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정보기관 보고서 "미국의 질서 강요는 실패할 것"

[프레시안 books] <글로벌 트렌드: 진보의 역설>

영국으로부터 넘겨받은 세계 지배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연간 700억 달러(약 80조 원)를 들여 CIA 등 16개 정보기관이 수집한 각국의 첩보 정보를 활용한다. 이 정보 활동에는 논란이 된 인권 탄압 문제, 불법 도·감청 문제 등이 포함됨은 물론이다.

특히 9.11 사태는 미국의 경찰국가화를 촉발했다. 2004년 정보개혁·테러방지법이 제정되고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장(DNI) 직책이 신설됐다. 국가정보장은 국가정보위원회(NIC)를 움직여 분야별, 지역별로 외부의 위협을 평가한다.

특히 NIC는 매 4년마다 향후 20년을 내다보는 미래 예측 보고서 <글로벌 트렌드>를 작성해 민간에도 공개한다. 이 자료는 세계의 지배자로서 지위 유지를 위해 어느 나라보다 예민하게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는 미국 정부의 공식 문서라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기 충분하다. 정보전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는데다, 세계 군비 경쟁의 핵심 지역인 동북아에 우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나온 여섯 번째 보고서인 <글로벌 트렌드: 진보의 역설(Paradox of Progress)>(NIC 지음, 박동철 외 옮김, 한울 펴냄)이 번역 출간됐다. 일본과의 역사 문제가 첨예한 정치 쟁점이 되었고 북한의 위협 강도가 높아지는데다, 특히 중국과의 경제 마찰이 커지는 지금 한국에서 이 책의 의미는 각별하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국정원의 비밀주의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정보기관이 수집한 중요 정보를 민간에 공개한다는 데서 생경함을 느낄 수 있는데, 이에 관해 NIC 의장인 그레고리 트레버턴은 이 책의 서문에서 대중 공개 여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물론 NIC가 <글로벌 트렌드>의 전망을 바탕으로 한 실무적 대외 정책을 대중에 공개하지는 않겠지만, 아래와 같이 밝힌 이들의 근본 태도는 우리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의도는 미래의 위험과 기회에 관해 정통한 공개 토론을 고무하는 데 있다. 나아가 '글로벌 트렌드' 시리즈가 비밀로 분류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일상 업무를 지배하는 보안성 검토가 1~2년 이상을 내다보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로 도움이 되는 것은 전문가와 공무원뿐 아니라 학생, 여성단체, 기업가, 투명성 옹호자 등과 폭넓게 접촉하는 일이다."

▲ 지난 1월 21일(현지 시각) 미국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으로 출근하는 제임스 매티스 미국 신임 국방장관. 그는 한국을 방문함으로서 북핵 문제로 대표되는 동북아 정세에 미국이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세계에 알렸다. ⓒAP=연합뉴스

미국의 대외 개입은 줄어들 것

정보기관의 역량과 품격 차이를 느끼며 펼친 이 책에서 우선 우리 눈을 잡아채는 대목은 미국이 내린 향후 5년 국제 정세 예상치의 요약본이다. <글로벌 트렌드>는 "향후 5년 동안 국가 내에서, 그리고 국가 간에 갈등이 고조될 것"으로 전망한다. NIC는 이미 미국 일국 시대의 종식이 다가옴을 상정한 후, 앞으로 5년간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을 위한 충돌이 커질 것을 우려한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미국이 이 혼란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에 관한 NIC의 의견이다. NIC는 "이처럼 명백한 혼란에 대해서는 질서를 강제하는 것(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이 솔깃한 유혹으로 다가오겠지만, 궁극적으로 그러한 조치는 단기적으로 비용이 너무 크며 장기적으로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부시 정부의 대외 개입이 명백한 실수로 드러난 지금, 특히나 대내 정책에 집중할 예상이 큰 트럼프 행정부의 방향과 궤를 같이 하는 내용이자, 미국 지배 시대의 종언을 상정한 방향 설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NIC는 그간 지속된 진보(progress)의 결과 개인의 힘이 커지고 많은 이가 절대빈곤에서 벗어났지만, 그 결과 포퓰리즘, 금융위기와 같은 충격을 낳아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게 됐다는 '역설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단언한다.

