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에너지 정책, 노무현 시대보다 한발 나아가려면…

[차기 정부 에너지·기후 정책 제언] 전문가 및 활동가 간담회

새로운 정부가 곧 출범한다. 이번 대선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갑작스레 치러졌다는 점 외에도 다양한 특징이 있다. 생태 환경 측면에서도 그렇다. 대규모 토건 공약이 등장하지 않았다. 또 미세먼지 등 공기 질 문제가 부각됐다. 후보 간 텔레비전 토론에선 4대강 수질 문제가 다뤄졌다. 핵발전소(원자력발전소) 안전 문제에 대해서도 종전보다 한걸음 나아갔다. 무분별한 핵발전소 증설은 안 된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여전히 답답한 대목도 있다. 176개국이 서명한 파리협정이 지난해 11월 공식 발효됐다. 한국도 적용된다. 오는 2030년까지 배출전망치 대비 온실가스 배출을 37% 감축한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아울러 온도 상승 폭을 섭씨 1.5도로 제한하기 위해 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설정하고 2020년까지 장기 저탄소 개발 전략을 수립하여 제출해야 한다. 이른바 신기후 체제다. 이에 대해선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탄소 배출 감축과 화력 발전소 증설이라는, 상충하는 목표가 양립한다. 화력 발전소는 미세먼지 발생 주범이기도 하다. 에너지 정책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 없이는 풀 수 없는 문제다.

<프레시안>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새로운 정부의 에너지·기후 정책 방향에 대한 기획을 진행했다. 앞서 5차례에 걸쳐 쟁점을 짚은 데 이어 관련 전문가 및 활동가가 자유롭게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난달 28일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회의실에서 오간 대화를 요약, 정리했다.


박진희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대화에는, 신근정 녹색연합 에너지기후팀장,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유정민 서울에너지공사 에너지연구소 수석연구원, 권승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등이 참가했다.

홍준표조차 '신규 핵발전소 건설 지양하겠다'


박진희 : 주요 후보들의 공약만 놓고 보면, 차기 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종전보다 한발 나아갈 듯하다. 기후 변화 대응, 탈핵, 에너지 분권화 등의 방향 전환도 어쩌면 기대할 수 있겠다.

유정민 : 탄소 연료에서 벗어나는 탈석탄, 핵에너지에서 벗어나는 탈핵 등에 대해 주요 후보들이 이야기했다. 중요한 건, 공약을 실행할 수 있는 정치력과 의지라고 본다. 서울시의 경우, 오세훈 전 시장이 '2030 마스터 플랜'을 발표했었다. 오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40% 감축하고, 재생에너지 보급을 늘리는 등의 내용이다. 하지만 사실상 '캐비닛 리포트'에 머물렀다. 반면, 박원순 서울시장은 취임 이후 '원전 하나 줄이기' 운동을 진행했다. 그런데 실제 내용을 보면, 오세훈 전 시장의 계획과 거의 같다. 요컨대 문제는 실행의지와 정치력이다.

대선 이후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탈핵, 탈석탄 관련 이슈가 종전보다 공론화된 건 맞다. 그러나 공약을 실행하는 건 다른 문제다. 차기 정부의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하다.

이헌석 : 탈핵 로드맵과 관련해서도 종전보다는 나아졌다. 예컨대 보수적인 홍준표 후보조차 핵발전소 건설을 지양한다고 한다. 다른 후보들은 공사가 상당히 진행된 신고리 원전 4호기에 대해서도 중단한다고 한다.

과거 정치권에선 핵발전소 문제에 대해 두루뭉술한 표현을 쓰곤 했다. 이젠 달라졌다. 핵발전소 중단과 백지화를 구별한다. 중단이라고 하면, '일시적 중단'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백지화'는 그보다 강한 개념이다. 재검토, 중단, 백지화 등 다양하게 개념이 세분화됐다. 시민사회의 요구 역시 보다 구체화돼야 한다.

독일과 대만, 탈핵 선언 이후 왜 달라졌나

박진희 : 녹색 일자리 문제도 충분한 공론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신근정 : 탈핵, 탈석탄 이후에 대한 고민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 이후 전망에 대한 밑그림이 있어야, 탈핵, 탈석탄도 제대로 진행될 수 있다. 이는 결국 일자리 문제다. 에너지 전환 시대에 맞는 일자리가 생겨나야 한다. 특히 에너지 분권화에 맞춰 마을 단위로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재생 에너지 그 자체로는 이런 일자리가 잘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복지, 건축 등과 결합해야 한다. 그러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예컨대 서울시에서 도시재생 사업을 한다. 도시재생이 재생 에너지와 맞물릴 수 있다. 태양광 건축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모델을 차기 정부가 수용해야 한다.

