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에게서 진시황의 그림자를 보다

[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다시 합종연횡의 시대로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혼란한 시대였다. 천자의 권위는 허울뿐이고 제후국들끼리 서로 잘났다고 끊임없이 세력 다툼을 벌이던 전쟁의 시대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경제적 조건의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어 생산력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인구가 급격히 늘었는데 여기에 덧붙여 제후의 역량에 따라 힘의 불균형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는 춘추오패(春秋五覇)라 불리는 강력한 제후국들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고, 전국시대에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춘추오패는 말 그대로 패권을 차지했던 다섯 명의 제후국 군주를 일컫는 말이다.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은 명실공이 당시의 패주로 인정할 만한 역량과 업적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진(秦) 목공(穆公)과 초(楚) 장왕(莊王)은 중원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패주라 불릴만했다. 그런데 다섯 번째 패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진목공을 빼고 오(吳)의 합려(闔閭)나 월(越)의 구천(句踐)을 거론하고, 또 어떤 이는 합려와 구천을 빼고 송(宋) 양공(襄公)을 오패에 넣기도 한다.

합려와 구천을 오패에 넣은 사람은 순자(荀子)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다. 순자는 전국시대에 활약했던 한비자(韓非子)와 이사(李斯)의 스승이니 다분히 전쟁의 승리와 영토의 확장이 평가의 주된 지표였을 것이다. 송양공을 오패에 넣은 이는 주자(朱子)의 뜻을 따른 것이니 당연히 인의(仁義)라는 유교적 가치가 평가의 지표가 됐을 것이다.

전국(戰國) 시대의 도래와 합종연횡

송양공은 뚜렷한 업적은 없었다. 단지 주나라 천자의 권위를 지키고 이민족을 몰아내겠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워 최초의 패주가 된 제환공의 후계자 문제를 인의의 원칙에 따라 해결했다는 것이 유일한 업적이라면 업적일 것이다. 오히려 송양공이 후세에 알려진 것은 홍수(泓水)의 전투에서 초나라에게 패퇴한 사건 때문이다. 송나라 군대와 초나라 군대가 홍수 근처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마침 초나라 군대가 홍수를 건너오고 있어서 부하들이 이때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고 건의했지만, 송양공은 인의를 내세워 초나라 군대가 강을 다 건너고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 전투에 임했다. 당연히 송나라 군대는 완패했다.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송양공의 인’(宋襄之仁)이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춘추시대의 특징이 그랬다. 여전히 주나라 왕실은 존재하고 있었고, 천자의 권위를 지킨다는 명분은 패권을 차지하려는 제후국 군주에게 매우 중요했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영토를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서열을 정하는 결투 같은 것이었다. 선전포고를 하고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결전을 벌여 힘의 우위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거기에는 아무리 전쟁이지만 지켜야할 도리 같은 것이 있다고 여겨지는 예악의 잔여물들이 남아있었다. 남만(南蠻)이라고 불리는 남쪽의 이민족이 다수 포함되어 있던 초나라를 제외하고 천자의 권위를 대놓고 부정하는 제후국은 없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에는 그런 일말의 예악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전쟁의 목적은 서열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멸하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 되었다. 그 끝에는 천하통일이라는 중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동안 무자비하고 비도덕적인 일들이 ‘합종연횡’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졌다.

약육강식의 시대에 약소국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연합을 했다. 특히 진(晉)나라가 분열하여 세워진 한(韓), 조(趙), 위(魏) 세 나라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燕)나라, 남쪽으로는 초(楚)나라가 연합과 분열을 반복하며 비교적 강성했던 서쪽의 진(秦)나라와 동쪽의 제(齊)나라에 대항했다. "아침에는 진나라를 따르고, 저녁에는 초나라를 따른다"(朝秦暮楚)는 고사는 이때 등장한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동쪽의 여섯 나라가 합종을 하고, 진나라가 이를 각개격파하기 위해 연횡책을 펼쳤다는 합종연횡은 장평(長平) 전투 이후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장평 전투는 진나라와 조나라가 벌인 대규모 전쟁인데, 이 전쟁에서 조나라는 완패하고 몰락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특히 진나라는 승리 후에 포로로 잡은 조나라 군사 40만 명을 모두 죽이고 수급으로 산을 쌓았다고 한다. 이러한 공포가 동쪽의 6국으로 하여금 '합종'하게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연합군의 최대 약점은 엄밀한 공조와 단결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진나라 장의(張儀)가 펼친 연횡책이 성공하여 합종은 깨어지고 진나라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었다.

