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 "차례상엔 떡국 한그릇만. 피자·햄버거도 좋다"

[인터뷰]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설 나기

설을 앞두고 터진 AI 파동으로 인해 설 물가에 비상이 걸렸다는 뉴스가 연일 쏟아진다. 정부가 달걀을 급히 수입했지만, 수요가 집중되는 설 시즌을 대비하긴 태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AI 변수를 제쳐두면,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명절마다 정부는 물가 단속에 나섰다. 정부는 바람직한 차례상 차림은 얼마짜리라고 홍보해왔다. 사실상 정부가 우리 차례상을 통제했다.

조금 근본적 차원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설과 추석은 국경휴일이다. 그러나 차례와 관련한 온갖 논쟁이 우리의 생각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우리 차례(제사) 문화가 물가를 요동치게 만드는 주범, 나아가 명절 휴일 우리 생활을 규정하는 주범일 수 있다.

음식 칼럼니스트 황교익을 만나 우리의 차례 문화를 성찰해 봤다. 설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다. 황교익은 설 차례상을 두고 "떡국 하나만 놓으면 된다"고 말했다. 피자나 치킨을 놓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현대 설 문화에 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황교익은 본래 봄맞이 축제여야 할 설이 조작된 전통으로 인해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고 했다. 다만, 그는 떡국은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의 진짜 전통이라는 이유다.

내친 김에 혼밥, 혼술 문화에 관해서도 물었다. 그는 "혼밥, 혼술은 그럴 수밖에 없으니 하는 것"이라며 사람은 다른 이와 함께 밥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2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두 시간여에 걸쳐 나눈 인터뷰를 정리했다.

▲ 황교익 음식 칼럼니스트. ⓒ프레시안(최형락)

간단하지 않은 달걀 파동

프레시안 : 설을 앞두고 발생한 AI 파동 여파가 설 차례상에도 영향을 미치리라는 우려가 크다. 음식 유통을 지배한 산업 논리의 부작용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닭을 달걀 낳는 기계로 만들었기에 피해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황교익 : AI 문제가 커지자 공장식 축산의 문제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공장식 축산이 무조건 나쁠까?

공장식 축산 덕분에 우리가 그간 달걀을 값싸게 먹었다. AI 위험도를 낮추기 위해 달걀 생산 방식을 바꾼다면 달걀 값은 오른다. 그 비용을 지불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우리가 넉넉한가에 관한 고민도 함께 해야 한다. 달걀은 그간 서민이 가장 저렴하게 얻을 수 있는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산업사회에서 먹는 문제는 돈과 직결된다. 생산 환경만 들여다볼 수 없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 한다.

프레시안 : <한국음식문화박물지>(따비 펴냄)에서 예전 우리가 먹던 흰 달걀을 낳는 백색 산란계가 사료 효율도 좋고 질병에 강하다고 했다. 노른자 비율이 높아 맛도 더 좋다고 했다. 하지만 껍질이 약하고 더러워 보이기 쉬우니, 산업 관계자가 (갈색 달걀이 토종란이라는) 토종란 마케팅을 펼친 바람에 갈색 달걀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다시 흰 달걀을 먹는 게 AI 파동에 대응할 방법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황교익 : AI와 관련성은 잘 모르겠다. 내가 흰 달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산업 논리가 잘못된 정보를 제공해 소비자를 우롱했기 때문이다.

흰 달걀을 먹는 게 더 좋다. 일단 더 맛있다. (백색 산란계가 사료를 적게 먹으므로) 생산자에게 경제적으로 유리하고, 소비자는 맛있는 달걀을 구할 수 있고, 윤리적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 왜 윤리적인가?

황교익 : 백색 산란계가 사료를 적게 먹으니 곡물 수입량이 줄어든다. 그리고 닭은 사료를 적게 먹는 만큼 똥도 덜 싼다. 똥이 많으면 그만큼 환경에 엔트로피를 축적시킨다. 닭똥이 줄어들면 그만큼 환경에 좋다.

제사상 전통은 박정희 정부가 창조했다

프레시안 : AI 파동 변수를 빼더라도 명절 물가는 항상 뉴스였다. 정부가 설이나 추석을 앞두고 물가 특별 점검에 나서는 게 일상이다. 그 원인은 우리 명절의 핵심인 차례(제사)다.

