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민주화' 담론을 비판한다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노동자의 90%가 '87년 체제'의 혜택 못 누려

노동의 관점에서 바라본 '87년 체제'의 한계는 헌법에 명시된 노동 3권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충분히 보장하고 실현하지 못한 데 있다. 최장집 교수의 글을 빌리면, "산업적 권리(industrial rights)를 시민권, 정치권, 사회권을 중심으로 한 일반적 시민권(citizenship) 개념에 포함시키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최 교수에 따르면, 산업적 시민권이란 "결사체로서의 노조를 조직할 수 있는 권리, 사용자와 평등하게 교섭할 수 있는 노동자·노조의 권리, 기업과 작업현장에서 사용자와 노조가 대화하고 교섭하듯 전국 수준에서도 노조가 상호 인정과 존중을 통해 사용자 단체와 교섭할 수 있는 권리, 노동시장의 임금에 관한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권리, 노조가 노동자들의 권익과 의사를 대표하고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노동 3권이 부정된 '87년 체제'

백낙청 교수는 현 정세의 특징을 "헌법 수호 운동"으로 규정하고, "현행 헌법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의 호헌이 아니라 헌법 제1조 등 민주공화국의 골격을 지켜내자는 것으로 앞으로 실현할 개헌과는 별도로 헌법이 안 지켜지던 나라를 헌법이 지켜지는 나라로 바꾸는 한층 본질적인 혁명"으로 분석했다.

백 교수는 헌법이 지켜지지 않은 이유는 한국전쟁 이후 정전협정체제 아래 분단이 고착되면서 북한과 대치하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여 기본권 조항의 효력이 정지될 수 있다는 '관행'이 일종의 '이면 헌법'으로 존재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뿌리며 87년 체제의 태생적 한계로 남아 낡은 부패세력의 대대적 반격을 허용한 것"이다.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를 제한하거나 인정하지 아니할 수 있다"는 문구로 상징되는 '이면 헌법'의 대표적 사례가 노동 3권이다.

ⓒ프레시안

노동자의 90%는 '결사의 자유' 못 누려


노동 3권에서 가장 기초적 권리는 단결권, 결사의 자유(freedom of association)다. 안타깝게도 민주주의의 시작인 결사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노동자가 너무 많다.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거나 못한 노동자 비율이 90%에 달한다. 입법부의 반노동 입법, 행정부의 반노동 정책, 사법부의 반노동 판결이 가장 큰 이유다. 노동자의 '산업적 시민권'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사용자의 전투성(militancy)도 문제다. 덧붙여 노동운동 자체의 부족함, 특히 자기 만족적인(complacent) 전략과 전술도 지적되어야 한다.

노동자 권리와 이익의 헌장인 단체협약에서조차 결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조합원 가입 범위 조항이 그것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할 노동조합 스스로 노동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수치스러운 조항을 없애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 이 문제는 기업별 노조주의의 청산 및 산업별 노조 건설과 연결된다.

'기업별 노조주의', 대다수 노동자를 배제한 87년 체제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기존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새로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가 충분히 실현될 때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 문제도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사업장 밖으로의 단체협약 효력 확장 제도가 유명무실한 우리나라에서 (기업별 단체협약의 사업장 내 구속력을 고려하더라도)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 비율은 많이 잡아야 12% 안팎이다.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더라도 단체협약을 짓밟는 사용자가 적지 않음을 고려하면, 단체협약 적용률은 노조 조직률 10%에 못 미칠 수도 있다. 이러한 한국적 상황에서 단체협약 적용률 제고는 노조 조직률 제고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단체협약의 양도 문제지만, 질도 문제다. 질의 문제는 단체교섭의 대상 및 수준과 관련되어 있다. 이익(interests) 사안은 교섭 대상이 되는데, 권리(rights) 사안은 교섭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익 개선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권리 보장을 부정하는 희한한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특히 노동조합을 통해 구현되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권리(collective rights)에 대한 정부와 사용자의 합작 공세가 거세다. 단체교섭의 역사성, 즉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이익을 개선하기 위한 평화적 수단으로서의 단체협약이라는 현대 사회의 상식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널리 퍼져 있다.

