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에 빠진 김정남 피살, '외교 전쟁'으로 비화

북한-말레이 갈등 확산…한‧미 일각 테러지원국 재지정 요구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 씨 피살 사건을 둘러싸고 북한과 말레이시아의 외교 갈등이 본격화되고 있다.

사건의 핵심 용의자로 지목된 북한 국적자 4명이 이미 평양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져 수사가 난항에 빠진 가운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북한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이려는 한국 정부의 움직임까지 본격화되고 있다.

말레이시아 주재 강철 북한 대사는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말레이시아 경찰의 수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면서 "수사 결과가 나오더라도 신뢰할 수 없다"고 북한 책임을 전면 부인했다. 강 대사는 "사건 발생 7일이 지났지만 사망 원인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면서 이 같이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건으로 유일한 혜택을 보는 것은 한국"이라며 "말레이시아 정부는 한국 정부와 결탁해 북한이 배후라고 한다"고 반발했다.

강 대사는 또 "김정남은 자연사한 것"이라며 말레이시아 경찰과 북한 당국의 공동 조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김정남 피살 당시 상황이 담긴 CCTV에는 여성 용의자들이 김 씨의 얼굴 주위를 감싸는 장면이 포착돼 강 대사의 '자연사' 발언은 북한의 일방적 주장으로 풀이된다.

사건의 진실 규명이 더뎌지면서 북한과 말레이시아 정부의 외교 갈등이 전면화된 셈이다. 이에 앞서 말레이시아 정부는 평양 주재 자국 대사에게 소환을 통보하는 한편, 이날 강철 대사를 초치해 "말레이시아 정부는 강 대사의 비판이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이는 강 대사가 지난 17일 김정남 씨의 시신이 안치된 쿠알라룸프 병원 앞에서 "말레이시아 정부가 적대 세력과 공모해 무언가 숨기려 하고 있다"며 항의성 기자회견을 연 데 대한 반박이다.

이런 가운데 이번 사건을 북한 소행으로 단정하는 우리 정부는 이번 사건을 대북 제재 정책의 징검다리로 활용하려는 분위기다.

국회 국방위원회는 이날 한민구 국방부장관과 간담회를 열고 "국방위원들은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일부 의원이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재지정 요구를 했으며, 한 장관을 비롯한 여야 국방위원들의 이견은 나오지 않았다고 김영우 국회 국방위원장이 전했다.

현재 미국 정부가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나라는 이란, 수단, 시리아 등 3개국이다. 미국 정부는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이후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가 지난 2008년 10월 북미간 핵 검증 합의가 진행되던 당시 이를 해제했다.

미국 의회 일각에서도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최종 입장이 주목된다.

테러지원국 명단에 오르면 해당 국가는 미국과 직간접적인 무역을 할 수 없게 되고 긴급 식량지원을 제외한 원조 금지, 무기 및 방위물자 수출금지 등의 제재가 가해진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 차원의 강도 높은 제재가 가해지고 있어 테러지원국에 재지정되더라도 실효성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에 따라 외교안보 라인이 아직 정비되지 않은 트럼프 정부가 김정남 씨 피살 사건과 이에 따른 한국과 일본 등의 제재 요구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관심으로 떠올랐다.

대북 정책의 첫 단추를 테러지원국 지정에 맞춰 강대강 국면으로 돌입할 경우 미국의 핵심적 우려 사항인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접어들 수도 있어 트럼프 정부로서는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다.

한편 김영우 위원장에 따르면, 한민구 장관은 김정남 피살 사건을 "김정은 체제의 대안 세력을 사전에 제거하고 국제사회에 김정은 교체 시도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미가 있다"면서 "탈북자 또는 체제 불만 세력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 장관은 또 "국방부는 최룡해가 보이지 않는 것이 김정남 피살 사건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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