한비자(韓非子)는 "합종은 반드시 패권을 만들고, 연횡은 반드시 왕을 만든다"(한비자, 충효편)고 했다. 현대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합종은 국제관계에서 어떤 명분을 근거로 서열을 정하는 다자간 연합체를 만드는 것이고, 연횡은 그러한 연합체를 타개할 목적으로 각 나라와 양자 간 동맹을 맺어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개별적으로 복속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외교정책에 따라 각 나라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250년이 넘는 전국시대를 혼란과 전쟁으로 장식했다.

21세기 합종연횡의 시대에 우리가 가야할 길은?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유세기간 중에 내세웠던 공약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선언했으며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급기야 아랍권 7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America First!(미국 우선!)"를 외치며 국제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최소한의 명분도 지킬 의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패권적 질서에서 스스로 이탈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의 이런 정책은 본의 아니게 세계사를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게 한다. EU가 합종을 하고, 중국과 중동이 합종을 하고, 미국은 러시아와 영국과 개별적으로 연횡을 하는 전국시대 대혼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백악관에서 회견하는 중에 악수를 하고 있다. 트뤼도 총리는 트럼프 취임 후 영국과 일본 총리에 이어 세번째로 만나는 주요국 정상이다. ⓒ연합뉴스

한비자의 말을 빌리자면 연횡의 목적은 왕이 되는 것이다. 트럼프가 진시황처럼 천하의 영토를 통일하기 위해 패권적 지위를 스스로 버리지는 않았겠지만 앞으로 UN이나 WTO 같은 국제기구가 유지하고 있는 질서를 무시하고 각 나라들과 개별적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면 전국시대에 벌어졌던 그런 혼란이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트럼프를 지지한 미국의 유권자 대부분은 과거 미국이 누렸던 경제적 호황과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보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경제의 지형도가 예전하고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원동력은 연횡책의 성공이라기보다는 장현근 교수의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관련 기사 보기) 상앙(商鞅)과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부국강병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농업을 장려하고, 전쟁에 나가서 공을 세우면 공평하게 상을 내리는 '경전(耕戰)' 정신과 '군공작제(軍功爵制)'가 법가의 원칙에 따라 엄격하게 지켜졌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공을 세워 상을 받을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진나라에서는 농민이면 누구나 전쟁에 나갈 수 있었고, 공을 세우면 그에 맞게 토지를 상으로 줬기 때문에 농사도 열심히 지었고, 전쟁에 나가서도 사력을 다했다. 이렇듯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주고, 공을 세우면 반드시 포상했기 때문에 진나라의 국력이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합종연횡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외교를 잘해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에게 공평한 기회와 합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미국의 경제적 어려움을 다른 나라 탓으로 돌리고 그들을 윽박질러 보상받으려 한다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지는 모르나 성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전국시대가 주는 교훈은 그렇다. 4년 후에도 트럼프가 그 자리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혼란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가 강해져야 하고, 국가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국민에게 특권이 없는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진나라의 성공에서 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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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중국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대륙연구소, 북방권교류협의회, 한림대학교 학술원 등에서 연구원을 역임했다. 중국의 관료 체제에 관한 연구로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중국의 정치 문화에 대한 연구로 건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 권으로 읽는 유교> 등의 번역서와 <중국 인민의 근대성 비판> 등 다수의 연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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