정부가 통제하는 건 가격뿐만이 아니다. 우리 차례 상차림을 통제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상차림 형식이 1969년 3월 1일 공포된 가정의례준칙과 정부가 때때로 발표하는 이른바 '모범적 상차림'을 따른다. 정부가 가정의 상차림에까지 간섭하는 이 규율에 과연 전통이 있는지 의문이다.

황교익 : 이미 조선 말 가례(家禮)가 돌면서 제사 상차림을 규격화했다.

가례가 만들어진 연원을 따져봐야 한다.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는 유교 질서와 함께 공고화했다. 조선에서 유교 의례를 행하는 계급은 양반 이상이었다. 제사는 기본적으로 지배 권력층의 행사다. 조선 지배 계급이 전체 인구의 10%나 됐을까? 90% 절대 다수인 평민은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유학자도 아닌데 왜 제사를 지내나.

조선 말기 군역 회피 목적으로 족보 거래가 횡행했다. 양반이 전체의 70%대로 늘어났다. 귀족이 평민보다 많은 이상한 사회가 됐다. 갑자기 양반이 된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야 했다. 어제까지 농사짓고 장사하던 까막눈들이 제사 예절을 알 리가 있나? 조선 유교 예법의 표준이었던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뭔지나 알았겠나?

모르니 옆집 제사를 들여다봤다. 제사상에 배는 앞에 올리고, 옆에 밤을 두네? 뒤에 나물 올리고 생선을 올리는구나. 이걸 그냥 따라했다. <주자가례>가 이렇게 하라고 했나? 아니다. 그저 포, 채 등을 알아서 놓으라고 했다.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지 않았다.

(이미 가례로 인해 근거 없는 규격화가 진행된 제사 상차림을) 박정희 정부가 가정의례준칙을 공표함으로써 공식화했다. 지금 우리 제사상은 전통과 아무 관련 없다.

프레시안 : 박정희 정부 때부터 정부의 제사상차림 간섭이 본격화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황교익 : 우리가 전통으로 착각하는 많은 것들이 박정희 정부 때 만들어졌다. 일종의 '전통의 조작'이다. 왜 박정희 정부가 그런 일을 했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근대 민주국가의 성립과 전통의 형성은 밀접하게 연결된다. 민주공화국이 탄생해 지배 받던 사람들이 권력을 갖게 됐다. 기존 체제가 해체되자, 사람을 결집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국가 정체성, 국민 정체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 단위에서 전통의 조작이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이런 일을 했다. 유형문화재(1962년), 무형문화재(1964년) 지정도 박정희 정부가 했다.

문제는 우리의 공화국으로 이행이 주도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조선 왕국, 일본 왕국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해방되고 민주공화국이 됐다. 주권의 의미를 아무도 몰랐다.

(민주 정통성이 없는) 박정희 정부는 민주공화국의 전통이 아닌, 왕권 시대의 전통을 조작했다. 왕이 먹던 음식이 전통이 되고, 왕에게 충성하는 사상이 전통이 됐다. 그 안에 제사도 포함됐다.

우리의 이른바 전통은 공화국 시민에 걸맞은 전통이 아니다. 박정희 정부가 우리의 전통으로 충효 사상을 강조했다. 인간 본성인 효와 왕정 시대 충성 논리가 어떻게 같나? 국가는 실체가 없는 존재다. 충성은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대두됐다. 국가에의 충성을 강조하는 순간, 충성을 전통의 자리에 놓는 순간 대통령은 왕이 된다.

▲ 설 차례상을 차리는 구체적 방법이란 없다. 지난해 2월 3일 설을 앞두고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용인시예절교육관이 차례상 차리는 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모습. ⓒ연합뉴스

설 차례상, 떡국만 놓으면 된다

프레시안 : 그간 명절 차례상을 비판했다. 차례상도 간소화하라고 했다. 이번 설 차례상은 어떻게 차리면 좋을까?

황교익 : 떡국 하나 놓으면 된다.

프레시안 : 치킨이나 피자를 놓아도 되나?

황교익 : 마음대로 하면 된다.

