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타기, 승마처럼 여가 활동 될 수도…

[건축신문] 도시, 걷다·③ 카제테리언의 상상

과잉 사회에 적응

나는 '카제테리언(Car-getarian)'이다. 이 생소한 단어가 무슨 뜻인지 검색할 필요는 없다. 자동차와 채식주의자를 의미하는 두 문 단어를 합성한, 내가 방금 만든 '콩글리시' 단어이기 때문이다. 자가용, TV, 스마트폰 또는 신용카드 등 문명사회가 주는 혜택을 당연시하지 않는 약간 유별난 사람들이 공유하는 느슨한 연대감에서 발상한 신조어 정도라고 하자. 가진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결핍을 통한 또 다른 향유를 통해 개인 성향이 드러나는 것은, 역설적으로 과잉된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지 않은가. 나는 마치 러다이트(Luddite)처럼 과격하게 기계를 혐오하는 이도 아니고, 자가용 없이는 살아도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자동차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다(만약 자동차와 전혀 상관없이 살겠다는 극단적인 이들이 존재한다면 '카비건(Car-vegan)' 정도로 부르면 좋을 듯하다). 나는 서울에 지천으로 깔린, 미안할 정도로 저렴한 택시를 일주일에 10번은 타고 살며, 친절한 지인들의 자가용을 곧잘 얻어 타기도 한다. 2016년 현재 27년째 면허를 가지고 있지만, 운전은 물론 평생 자가용을 소유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어느 날 갑자기 대오각성하고 내린 결정이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다양한 장소에 적응하며 살아온 행적의 결과일 뿐이다. 이 글을 이동성에 관한 나의 구체적인 경험과 발견에 관한 다소 파편적인 소사(小思) 정도로 여겨주시면 좋겠다.

ⓒ서울시

카제테리언으로서 여정

맨해튼

카제테리언으로서 나의 여정은 80년대 말,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생활에 필수라고 생각해서 면허를 땄다가, 하필 그 나라에서는 예외적으로 자가용을 가진 이들이 소수에 속하는 맨해튼에서 살게 된 것이다. 20세기에 로버트 모세스(Robert Moses)1)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천적이었던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2)도 존재했던 도시 말이다. 현재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사회적 자본으로써의 보행 친화적 미덕은 제이콥스의 '고속도로 반란(Freeway Revolts)'3)과 같은 시민투쟁의 결과물이다. 이곳을 현재 자동차 체계로 초토화된 고도 모스크바 중심지와 비교해 보면 더 명백해진다. 최근 모스크바에서도 회복의 조짐이 일부 보이긴 하지만.

로테르담

이후 3년, 자전거 수가 사람 수보다 많다는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거주했다. 이곳에서 하나의 도로 표면 위에 다양한 속도의 이동 수단이 공존하는 도시 체계의 구성 방식과 정교한 교통 안무 기술(여기서는 자동차, 자전거만이 아니고 전차까지 포함한다), 이에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도로 위에서의 예절이 한 국가의 고유한 문화로 정착된 것을 생활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그들의 자전거 생활 문화는 20세기 중반 대대적인 자동차 보급으로 위협을 받았지만,(이 기간에 많은 어린이들과 자전거 이용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공존을 위한 오랜 타협 과정을 거쳐 초등학교부터 시행되는 도로사용 방식 및 교통예절 교육으로 새로운 의식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지금 그들이 공공 공간에서 향유하는 독특한 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서울

21세기 초, 청계천 복원 공사가 시작될 즈음 외지 생활 14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은 잘살게 된 대가로 물을 돈 주고 사서 마시는 곳이 되어 있었고, 도로는 한층 더 영화 <매드맥스>(조지 밀러 감독, 2015)처럼 변해 있었다. 첨단 엔터테인먼트 장비가 장착된 안락한 자동차 안이라 해도 출퇴근을 위해 '분노의 도로'에서 하루 한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집에서 그 시간에 두 다리 뻗고 자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는 지극히 실용적인 생각에서, 직장은 15분 도보 거리 이내라는 직주근접 원칙으로 살아왔다. (솔직히 말하면 사무실을 개업하고 경제적인 이유로 첫 6개월은 사무실에서 숙식하며 '직주일치'로 살다가 형편이 나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직주근접으로 전환하게 된 거다.) 20세기 산물인 거대도시 생존 매뉴얼 1조로 자동차 이전의 19세기 마을에 사는 방식을 택했던 또 다른 이유가 직업상 국내외의 낯선 곳으로 많이 돌아다니는 생활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직관적으로 취한 삶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속도를 최소화하고, 19세기와 21세기 속도를 '7온 8냉'처럼 보완적으로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비밀처럼 나만 수행하는 방식인 줄 알았으나, 지금은 서울을 비롯한 전 지구 도처에 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는 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아직 큰 불편이나 불만은 없다.

