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 미국과 일본 벤치마킹해야

[황재옥의 '북한 인권을 생각한다'] '특수 이산가족' 상봉 문제 해결 위해서는

정치만 생물이 아니라 남북관계도 생물이다

9월 25일부터 금강산에서 진행하기로 했던 '이산가족상봉'을 불과 사흘 앞두고 북한이 갑자기 행사를 일방적으로 연기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책임 문제를 놓고 남북이 공방을 벌인 것도 벌써 지난 일이 되었고 그 이후 남북관계는 풀리기보다 꼬이는 쪽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최근 들어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의 실명을 언급하며 비방의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도 '원칙'에 입각해서 남북관계를 관리한다는 입장에서 아직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있다. 지금 같은 남북 간 비난과 비방, 기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적어도 올해 안에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인도주의 차원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남북 간 정치적 입장과 계산 차이 때문에 휘둘리고 있다. '정치는 생물과 같다'는 말을 정치인들은 즐겨 쓴다.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것이 정치라는 걸 비유하는 말인 것 같은데, 곧 죽을 것 같다가도 환경이나 조건이 변하면 따라 죽을 수도 있고 살아날 수도 있다는 뜻인 것 같다. 이산가족 상봉은 인도주의 문제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남북관계는 정치 바람을 많이 탄다는 점에서 '남북관계도 생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막혀있고 꼬여가는 측면도 있지만 남북관계가 영원히 지금처럼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남북관계도 '생물'이기 때문이다. 주변 정세의 변화나 남북 어느 한쪽의 필요 때문에 대화와 협상 국면으로 넘어갈 가능성은 상존한다.

이산가족 개념과 범위 확대의 필요성

남북관계가 다시 풀리기 시작하면 이산가족 상봉 사업이 맨 먼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북한도 이산가족 상봉을 '취소'가 아니라 '연기'한다고 했다. 날짜만 바꾸어서 원래 계획을 추진하면 되는데 그 때를 대비해서 이참에 이산가족 문제를 한 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이산가족의 개념과 범위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이산가족은 6.25전쟁 기간을 전후한 시기에 이념이나 정치적 이유로 자진 월남‧월북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지칭하는 개념이었다. 1971년 8월에 남북이 대화를 시작한 이산가족 문제는 월남‧월북자들과 그 가족들이 만나는 문제였다.

▲ 지난 2006년 열린 제14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고교생 시절이던 1978년 전북 군산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납북된 김영남(45) 씨가 어머니 최계월(82) 씨와 28년만에 상봉했다. ⓒ연합뉴스

그런데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총 17회에 걸쳐 약 1만 7000명의 이산가족들이 상봉을 하게 되자, 전후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납북된 사람들의 가족들도 북한에 살고 있을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 하게 됐다. 또한 정전협정 규정에 의한 포로교환 대상이 되지 못한 국군포로들의 남한 가족들도 포로가 된 후 북한에 살고 있을 피붙이들을 만나고 싶어 하게 됐다. 냉전 시대에 말의 성찬으로 끝난 이산가족 상봉이 '그림의 떡' 이었을 때는 엄두조차 못 내던 일이 막상 자진 월남‧월북자들의 가족들이 만나는 걸 보면서 그분들도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국군포로와 전후 납북자 문제, 정부는 '끌어오기'라도 해야

6.25전쟁 당시 유엔군사령부가 추정한 국군실종자는 8만 2000여 명이었으나 정전협정을 통해 최종 송환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했다. 때문에 정전 이후 1960년대부터 우리 측은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미송환 국군포로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북한 측은 "남한출신 '국군포로'는 전원 송환했고 강제 억류 중인 국군포로는 단 한 명도 북쪽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나 북한에는 560명의 국군포로가 아직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북한에 억류 중인 국군포로의 수가 약 1770명이었는데 그중 생존이 확인된 국군포로가 560명, 사망 910명, 행방불명 300명 정도라고 추정하고 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북한으로 납치된 어부, 여객기 승무원 등 민간인은 총 3795명이었는데 그 중 3315명(87%)이 귀환했다. 결과적으로 최근 탈북해서 귀환한 5명을 제외하면 현재 총 480명의 납북자들이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 것이다.

6·25전쟁 당시 북한지역에서 포로로 잡혔던 국군포로 손동식씨의 유해가 최근 고국으로 돌아왔다. 지난 9월, 중국으로 반출된 손씨의 유해가 이달 초 한국으로 들어옴으로써 죽어서라도 고국에 묻히기를 원했던 그의 간절한 소망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무산에 묻혔던 그의 유해를 중국으로 반출했던 북한주민이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탈북해서 현재 중국 어딘가에 피신해 있다고 한다. 국군포로 송환이 됐건 유해 송환이 됐건 속 시원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사연들이 전해질 때마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언제쯤 북한이 이런 분들의 송환에 협조적으로 나오게 될지. 그리고 우리 정부는 언제쯤이나 이런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해줄 것인지.

남북간 왕래와 교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국군포로나 납북자들의 고령화는 재남 가족들을 절망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이 남북 간 정치 상황에 바람을 많이 타고 있는데 만날 기회가 오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이쪽저쪽에서 세상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그렇다 치고 북한이 말하는 '특수 이산가족, 즉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상봉과 관련해서 우리 정부가 최선을 다했는지 이쯤에서 한 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전 정부에서는 큰 틀에서 남북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당국차원에서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남북 간 교류와 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절에도 국군포로 문제와 전후 납북자 문제는 남북회담 의제로 오르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단지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마다 국군포로나 납북자 2~3명, 많을 때는 4~5명의 가족들을 끼워 넣는 것이 전부였다.