대만과 독일을 비교해보자. 둘 다 탈핵을 선언했다. 그런데 독일은 계속 탈핵 흐름을 이어간다. 하지만 대만은 정권 교체 이후 다시 핵발전으로 돌아섰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일자리 문제라고 본다. 독일은 재생 에너지 관련 일자리를 많이 만들었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흐름에 맞춰 사람을 배치했다. 반면 대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저 정치적 구호에만 그쳤다. 녹색 일자리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우리도 대만처럼 될 수 있다.

시민사회 논의 수준만큼 공약에 반영됐다

박진희 : 신기후 체제가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선 제대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헌석 : 대선 공약을 보면, 딱 시민사회에서 이야기된 만큼 반영된다는 생각이 든다. 온실가스 감축 등 기후 관련 문제가 왜 대선 공약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나. 시민사회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37% 감축한다는 파리협정에 대한 시민사회의 입장은 뭔가. 온실가스 배출을 몇 퍼센트 줄이는 게 목표인가. 이런 논의가 이뤄졌어야 했다.

그나마 당진시장의 광화문 단식 농성 등 지역에서의 움직임이 있었기에 이만큼이라도 반영이 됐다. 당시 농성은 당진에서 가동 중이거나 완공을 앞두고 있는 석탄발전소 10기에 더해서 새로 2기를 건설하는 시도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진은 이미 세계 1위의 석탄발전 밀집 지역이다. 미세먼지를 비롯한 대기 오염이 심각하다.

시민사회에서 논의된 만큼 대선 공약에 반영된다는 건, 정치권이 새로 공약을 개발하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신근정 : 에너지 문제를 자기 삶의 문제, 자기 동네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늘어야 한다. 그래야 정책 공약에도 반영된다. 서울시의 원전 하나 줄이기 정책은 이런 면에서 평가할 만하다. 에너지 문제를 동네로 끌어들였다. 다만 한국은 공적 자금이 들어가야만 에너지 문제가 이야기되는 한계가 있다. 이런 구조에선 공적 자금이 빠지면, 순식간에 에너지 문제에 대한 관심이 식는다.

"1970년대 동력자원부 방식은 안 된다"

권승문 : 탈핵·탈석탄·재생에너지 확대라는 과제는 결국 정부 조직과 예산, 제도 문제다. 산업통상자원부, 환경부 등 관련 부처 개편에 대한 비전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 가칭 '기후에너지부'라고 할 수 있는 정부 부처 신설 논의와 맞물린 문제다.

올해 말 수립 예정인 '제8차 전력수급기본 계획'에 대해서도 대응이 필요하다. 전력수급의 장기전망, 발전설비 및 주요 송변전설비 계획에 관한 사항, 전력 수요의 관리에 관한 사항 등에 대한 계획이다. 온실가스 배출, 대기 오염 등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이 계획은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졌다. 따라서 변화한 정치 상황에 맞는 계획이 돼야 한다. 지금 진행 중인 '제8차 전력수급기본 계획' 논의를 중단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와 함께 에너지 전환에 어울리는 산업전략을 중앙 정부 차원에서 만들어야 한다. 녹색 일자리를 만드는 계획도 여기 포함된다.

유정민 : 녹색 일자리를 중앙 정부 차원에서 억지로 만드는 방식은 반대한다. 에너지 전환에 따라 녹색 일자리가 얼마만큼 생기는지를 추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녹색 일자리 목표를 세워놓고 추진하는 방식은 잘못이라고 본다. 제도와 시장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해서 녹색 일자리가 생기게끔 해야 한다.

이헌석 : 관료가 주도하는 에너지 정책의 틀을 벗어나는 일도 중요하다. '기후에너지부' 등 에너지 독립 부처 신설 논의는 조심해야 한다. 중앙 정부 관료가 주도하는 구조가 그대로라면, 이는 1970년대식 동력자원부의 부활일 뿐이다. 시민이 에너지 정책을 견제하는 장치가 없다면, 에너지 독립 부처 신설이 위험할 수 있다.

에너지 분권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실제 지역 현장을 가보면, 걱정스런 목소리도 듣는다. 지역 토호들이 힘을 쓰는 구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제가 쉽지 않다.

어떤 에너지 분권화인가?

신근정 : 현재 교통·환경·에너지세가 하나의 세목이다. 이 문제도 다뤄야 한다. 지금 방식이라면, 차라리 없애는 게 낫다. 이 세금이 실제로는 도로 건설에 쓰인다. 환경 친화적으로 쓰이는 비율은 매우 적다. 다만 정의당은 이 세금 가운데 80% 가량을 재생에너지 확대 및 미세먼지 해결 등에 쓴다고 공약했다.