프레시안 : 차례를 격식에 맞게 안 지내면 큰일난다는 사람이 많다.

황교익 : 설날의 개념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설날은 유교식 의례와 아무 관련 없다. 훨씬 이전부터 우리는 새해를 기념했다.

설이라고 하면 음력 1월 1일 하루를 생각하기 쉽지만, 예전 설은 섣달그믐(음력 세밑)부터 대보름(음력 1월 15일)까지를 지칭했다. 설은 춘제(春祭)다. 봄맞이 축제다. 대부분 농경 문명이 춘제를 지냈다.

농경문화권에서 겨울은 일하지 않는 시기다. 그러다 봄이 오면 사람은 노동을 준비한다. 이를 기념해 봄맞이 행사를 했다.

우리 조상 역시 마찬가지다. 설을 맞아 보름 동안 축제를 이어갔다. 한마디로 보름 동안 놀았다. 설은 노는 날이다.

우리 조상들은 대보름 놀이를 줄다리기 등 마을 대항전으로 치렀다. 설의 절정에 이르러 마을 단위로 큰 규모의 놀이가 이어졌다. 이 놀이 준비를 위해 풍물을 부르고 함께 음식을 만들었다.

왜 마을 단위로 놀았을까? 농사를 앞두고 공동체 의식을 키우기 위해서다. 마을 사람들이 놀이를 통해 큰 단위의 공동체로 묶였다.

농사는 고되다. (과거 농사는) 개인이 할 수 없다. 피 뽑고 타작하는 일을 공동체 단위로 해야 했다. 설 축제는 공동체 정서를 만드는 기간이었다.

지금 우리의 설은 과거 보름동안 이어지던 축제가 설과 대보름으로 쪼개진 형태로 존속되었다. 이를 춘제로 되살려야 한다. 물론 옛날과 똑같이 놀 순 없다. 공화국에 맞는 방식으로 시민의 공동체 의식을 되살릴 놀이를 새로 만들면 된다.

프레시안 : 일본이 떠오른다. 일본은 여전히 옛 시대의 전통을 이어가는 행사를 축제 형태로 활발히 연다.

황교익 : 3, 4년 전, 가고시마(鹿兒島) 현 한 마을의 설 행사에 참여한 적 있다. 귀신불(鬼火) 태우기 행사를 하더라. 동네 한복판에 대나무를 높이 쌓아 달집을 만들고, 달이 떠오를 때 불을 붙인다.

마을 사람들이 손에 조그마한 바구니를 들고 모인다. 이 바구니에 떡이 들어 있다. 불이 죽으면, 잔불에 이 떡을 구워 가고시마 특산품인 고구마 소주와 함께 먹는다. 축제가 끝나면 각자 집에 들어간다. 그러면 멧돼지 고기로 끓인 국을 내놓는다. 이런 축제가 지역마다 살아 있다.

도시에도 상인회가 자발적으로 만드는 축제(마쯔리, 마쯔리 33건이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록 권고되었다)가 남아 있다. 상당수 마쯔리가 정월 즈음에 몰려 있다. 현대에 맞게 변화한 춘제의 의미가 짙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건 전통의 의미를 되짚는 것이다. 춘제의 전통은 무엇인가? 언제 어떤 행사를 하느냐는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전통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다. '공화국에 맞는 공동체 의식 다지기'가 춘제의 전통이다.

안타깝게 일제 강점기, 산업화 시대를 지나며 우리의 전통이 사라졌다. 엉뚱하게 유교 의례인 제사만 (왜곡되어) 남았다. 유교 제사는 전통이 아니다.

떡국, 공동체 정서의 흔적

프레시안 : 일본의 설 행사에서도 떡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음식문화박물지>에서 새해에 한국인이 떡국을 먹듯 일본에서도 국물에 찹쌀떡을 넣은 오조니를 먹고, 중국에서도 쌀로 만든 경단을 국물에 넣은 탕위앤을 먹는다고 했다. 왜 떡과 국인가?

황교익 : 떡국은 조작된 전통과 관련 없다. 우리 민족에게 의미 있는 음식이다. 민속적 가치, 공동체적 가치를 상징하는 음식이다. 제사는 안 지내도 되지만, 설날에 떡국은 먹었으면 한다.

