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로 정부는 국정 모든 분야에 관리모드로 들어섰다. 새로운 정책을 만들거나 기왕의 정책을 뒤집는 것은 대행정부의 권한을 넘는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더구나 지금 형편에서는 국정교과서 문제나 한일 '위안부'합의 이행 문제처럼 기존정책의 집행을 나름 잘 관리하겠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직무 정지된 대통령을 대신해서 황교안 대행이 보고받은 올해 외교안보부처의 업무계획은 정부의 이런 고민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실패한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과 대북정책을 답습하는 답답한 상황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몇 해 동안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가 크게 불안정해진 데다가 트럼프 쇼크라고 부를 정도로 국제환경이 급변하게 될 것이 명백해진 지금, 한국 정부는 이미 망가진 대외정책을 맴돌면서 운명의 여신에게 선처만 바라고 있을 뿐이다.
남북관계는 최악이며, 외교는 사면초가 상황이다. 위안부 합의 이행과 관련한 일본의 추궁과 사드 배치 문제와 관련한 중국의 보복을 일방적으로 받고 있다. 앞으로 나가자니 태산(泰山)이요, 뒤로 물리자니 숭산(嵩山)이다.
트럼프 쇼크가 오랫동안 얼크러지고 막혀있던 한반도 주변 상황을 흔들어 놓으면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그 과정에서 위기만이 아니라 기회도 만들 수 있으련만, 우리 외교는 지금 어디에도 없다.
법정(法定) 납북억류자 1호, 최악의 남북관계에 추가될 또 하나의 기록
박근혜 정부의 남북관계는 역대 최악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개성공단 폐쇄를 끝으로 모든 남북관계가 중단됐다. 대신 대북압박과 제재에 온 힘을 쏟고 있으나 북한의 핵무장은 막지 못했고 남북 적대감과 한반도 긴장을 휴전 이래 최고 수위로 끌어 올렸다. 안보의 실패는 외교나 남북관계의 실패보다 더 아플 수 있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의 최악의 기록이 하나 더 추가된다. 억류자 문제다.
현재 우리 국민 3명과 한국계 외국인 2명이 북한에 억류 중이다. 김정욱 목사는 2013년 10월 북한에서 간첩협의로 체포, 2014년 5월 무기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휴전 이후 납북자는 이외에 516명이 더 있지만, 김 선교사 케이스는 특별하다.
첫째, 북한이 강제 억류를 인정하는 첫 사례라는 점이다. 북한은 그동안 납북자에 대해 납북이나 강제억류 사실을 부인하고 그들이 자진해서 북한의 품에 안겼다고 강변하여 우리 정부의 노력을 벽에 부딪히게 만들었다. 이번 김 씨 사례에서는 문제가 이미 절반은 풀린 셈이다.
둘째, 2005년 납북피해자지원법이 시행된 이후 법정요건에 부합하는 첫 사례다. 이 법은 납북자를 '북한에 억류되어 3년 이상 돌아오지 못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김 선교사는 법정 납북자 1호이면서 21세기 첫 납북 사례가 되는 동시에, 박근혜 정부는 납북자 1호의 발생을 방치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될 수도 있다.
억류자 송환‧이산가족 상봉으로 출로 열어야
권한대행 정부가 관리모드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억류자 송환이나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나 미국의 대북제재에도 금지된 사항이 아니다. 이를 위한 남북대화는 보수나 진보를 포함한 모든 정치인과 국민도 지지할 것이다.
북한도 이 제의에 호응할 가능성이 높다. 장기 억류는 북한에게도 부담이다. 혹시 북한이 보석금을 요구하면 '프라이카우프(Freikauf, '자유를 산다'는 뜻으로 과거 동서독 분단 시절 서독이 동독에 억류돼 있는 정치범을 데려올 목적으로 현금과 현물을 비밀리에 동독 측에 제공)'를 확립하는 계기로 삼으면 된다. 한반도 긴장을 낮추고 과도하게 경직된 정세를 전환하는 분위기도 만들 수 있다.
새로운 정책을 만들기도 어렵고 실패한 기존정책을 맴돌 수 밖에 없는 대행정부 외교의 입장에서도 억류자 송환과 이산가족 상봉은 외교절벽의 진퇴유곡으로부터 출로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즉각 이 문제를 위한 대북교섭에 나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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