이헌석 : 에너지 분권화 논의를 다시 해보자. 지금까지의 분권화 논의는 발전소 지분 소유 문제가 중심이었다. 발전소 지분을 나누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인허가 권한 문제도 있다. 제주도가 좋은 사례다. 제주도는 실제로 민간 풍력발전 허가를 취소하기도 했다. 이런 권한은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소유구조 외에도 인허가 권한, 규제 권한 등을 분산하는 모델을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

박진희 : 에너지 분권화의 궁극적 목표를 물어볼 때가 됐다. 분권화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어떤 분권화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신근정 : 쓰레기 문제가 지방 정부로 넘어가면서 인기에 영합하는 구조가 됐다. 에너지 문제가 이렇게 되면 안 된다. 쓰레기를 지방자치단체들이 서로 떠넘기는 방식 말이다.

이헌석 : 핵폐기물 문제도 그렇다. 폐기물이 있는 지역 주민들의 오랜 요구는 폐기물을 들고 나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순간,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폐기물 운송 수단을 찾는 문제, 그리고 새 부지를 찾는 문제다.

이런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정부는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를 향후 12년 안에 선정한다고 한다. 그게 가능할까. 한국보다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훨씬 높은 북유럽 국가들도 부지 선정에만 20년 이상 걸렸다. 그런데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한국에서 12년 안에 선정한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독일의 전기요금 고지서, '내가 쓴 전기가 어디서 왔나?'

박진희 : 차기 정부는 아예 원점부터 논의를 해야 한다. 기존 제도를 이어가면서 답을 찾으려 하면 오히려 문제가 엉킨다. 또 한편으론 시민의 참여를 대폭 늘려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합의가 가능하다. 관료가 주도하는 방식이 신뢰와 합의를 끌어낼 수는 없다.

신근정 : 독일의 전기요금 고지서는 내용이 아주 자세하다. 지역마다 전기회사가 달라서, 고지서도 제각각이다. 내가 받아본 건 4장으로 돼 있었다. 내가 쓴 전기 때문에 원자력, 화력, 폐기물 등이 각각 얼마나 쓰였는지가 적혀 있다.

유정민 : 에너지 분권화가 이뤄지려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지금은 전기요금의 지역구별이 없다. 하지만 분권화가 이뤄지면, 서울시민들은 지금보다 높은 전기요금을 내야 한다. 다른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사서 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회의 속기록도 없는 에너지 논의, 이제 벗어나자"


박진희 : 결국 에너지 거버넌스 문제다. 아울러 이는 국가 간 협력 문제와도 맞물린다. 한국이 에너지 자립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헌석 : 동북아 에너지 협력은 1990년대부터 나왔다. 만약 러시아로부터 가스파이프라인(PNG)가 한반도로 연결되면, 이제껏 진행된 에너지 관련 논의는 완전히 새로 이뤄져야 한다. 이는 북한을 포함한 안보 문제다. 결국 동북아 평화 및 비핵화 체제와 맞물려 있다.

앞서 에너지 거버넌스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 문제에 대해선 차기 정부가 적어도 노무현 정부보다는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우선 에너지 관련 위원회에 시민사회가 폭넓게 참여해야 한다. 정부 위원회에 시민사회 측이 이름 하나 얹는 방식은 이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아울러 논의구조가 투명해져야 한다. 아주 기초적인 문제가 있다. 지금은 회의 속기록조차 작성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외부에선 알 수가 없다. 속기록을 작성해서 공개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 계획이 미리 공개돼야 한다. 그리고 그 검증 작업에 정부와 관련 업계가 아닌 제3자가 참가할 수 있어야 한다. 캐나다 등 외국에선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유정민 : 석유, 석탄, 원자력 등 하드 에너지에 의지하는 구조는 점점 더 불안해질 것이다. 이들 에너지원은 외국에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동북아 정세가 당장 좋아질 기미는 없다. 재생에너지 등 이른바 소프트에너지는 상대적으로 주변국과의 협력이 쉽다. 이런 점 때문에라도 소프트에너지 비중을 늘려야 한다. 아울러 '에너지 안보'의 개념도 좀 달라져야 한다. 전에는 '석유 안보'라는 말을 썼다. 석유 확보에 국가가 사활을 건다는 뜻이다. 앞으로는 국가 내부 에너지 인프라의 레질리언스(resilience, 충격에 회복하는 힘)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에너지 관련 충격이 생겼을 때, 쉽게 회복하려면 역시 하드 에너지 의존을 줄여야 한다.

▲ 사진 왼쪽부터 박진희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권승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신근정 녹색연합 에너지기후팀장, 유정민 서울에너지공사 에너지연구소 수석연구원. ⓒ프레시안

[차기 정부 에너지·기후 정책 제언]

<1> 남들 줄이는 석탄발전소를 9개나 더 짓는다고?

<2> 이명박의 적폐는 언제 청산할까?

<3> 당진 시장은 왜 단식 농성을 했을까?

<4> '이명박근혜'는 왜 '녹색일자리'를 만들지 못했을까?

<5> 위기의 한반도, '진짜 안보'는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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