신기하게 한중일 삼국이 공통적으로 설에 먹는 음식이 '국물에 넣은 떡'이다. 원래 떡은 국물에 넣어 먹지 않는다. 떡을 국물에 넣는 건 사실 맛있는 조리법이라고 하기 어렵다. 왜 새해에 이렇게 먹을까?

우리는 약 8000년 전부터 쌀농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곧바로 밥을 먹지는 않았다. 집집마다 솥을 둔 건 고려 중기의 일이다.

고려 이전 우리의 주식은 떡이었다. 떡을 집집마다 따로 만들어 먹었을까? 아니다. 공동체 단위로 먹었다. 청동기시대 유적지를 보면, 취사도구는 여러 집 중 큰 움막 하나에만 있다. 공동체가 불을 간수하고, 여러 끼니분의 쌀을 갈아 함께 떡을 만들어 나눠 먹었다.

떡을 놔두면 굳는다. 굳은 떡을 처리하는 방법이 국물과 함께 먹기다. 이게 한중일 사람의 삶에 여전히 남은 떡국의 유래다.

떡은 우리에게 아직 남은 공동체의 기억이다. 우리는 이사하면 떡을 돌린다. 집안 행사가 있어도 떡을 한다. 고려 중기 쌀밥의 시작은 마을 단위의 취식이 가족 단위 식사로 변화한 출발점이다.

나는 이런 상상도 해 본다. 요즘 한중일 삼국의 관계가 안 좋다. 동아시아 공동체 정신을 다지는 행사로 삼국 정상이 신년에 한 자리에 모여 각자의 떡국을 나눠 먹으면 좋지 않을까?

공화국 전통을 만들 때

프레시안 : 앞선 얘기를 되새겨 보면, 지금의 왜곡된 제사 문화에 급조된 양반의 허위의식이 잔존한다고 해석 가능하다. 여러 인터뷰에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반찬을 차리는 한정식 문화도 천박한 허위의식의 잔재라고 비판한 바 있다.

황교익 : 우리의 천박한 음식 문화는 계속 지적해야 한다. 이런 허위의식은 민주공화국 시민 의식의 작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 아직 신선로를 먹는다. 신선로는 궁중 음식이다. 신선로를 만드는 사람은 궁중음식 인간문화재로 지정된다. 왕이 먹던 음식을 공화국이 기념하는 셈이다.

신선로가 우리의 전통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조선에서 신선로를 먹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를 마치 대한민국의 대표 음식인양 보호하고, 외국에 알리려 한다. 천박하다. 우리는 왕을 죽인 공화국에 산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프레시안 : 과거 가공 된장, 가공 고추장을 비판한 바 있다. 우리는 대기업이 만든 '된장맛 소스', '고추장맛 소스'를 먹는다고 했다. 우리가 자본이 창조한 '한국 음식의 판타지'를 먹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황교익 : 문화는 항상 변화한다. 우리는 변화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지구화하면서 서양식, 일본식 음식 분류도 무의미해지고 있다. 한국 전통 음식의 형태도 당연히 변한다.

과일 주스도 전통일 수 있다. 하지만 '과일을 갈아 유리잔에 넣은 후, 빨대로 빨아 마시는 형태'가 전통으로 남는 게 아니다. '과일을 갈아 시원하게 마시려는 관습', '과일 음료가 건강에 좋다는 생각'이 전통이다. 형태에 집착하면 전통이 아니라 고착에 빠진다. '신선로의 형태가 전통이니 지켜야 한다'는 건 틀렸다. 이건 고착이다.

프레시안 : 된장찌개를 전통으로 지켜가자고 할 때 중요한 건 '된장맛 제품을 사용해 고추, 호박을 넣고 끓인 음식'이 아니라 '발효한 콩을 이용한 국물 음식'이라는 건가?

황교익 : 그렇다. 내가 대기업 된장 제품을 '된장맛 소스'로 칭한 이유는 발효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된장에서 중요한 건 삶은 콩 발효다. 특정한 맛, 특정한 형상이 중요하지 않다. 특정한 맛에 고착한다면, 긴 시간이 지나 우리의 후손은 콩도 들어가지 않고 발효도 되지 않은 어떤 것을 된장이라며 먹을지도 모른다.

