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였다면 이번 학술행사도 큰 잡음 없이 순조롭게 이뤄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중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행사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논문 주제 및 발표 상의 단어 선택 등에 있어서 한껏 예민해진 중국의 심기를 최대한 맞출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갈등이 민간교류에까지 영향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번 학술포럼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토론의 장이었다. 때마침 중국 국영방송인 CCTV 에서 <2016년의 회고와 2017년 전망>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는데, 그 주제 또한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과 관련된 내용이다. 2016년을 회고함에 있어 그 핵심이 일대일로 정책이라는 것은 그만큼 중국 정부가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내년에도 일대일로 전략은 중국 정부의 핵심 정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을 둘러싼 현재의 국제정세를 고려해 보면, 그 여정이 결코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시장경제국 지위 놓고 벌이는 중국과 미국의 기 싸움
우선 미국 및 유럽연합(EU) 등 국가들의 중국 견제 공세가 거세졌다. 올해로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지 만 15년이 됐다. 2001년 가입 당시 15년 간 '비시장경제국가' 지위를 유지한다는 조건의 만기가 도래한 것이다. 15년간 중국은 '시장경제국가(MES)'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줄곧 WTO 회원국들로부터 반덤핑 제소를 당하면서, '덤핑국가'라는 낙인이 찍혔다.
중국은 2017년부터는 자연스럽게 시장경제국 지위를 얻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EU, 미국, 일본 등이 이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이에 중국이 강력한 자세로 대응하면서 국제 무역에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은 중국의 시장경제국가 지위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미국과 일본 등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비시장경제국 지위를 이용한 반덤핑 제소가 중국산 저가제품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이러한 수단이 사라지게 되면 자국 산업에 대한 보호가 힘들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에 이를 쉽게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트럼프가 보호무역주의를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어 중국에 대한 시장경제국 지위가 인정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편, 시장경제국 지위 인정 거부는 일대일로 전략을 통해 새로운 국제무역 질서를 재편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견제 수단이기도 하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은 유럽, 아시아 경제를 하나로 잇는 거대 경제 일체화 정책이다. 중국은 WTO와 FTA가 이끌어 가던 세계 경제통합에 있어 새로운 형태의 세력을 형성해 가고 있다. 이를 중국과 패권경쟁 중인 미국이 팔짱 끼고 지켜만 보고 있을리 만무하다.
일대일로 핵심 전략이 WTO 체제 하에서 여러 방면에서 분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이를 활용한 미국의 중국 견제는 계속될 것이다. 일대일로 정책의 핵심은 일대일로 선상에 있는 56여 개 국가와 지역무역협정(RTA, Regional Trade Agreement)를 체결하고 자유무역지대를 건설하며 각 국가 간 무역편리화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WTO 회원국으로서 중국이 일대일로 지역에 있는 국가들과 체결하고자 하는 지역무역협정이 과연 전면적 개방을 전제로 하고 있는 WTO 규범에 따라 인정이 가능한지 여부다. 일대일로 선상의 국가들 중에는 WTO 회원국이 아닌 경우가 적지 않고, 때문에 국가 자체가 개방화 정도가 매우 낮다. 중국과의 지역무역협정을 체결한다고 해도 국가 간 개방 수준을 단숨에 높이기는 쉽지 않다. 이를 근거로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견제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발톱을 드러내는 중국
이러한 미국의 견제에 중국은 매우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중국 상무부는 중국의 비시장경국 지위 유지 기간이 만료되는 12월 11일 이후 중국에 대해 시장경제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 '중국의 법적 권리와 WTO 규정을 지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 선언했다. 아울러 중국 관영신문인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미국이나 일본 등의 국가가 중국의 시장경제국 지위 인정 여부를 결정할 권리는 없다고 비판했다.
이는 시장경제국 지위 인정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 간 힘겨루기에서 중국이 이제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춰 밖으로 새지 않도록 하면서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에서 벗어났음을 선언했다고 볼 수 있다. 30년이 넘도록 갈고 닦은 자신의 힘을 이제는 숨기지 않고, 필요하다면 행사하겠다는 의미로 비춰진다. 다만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중국의 숨겨진 발톱에 가장 먼저 긁히는 것이 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점점 강도가 더해지고 있는 무역보복 조치들만 봐도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한한령(限韩令)·금한령(禁韩令)을 통해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무역 보복 조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중국에 진출해 있는 롯데그룹에 대한 전면조사가 실시되었고, LG화학, 삼성SDI의 전기차 배터리 인증이 지연되고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뿐만 아니다. 한국행 단체관광객 축소와 한국 연예인의 출연 금지, 드라마 및 예능 프로그램 방영 제한 등 비관세장벽을 통한 무역장벽 조치들을 전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 간 힘겨루기에 중국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 우리 기업들이 곤혹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시장경제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미국을 향해 정치 문제를 무역 장벽의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우리에 대해 정치 문제를 무역 장벽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에 한국 내에서도 중국에 대한 시장경제국 지위 인정을 취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시장경제체제는 기업의 활동이 보편적 국제규범을 따르며, 개별 국가의 정치·군사적 고려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중국은 WTO 체제하에서 시장경제국 지위를 인정받고자 하면서, 한편으로 중국 최대 무역 상대국인 한국을 대상으로 정치적 갈등에 대해 경제적 보복 수단을 선택하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조치가 과연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국 정부가 발표하는 문건에 보면 '빠오롱(包容)·허씨에(和谐)'라는 단어가 항상 등장한다. 경제성장과 개발에 있어 포용과 화합이 바탕이 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중요한 단어이다. 중국이 '일대일로'라는 거대 정책을 통해 새로운 국제무역질서를 주도하고자 한다면 숨겨놓은 발톱을 드러낼 것이 아니라 포용과 화합이라는 기본원칙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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