기업별 노조주의를 뛰어넘은 산업 수준의 교섭은 원천봉쇄당하고 있다. 산업 수준의 단체교섭을 가로막는 법률을 폐지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형태가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듯, 단체교섭의 형태도 노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다. 단체교섭의 의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기업과 산업 등 어느 수준에서 단체교섭을 할 것인가는 법률을 통한 개입 대상이 아니라 노사관계의 영역에서 자치적으로 결정할 문제다.

노동 3권은 민주주의 지속가능성의 엔진

갈기갈기 찢겨 걸레가 되어버린 단체행동권도 회복해야 한다. 헌법에 없는 사용자의 직장폐쇄권이 헌법상 권리인 단체행동권과 대등한 지위로 격상되어 무차별 행사되고 있다.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대체근로가 횡행하고 있다. 공공부문의 단체행동권은 "필수유지업무"라는 반헌법적 제도로 인해 사실상 부정되고 있다. 무엇보다 파업의 절차와 진행에서 국가와 자본의 부당한 개입과 방해가 폭넓게 허용되고 있다. 단체행동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면 단체교섭권은 물론 단결권, 즉 결사의 자유도 제대로 설 수 없다.

노동 3권은 서로 유기적으로 교차하면서 꼭짓점을 이루며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이라는 삼각형을 지탱하고 있다. 어느 하나에 문제가 생기면 삼각형 자체가 바로 설 수 없다. 노동 3권 없는 경제민주화는 내용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기에 경제민주화 자체의 지속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김대중-노무현 자유주의 정권 10년이 민주주의 강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극우 파시즘 체제로 퇴행한 근본 이유다.

노동자의 90%가 '87년 체제'의 혜택 못 누려

2017년.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30년이 흘렀다. '87년 체제'의 결정적 결함은 1987년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이 하위 법률에서 부정되면서 훼손, 변질, 왜곡된 데 있다. 그 결과, 90%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87년 체제'가 구축한 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결사체로 단결하여 단체로 교섭하고 행동하는 경험을 통해 민주주의를 신뢰하고 지지하는 계급(class)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개별화되고 파편화된 무기력하고 초라한 일개 '시민(citizen)'으로 전락했다.

스스로를 지탱할 사회경제적 세력을 갖지 못한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할 수 없었다. 이것이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이 민주주의를 굳히는 데 실패한 이유다.

김누리 교수는 '촛불' 정세를 두고 "광장 민주주의가 현장 민주주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면서 "광장에서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지극히 비민주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현실을 지적했다.

"광장 민주주의와 현장 민주주의가 비대칭적으로 여전히 괴리"되어 있는 상황에서 일터, 학교, 가정이라는 후방이 '촛불 시위'의 전방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민주주의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노동 3권, 사회 통합과 경제 위기 극복의 출발점

2017년 새해는 격변기가 될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진로를 둘러싼 사회 계급들의 투쟁이 한층 격렬해질 것이다. 경제 상황이 어려운 가운데 전개될 정치적 갈등은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이럴수록 총체적 혼란을 극복할 실마리를 노동3권의 회복과 실현에서 찾아야 한다.

이를 최장집 교수는 "조직노동자들과 그들의 운동을 민주적 가치와 규범, 그리고 제도 속으로 포용"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국민의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가 민주주의의 수혜자가 되고, 이를 통해 경제민주화가 추진 동력을 얻게 될 때, 정치적 민주주의는 정상적 궤도에 올라 지속가능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노동 3권의 온전한 실현을 통한 '산업적 시민권'의 회복은 2017년 경제 위기 상황에서 사회 통합을 유지하면서 한국 사회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가장 유력한 방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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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택시노련 기획교선 간사,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무국장, 민주노동당 국제담당, 천영세 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 근로기준법을 일터에 실현하고 노동자가 기업 경영과 정치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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