 가장 뚜렷한 지표이다.
4. 대부분의 '역차별'은 '차별'에서 비롯된 현상일 뿐이다.

글을 읽는 내내 기존에 알아오던 모든 것들이 한데 뒤섞여 그 어떤 사고도 할 수 없었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굉장한 충격이었다. 나와 페미니즘의 만남이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페미니즘의 기폭제가 되다

얼마 지나지 않은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사건이 터졌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의 한 화장실 내부에서 23살의 여성이 살해당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거리를 비추는, 범죄의 위험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된 번화가에서 말이다.

"여성에게 자꾸 무시를 당해 범행을 저질렀다."

가해자는 심문에서 이렇게 답했다. '여성에게' 무시를 당한 것이 기분 나빠 벌인 살인이었다. 명백한 여성혐오로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언론 '묻지마 살인'으로 사건을 일축했다. 나아가 '조현병'이라는 병명을 들먹이며 진실을 왜곡하고 조현병에 대한 새로운 혐오를 생성하기에 이르렀다.

사건 이후 많은 여성들은 '여성이기에' 겪게 되는 범죄를 인식했고, 두려워했고, 민감해졌다. 사건은 대한민국 페미니즘 열풍의 기폭제가 되었다. 각종 서점과 도서관에서 페미니즘 도서가 수요 1, 2위를 다퉜고, 대학가와 지역을 비롯해 페미니즘 모임이 성행했고, 차츰 여성이 겪는 차별에 대해 누구나 목소리를 내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비단 사회 뿐 아니라 나의 개인적인 페미니즘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페미니즘과의 첫 만남에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다른 걸 떠나서 "이건 내 삶과 직결된 문제이다"라는 것이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은 그 생각을 더욱 뼈저리게 실감케 했다.

#여혐범죄, 여혐언론, 여혐사회, 여혐민국

강남역 사건은 여성혐오적 단어로 언론에 보도되었고, 여성혐오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혐오로 범벅된 대한민국을 처절하게 비춰줬다.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자마자 등장한 단어는 '강남역 노래방 살인녀'였다. 여성혐오 범죄라는 진실을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여성혐오적 비난이 난무했다. 추모를 위한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핑크 코끼리 탈을 쓴 사람이 등장해 '남자 여자 사이좋게 지내요'라는 피켓을 들었다. 수많은 추모 포스트잇 사이사이에선 조롱의 글들이 보였다. 사건으로 인해 두렵다는 여성들의 댓글에는 '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라는 대댓글이 달렸다.

대한민국의 현주소였다.

#강남역 사건, 그 이후의 페미니즘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전, 후 할 것 없이 여성혐오 범죄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여성혐오는 여성혐오의 기재로 지워지고 잊혀왔다. 사건 이후 일 년 동안, 여성들을 주축으로 한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은 여성혐오가 존재함을 누구보다 크게 소리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혐오 사회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속에서 나는, 나와 당신과 우리의 삶이 직결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앞으로도 계속 쿵쾅쿵쾅 시끄럽게 소리칠 예정이다. 또 다른 강남역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을 대한민국을 위해.

마지막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피해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주기 추모 행사가 5월 17일(수) 저녁 7시 신논현역 6번 출구 앞(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열립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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