이어 NIC는 경제 침체와 반엘리트주의의 발현이 안으로는 국내적 갈등을 세계 곳곳에서 자극하고, 나아가 민족주의와 같은 국가 간 갈등을 부추길 것으로 전망한다. 이는 당장 중국과 한국의 관계, 한국과 일본의 최근 관계를 통해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사안이다.

이와 관련해 NIC는 단기적으로 세계적 경제 침체로 인해 세계화가 멈추고 각국이 섬처럼 떨어지는, 일종의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의 상황이 재현되리라는 전망을 내고(섬 시나리오), 특히 강대국은 핵무기를 사용하는 갈등에 휘말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정도로 큰 갈등의 시대(궤도 시나리오)가 열릴 것으로 내다본다.

특히 위와 같은 시나리오를 통해 이 책은 2035년까지의 글로벌 트렌드 7가지를 제시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부국은 고령화되나 빈국은 그렇지 않다. △세계경제가 변화한다. △기술이 발전을 가속화하지만 불연속성을 야기한다. △사상과 정체성이 배척의 물결을 일으킨다. △통치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분쟁의 성격이 변화한다. △기후변화, 환경 및 보건 이슈가 주목받을 것이다.
해당 대목에서는 한국이 짧게 언급되기도 하는데, 바로 세계 최고령 국가 대열에 들어설 것이라는 전망치다. 이 대목에서 이 책은 한국이 일본(52.4세), 독일(49.6세)을 이어 2035년에 중위연령이 49.4세에 달하는 세계 최고령 국가의 하나가 되리라고 전망한다. 책은 중국 역시 급속한 노령화로 인해 이 시기 중위연령이 45.7세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반면, 이 시기 미국은 여전히 중위연령이 41세에 불과해 상대적으로 젊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본다. 이는 각국의 장기 미래 전략에 큰 영향을 미칠 대목이다.

얼핏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위 내용을 통해 이 책은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린다. 적어도 정치가라면, 이 책 본문은 읽지 않더라도 해당 내용은 행간의 실제 의미까지 생각하며 여러 번 곱씹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추세는 전례 없는 속도로 수렴하여 통치와 협력을 더욱 어렵게 하고, 권력의 본질을 바꾸며, 나아가 세계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다. 특히 경제·기술·안보 추세에 따라 결과에 기여할 수 있는 국가·단체·개인의 수가 늘어날 것이다. 국가 내에서는 각종 사회와 각급 정부가 서로에 대한 기대를 재조정할 때까지 정치질서가 여전히 자리 잡지 못하고 갈등이 심할 것이다. 국가 간에는 냉전 이후의 일극 시대가 지나갔으며, 1945년 이후의, 룰에 기초한 국제질서도 사라질 것이다. 일부 주요 강대국과 역내 침략국은 힘으로 이익을 관철하려고 할 것이나, 비토 세력이 늘어난 상황에서 전통적 형태의 유형적 힘으로는 성과를 확보하고 유지할 수 없음을 알게 되면서 무위로 돌아가는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금의 단기적 위험 추세를 잘 극복한다면, 세계는 장기적으로 더 좋은 미래를 맞이할 수도 있음을 NIC는 강조한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NIC가 위기 극복의 힘이 뛰어난 국가로 "여성이든 소수집단이든 아니면 최근의 경제·기술 추세로 타격을 입은 사람이든 모든 개인의 잠재력을 끌어내서 포용하는 사회"로 적시했다는 점이다. 힘이 바탕이 되는 사회, 경쟁 체제를 수호하는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적 가치를 강화하는 사회가 위기를 벗어날 힘을 가진다고 강조했음은 트럼프의 분리 정책이 기승을 부리는 미국뿐만 아니라, 극에 달한 갈등의 시대를 보내는 우리로서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 위안부 소녀상. 한일 갈등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사드 문제와 함께 새 정부를 강력하게 압박할 숙제다. ⓒ프레시안(최형락)