'스댕 밥그릇', 낮은 외식 문화의 상징

프레시안 : 일본에서 라멘은 중요한 대중음식이다. 다양한 라멘을 소개하는 만화, 방송이 잇따르고, 라멘 비평도 활발하다. 각 가게는 주방장 개성을 담은 라멘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방송도 이를 조명한다. 이는 대중 음식 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한국에서는 짬뽕이 일본의 라멘처럼 발전할 가능성이 큰 음식 아닐까? 짬뽕은 어느새 중식당을 벗어나 독자적 발전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식의 틀을 벗어난 라멘의 발전 과정을 떠오르게 한다.

황교익 :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실제 요즘 짬뽕 전문점마다 조금씩 개성을 강화하는 모습이 발견된다.

짬뽕이 개성 있는 한국 대중음식으로 성장하려면 네 가지 분야에서 발전이 필요하다. 우선 육수의 차별화다. 닭 육수를 쓰는 가게, 해물 육수를 쓰는 가게 등이 각자 나름대로 분화해야 한다. 다음으로 안에 넣는 재료가 차별화되어야 한다. 해물을 쓸 것이냐, 돼지고기를 부각할 것이냐 등을 놓고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국물과 재료에 맞춰 면의 변화도 일어나야 한다. 산뜻한 국물에 가는 면을 쓸 것인가, 탕면을 써볼 것인가 등을 고민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게 그릇이다. 가게마다 개성 있는 식기를 선보여야 한다.

일본 라멘집의 개성을 살리는 요소의 하나가 그릇이다. 일본에 전국 라멘집을 기행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진행자는 라멘 한 그릇을 먹은 후, 그릇을 기념으로 선물 받는다. 그릇이 가게마다 다 다르니, 그릇이 곧 라멘을 상징할 수 있다.

프레시안 : 비단 짬뽕뿐만 아니라, 여전히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사용하는 한국 외식업계 대부분이 고민해야 할 일이다.

황교익 : 그렇다. (박정희 정부 시절 강제로 규격화한)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아직 쓴다는 건, 우리의 외식 문화 수준이 여전히 낮다는 증거다.

다시 짬뽕을 예로 들자. 육수와 부재료, 면, 그릇의 차별화가 각자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짬뽕을 먹으며 나눌 이야깃거리가 풍부해진다.

지금 우리가 짬뽕을 먹고 할 수 있는 품평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맵다 안 맵다, 면이 굵다 가늘다 수준이다. 그런데, 음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이보다 훨씬 크다. 음식에서 차별화 요소가 많을수록 식사를 통해 얻는 즐거움도 커진다.

짬뽕에서 더 적극적인 개성 찾기가 이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이 집은 가벼운 닭뼈 육수를 냈고, 그에 걸맞게 재료를 얇게 썰었군', '무거운 국물에 걸맞게 묵직한 색감의 그릇을 썼군'하며 품평할 수 있다. '이 집 주인장은 부재료로 여성성을 드러냈군', '이 집은 마초적 주인장에 걸맞게 재료를 큼직하게 썰고, 국물을 강하게 냈군'하며 품평할 수 있다. 품평거리가 풍성해지면, 그만큼 음식 문화가 발달한다.

▲ 혼밥족이 늘어났다. 황교익은 우리가 혼밥을 즐기도록 진화하지 않았다고 했다.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한 장면. ⓒtvN

혼밥하지 마라

프레시안 : 떡에서 밥의 시대로 접어들며 마을 공동체 식사에서 가족 단위 식사로 변화했다고 했다. 이제 가족 단위 식사 관습마저 무너지고 있다. 혼밥족이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먹방을 즐기는 시대다.

황교익 :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하며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혼밥, 혼술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요즘 많다. 개인 취향을 마치 사회 문제인양 말하는 건 불쾌하다는 사람도 많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혼밥, 혼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실 뿐이지, 이를 진정 즐기는 이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원래 함께 밥 먹게끔 진화했다. 우리 뇌 속에 거울 신경(mirror neuron)이 있다. 다른 포유류보다 인간 뇌에서 훨씬 발달한 신경이다. 거울 신경은 우리가 타인의 행동을 관찰할 때, 마치 나도 그 행동을 직접 행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끔 한다. 거울 신경으로 인해 우리는 타인의 감정도 그대로 복제해 느낀다. 남이 웃으면 나도 웃고, 남이 울면 나도 우는 이유다.

