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서 따끈한 음식 좀 해서 드세요. 기운 나게 고추 몇 개 썰어 넣고, 부추전 부쳐 달래장에 찍어 드셔도 좋고요."
봄비가 내리는 날, 학원에 오는 아이들은 우산으로 장난을 치며 '깔깔' 대고 올라가고, 한의원을 찾은 어르신들은 '에고 에고' 하면서 들어오십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같은데, 비를 맞는 사람들의 모습은 사뭇 다르지요.
비가 오는 날이면 몸이 무겁거나 아프거나 찌뿌둥하다는 분이 많습니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도 우울해지거나 감상적이 되곤 합니다. 이런 날은 따끈한 국물을 찾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동네 칼국수 집은 만석이고, 중국집 배달은 밀리기 일쑤입니다. 산책하러 다니다 보면, 창 너머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도 눈에 더 자주 띕니다. 몸과 마음에 스민 비의 기운을 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왜 이런 이들이 생길까요? 비가 오는 날이면, 수렵채취가 쉽지 않아 어두운 동굴에 앉아 있어야 했던 시절 유전자에 각인된 기억의 영향일 것도 같고, 습도의 증가와 기온과 일조량의 감소로 인한 호르몬의 변화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직업 정신을 발휘해 보면 '습(濕)'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한의학에서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변화는 우리 몸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의 흐름의 변화에 따라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의 현상이 발생하고, 외부의 변화에 상응하거나 생활 방식에 따라 몸에도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일정 수준을 벗어나면 병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비가 오는 날은 대체로 온도와 기압이 낮아지고 습도는 올라갑니다. 차고 습한 기운이 증가하는 것이지요. 컵에 찬물을 부으면 바깥쪽에 물기가 생기는 것처럼 우리 몸과 마음도 습한 상태가 됩니다. 그럼 습기를 먹은 천이 눅눅해지고 무거워지는 것처럼 기의 순환이 떨어지게 되지요. 그래서 뜨겁거나 매운 것을 통해 이런 습기를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또는 술이나 담배의 유혹에 휘말리기도 쉽지요. 특히 평소 몸에 습이 많거나 차가운 사람, 기의 추동작용이 약하고 순환이 잘 안 되는 사람은 비가 오는 날이면 몸과 마음이 더 부대낍니다.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도 하고, 저 깊이 묻어뒀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하지요. 관절이 아픈 환자들이 건조하고 따뜻한 기후대에 가면 아프지 않다고 하는데, 아마 우울증 환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평소에 열이 많고, 감정적으로 쉽게 흥분하는 사람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차분해지고 안정적인 기분을 갖게 됩니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과한 작용이 외부의 기운이 조절해 주기 때문이지요. 성격이 불같아서 말 건네기가 어려웠던 사람이 있다면, 비 오는 날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올봄에 내리는 비는 겨울 가뭄을 풀어주는 '약비'라고 합니다. 2017년 우리나라의 봄은 많은 사람들의 말과 약속이 넘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약비와 같은 말과 약속은 얼마나 될까요?
봄비가 내리는 오후. 올봄이 지나고 나면 큰 변화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생긴 우울과 분노가 조금은 풀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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