북한에서는 이들을 '특수 이산가족'이라고 부른다. 남북관계가 원활할 때, 그리고 북한의 마음이 내키면 이른바 '특수 이산가족'들이 상봉의 '특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인도주의 사안인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이렇게 북한의 선심에 의해서 좌우되었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마음이 내켜 선심을 베푸는 식의 '특수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지 궁금하다.

납북 일본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관심과 정책

분단의 장기화와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인하여 상봉은 고사하고 생사확인이라는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요구마저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국군포로와 납북자도 세상을 뜨고 있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그분들의 생사확인이라도 서두를 수는 없을까?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다소 복잡하다고 해서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이 우리의 뇌리에서 멀어지거나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정부의 납북 일본인 정책을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대북정책은 대외적으로는 동북아 정세에 따라,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정권의 성격에 따라 그 방향과 기조를 달리해 왔다. 그러나 납북 일본인 문제에 관한 한 일관성을 보였다. 일본 정부는 북한에 인권문제를 제기하더라도 자국민의 납북문제를 중심으로 인권문제를 제기해 왔다. 북한의 경제위기와 핵·미사일 문제가 중첩되는 가운데 국제사회가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할 때도 일본은 납북 일본인들의 인권문제를 꺼냈다. 특히 납치된 일본인의 생사여부와 인권 상황을 부각시키면서 북한을 압박했다. 국제정세 상황이 좋아져서 일‧북 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적 회담을 할 때도 납북 일본인의 송환문제를 협상 카드로 내놓았다. 다시 말해 일본 정부는 자나 깨나 납북 일본인의 생사여부와 인권 문제를 일·북 간 주요 의제로 삼아 왔다.


한국 방문과 탈북자 면담 방식으로 북한 인권실태 조사를 마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지난 8월 28일 납북 일본인 문제와 관련한 추가 증언 확보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도 일본 정부는 납북 일본인 문제 해결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북한의 심각하고 조직화된 인권침해에 대해서 일단 우려를 표명하고 납북 일본인 문제 해결 없이는 북한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했다. 우리 정부의 납북자 정책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납북 일본인 문제는 여중생 요코다 메구미(橫田めぐみ)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987년 말 KAL기 공중폭파 사건의 범인인 김현희는 일본 서북부 니가타 해변에서 납치된 요코다 메구미로부터 일본어를 배웠다고 자백했다. 이로써 북한이 일본인을 납치해갔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그 이후 납북 일본인의 송환 문제가 일‧북간 교섭에서 중심이슈가 되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일찍 「북한인권법」을 제정했다. 2006년 6월 참의원을 통과한 북한인권법의 정식 명칭은 「납치문제 기타 북조선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 대처에 관한 법률」이다. 일본인 납치문제 등 북한의 인권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북한에 대해 경제제재를 발동할 수 있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이전에 제정된 개정 「외환법」과 「특정선박입항금지법」과 함께 3대 대북제재법으로 불린다. 이 세 가지 법률의 제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였다.

일본의 북한인권법은 북한을 제재하는 성격이 강하고 납북 일본인의 인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인권 가치나 북한주민의 실질적인 인권개선을 위한 법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이 북한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적지 않다. 일본정부의 이 같은 태도가 부담이 되었는지 북한은 최근에도 일본 적십자사에는 재북 이산가족들의 현황을 자세히 전달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정부는? 미국과 일본을 보라

천신만고 끝에 남한으로 돌아온 국군포로들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남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탄광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굶주림을 밥 먹듯 한다고 한다. 국군포로만의 일이 아니고 남한 출신의 납북억류자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책무를 다할 때 그 존재의 가치가 있다. 미국은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서는 거물급이 협상에 나서고 때로는 군사적 행동도 불사한다. 불법 입북했다가 북한에 억류된 자국민의 석방을 위해 전직 대통령도 평양에 갔다. 6.25 한국전쟁 때 전사한 군인의 유골을 한 구라도 더 발굴하고 송환하기 위해 북한에 거액을 주고 작업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하지 못할까? '퍼주기'라는 말이라도 듣게 될까봐 시작을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이전 정부들이 북한에 끌려가고 퍼주기를 하면서도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했었다는 비판을 하려면,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눈치 보기와는 상관없이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남북 간 의제로 올려야 할 것이다. 일반 이산가족들의 상봉에 그치지 말고 북한이 말하는 '특수 이산가족', 즉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상봉과 생사확인도 남북 간 의제로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자나 깨나 납북 일본인 문제를 물고 늘어지니, 북한이 재북 일본인의 현황 정도는 통보하고 있다는 것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상봉 규모와 범위 확대는 물론이고 생사확인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록 그들이 남한의 가족과 헤어진 후 북에서 새로이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가족이 딸려있어서 돌아오는 것이 어렵다면 생사확인만이라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산가족들의 생사여부만이라도 남한의 가족들에게 알려만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가족들은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면 손동식씨의 경우처럼 유해만이라도 고국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최근의 한 신문사설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원칙'과 '포용'은 반대말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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