예술이 가능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배우가 울고 웃으면 우리도 울고 웃는다. 노래를 통해 음악가의 감정을 우리가 느끼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문학을 통해 작가의 감정이 독자에게 전이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과 공감하도록 진화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변의 수많은 사람과 감정을 교류한다. 이제는 (기술 발달로 인해) 지구촌 수준으로 감정을 교류한다.

감정의 교류가 가장 먼저 일어나는 순간이 밥을 함께 먹을 때다. 우리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시작하는 관계가 엄마의 젖을 먹으면서 형성되지 않나.

혼밥, 혼술의 성행은 우리 공동체의 감정 전이에 문제가 생겼음을 방증한다. 사람의 수백만 년 진화 역사에서 처음으로 거울 신경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혼밥, 혼술이 즐겁다'는 말을 외로움을 드러내기 힘들다는 신호로 여긴다. 우리는 그렇게 진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먹방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어쩔 수 없이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외로움을 달래려는 욕구에 매체가 반응했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황교익 : 그렇다. 밥은 다른 이와 함께 먹어야 맛있다. 그런데 혼자 먹으니 그럴 수 없다. 이런 이들이 TV나 인터넷 방송의 먹방을 본다.

혼밥, 혼술 문화가 뜨는 것과 연애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밥을 통해 형성되는 애착 관계가 극대화하는 경우가 연애다. 타인과 밥 먹기가 힘들 정도로 감정 교류가 쉽지 않은 이가 어떻게 연애할 수 있겠나?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났다. 혼자 밥 먹으면 음식을 먹으면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먹방을 '음식 포르노'라고 말하는 이유는, 나와 관계도 없는 연예인의 먹방을 보는 이가 가짜 쾌락을 얻게끔 하기 때문이다.

혼자 밥 먹는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모여야 한다. 모여서 술 마시고 밥 먹어라. 그 자리에서 떠들라.

프레시안 : 우리 음식 비평 문화가 척박할 때 사회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요즘 고민하는 주제가 있나?

황교익 : 음식을 먹을 때 함께 챙겨야 할 품격. 아무리 싸게, 대충 먹는다 하더라도 스테인리스 밥그릇의 밥은 먹지 말자는 이야기다.

우리가 어떤 밥상을 받느냐에 따라 느끼는 자존감도 다르다. 안타깝게 우리 대부분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때 밥을 먹으면서 자존감의 상실을 경험한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 밥을 어디에 주나? 식판에 준다. 물론 일본의 어린이집도 식판에 밥, 반찬, 국을 준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식판에 그대로 밥과 반찬을 퍼준다. 일본 어린이집은 식판에 그릇을 놓아준다. 밥그릇, 반찬그릇, 국그릇을 식판에 놓는다.

식판은 쟁반(tray)일뿐이지, 그릇이 아니다. 식판에 그대로 밥을 퍼준다는 건, 아이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나는 이해한다. 아무리 좋은 친환경 음식을 준다고 한들, 식판에 밥을 그대로 퍼주는 순간 그건 사료다. 인간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켜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식문화가 발전한다.

우리가 잘 사는 나라지만, 전반적인 외식 질은 형편없다. 서울 시민이 식당에서 사먹는 6000원, 7000원 짜리 밥의 질이 가격에 비해 형편없다. 같은 가격이면 지방에서 먹는 음식의 질이 좋다. 근본적 이유가 있다. 단순히 음식 재료, 음식 노동의 질 때문이 아니다. 집값 때문이다.

서울 식당의 음식 값이 비싼 이유는 땅값이 비싸기 때문이다. 강남 식당 음식이 비싼 이유는 상가 임대료가 높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좋은 음식을 더 싸게 먹으려면 집값이 내려가야 한다. 지금처럼 약탈적인 상가임대 상황에서 자영업자는 살아남을 수 없고, 식문화는 발전할 수 없다. 매출에 비례해 임대료를 내는 식으로 제도를 바꿀 순 없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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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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