한일 갈등 지속할 것

특히 이 책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단연 방대한 분량으로 작성된 부록 중 각 지역의 향후 5년 시나리오를 정리한 대목이다. 해당 대목의 시작은 한국이 포함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이며, 마지막은 '우주'다. NIC의 전략적 고려 순위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우리 일부의 기대와 달리' 해당 대목에서 한국은 중국, 일본과 달리 별도로 설명되지 않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전략적 자산으로써 우리 위치가 어디쯤인가를 지금도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을 신앙화한 일부 사람들은 냉정히 직시해야 할 것이다.

책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세계에서 민족적·문화적으로 가장 다양한 지역이자 경제적 중요성이 커질 가능성이 가장 큰 지역"으로 정의하며 "가까운 장래에 경제협력과 지정학적 경쟁 모두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본다. 중국의 고도성장기가 마무리되었고, 인도가 급부상하는 데다, 중국과 기타 국가의 갈등이 고조되리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 때문에 책은 동아시아 역내 정세가 분쟁 위험 증대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특히 책은 우리나라와 관련해 "한반도 주변에서 긴장이 고조될 것으로 보이는데 향후 수년 동안 심각한 대치 상황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다. 북한 핵 위협과 관련해서는 "(미국-한국-일본-중국 간) 현재의 상호 불신과 더불어 전쟁과 점령의 역사는 협력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앞으로도 동북아 문제에서 우리와 일본의 역사 문제, 우리와 중국의 사드 문제가 북한 핵 위협 대응 능력에 중대한 변수가 될 수 있음을 상징한다. 한국의 새로운 정부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풀어야 할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만 해당 대목을 제외하면 한국에 관한 개별 언급은 없다. 책은 미국의 경쟁자인 중국에 큰 관심을 쏟고 있으며, 그 뒤로 일본과 인도, 인도네시아를 중요하게 언급한다. 이는 태평양 일대를 포괄하는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과 맥락을 같이 하는 구분 기준으로 보인다.

▲ <글로벌 트렌드: 진보의 역설>(NIC 지음, 박동철 외 옮김, 한울 펴냄) ⓒ한울
책은 성장기를 마무리하고 소비 촉진 기조로 변화할 미국의 최대 경쟁자 중국이 "북한의 핵 프로그램, 중국 자신의 커져가는 경제적 도전의 결과로 자신의 부상에 대해 더 강한 반발이 발생하기 전에 지역에서 더 큰 영향력을 확보할 마지막 '전략적 기회의 창'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책은 앞으로 점차 가시화할 중국의 팽창을 두고 "(한국, 일본, 대만과 같은) 동반자와 동맹의 관리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으뜸가는 과제가 될 것"으로 정리한다.

일본은 "점점 더 자립"하려는 욕구를 가진 국가로 평가하는 한편, "미국의 좀 더 강력한 파트너"가 될 것으로 책은 평가한다. 일본의 군사화를 미국의 역내 개입에 적극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부분이다. 다만 책은 한일 관계, 즉 한일 역사 문제를 중요한 변수로 평가한다. 책은 향후 5년간 두 나라 관계가 역사 문제로 인해 "심화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측한다.

어디까지나 이 책은 미국의 시점으로, 미국의 안보 이익 강화를 위해 정리된 전략 보고서다. 하지만, 세계적 이해 충돌 지역이자 군사 갈등 지역이면서 중-미 양대 초강대국 사이에서 중요한 외교적 결정을 내려야 할 우리의 운명을 점치는 데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 책이 전망하는 향후 '글로벌 트렌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떻게 극복할지는 전적으로 차기 정부의 몫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의 미래 운명을 점치는 데 기본 교재로써 가진 역할이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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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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