캘커타(콜카타)

서울 중심에 철거할 만한 고가도로가 몇 개 남지 않은 몇 년 전, 친환경 건축회의에 참여 차 인도의 캘커타를 방문했다. 거기서 무시무시하게 건설되고 있는 여러 고가도로를 목격하면서, 그곳 건축가들에게 서울이 산업화 시기에 자행한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선험자(先驗者)로서 조금 잘난 척하며 조언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그들이 솔직히 귀띔해 준 대답은, 도로보다 고가도로 건설비용이 최소 10배는 더 들고 이에 비례해 상응하는 부패 행위에 관련된 금액도 커지기 때문이지, 바깥세상 모르는 바보여서 하는 짓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시간차를 가지며 반복되어야만 하는 범지구적 습속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부탄과 같은 예외의 곳도 있다고는 하지만.

오슬로

비슷한 시기에 방문한 노르웨이 오슬로는 철저한 보행자 위주의 도로문화를 지닌 도시다. 그곳에서 만난 옛 친구가 그의 아이들이 좌우를 살피지 않고 자동차 도로를 건너는 모습을 태연하게 방치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마치 초현실적인 장면을 목격한 듯 경악하는 동시에 한없는 부러움을 느꼈다. 당시 한국이 OECD 국가 중 각종 보행자, 어린이 등 교통사고 사망률로 부동의 1위를 장악하던 (OECD 평균의 약 3배) 때다. 지금도 큰 차이는 없다.

브라질리아

최근에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 다녀왔다. 루시우 코스타(Lúcio Costa)가 보름 만에 구상했다는 이 유토피아의 도시는 오스카르 니에마이어(Oscar Niemeyer)가 설계한 기념비적인 건축물 못지않게, 신호대기 없이 자동차가 도시 곳곳을 누비고 다닐 수 있도록 정교하게 체계화된 클로버형의 교차로를 또 다른 기념비로 자랑스러워하는 곳이다. 도시미학적으로 보행자 경험에 관해서는 베니스가 으뜸이라면, 자동차를 통한 경험에 관해서는 단연 브라질리아가 독보적이었다. 불과 반세기 정도 된 도시가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이해가 갔다. 대다수 도시와는 반대로 자동차의 20세기를 상징하는 이 젊은 도시가 통째로 박제화될 위험을 수반하는 유네스코의 저주(?)를 극복하고, 어떻게 21세기의 요구에 부응하는 도시가 될 것인가는 그들만의 유별난 도전이 되어버렸다. 현재 이곳도 일주일에 주말 하루는 차선 하나를 자전거 전용으로 사용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자동차로 인해 전 지구가 도시 체계와 규모의 급변을 겪었다. 그리고 여전히 각 도시의 고유한 물리적 구성이나 역사, 정치·경제적 상황, 사회·문화적 특성, 윤리의식의 정도 등의 변수에 의해 다양한 시차와 시행착오의 궤적을 그리며 진행 중이다. 지난 20년간 인구 정체 상태를 겪으며 양적 팽창의 강박에서 벗어난 서울로서는 도시의 이동성을 총체적으로 재고해 볼 좋은 때이다.

이미 신사동 가로수길을 기점으로 급속히 보행환경의 '맨해튼화'가 진행 중이며 자전거 이용 면에서 서울만 아니라 인천 송도신도시, 심지어는 4대강까지 국토 전체가 경쟁적으로 '네덜란드화' 되어 가고 있다. 나로서는 반가운 한편, 의구심을 가지고 그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발 빠른 물리적 인프라 재정비 능력에 반해 이동성에 관한 의식, 문화적 성숙도에서는 아직 캘커타와 오슬로 사이의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베니스와 브라질리아의 두 극단으로 대조되는 총체성 사이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이동성에 관한 도시 정체성이 가까운 시기에 서울의 고유한 모습으로 투영되기를 바라본다.

▲ 걷기 편한 행복거리를 완성하는 '인도 10계명'. ⓒ서울시

서울 이동성의 현주소

자동차 의존도를 낮춘 결과 생기는 건강, 시간, 환경적 이득은 너무나 잘 계몽된 사실이다. 나아가 현 지구는 매년 교통사고로 인해 희생되는 사망자가 살인이나 전쟁에 의한 사망자를 합한 수보다 3배가 많다는 사실은(2013년 세계건강기구의 도로 안전에 관한 보고서 통계 자료에 근거) 문명사회의 필요악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용납하기 힘든 숫자다. 일상에서 자동차를 통한 비자발적, 부주의에 의한 인명 희생이 의도적인 인명 살상 행위보다 세 배나 많다는 의미이다. 한국은 안타깝게도 이 분야에서 선두를 지키고 있다. 인공지능 무인 자동차가 주도하는 용감한 신세계에 대해서는 아직 조마조마한 시선을 거둘 수 없지만, 어떤 주체가 어떤 속도로 이동성을 책임지는가에 관한 문제는 이미 지구 곳곳에서 구체적이고 다양한 실험과 고민이 진행 중이다.

가까운 미래의 서울 시민이 현재를 돌아다보며, '그 시절에는 모두 각기 자가용이라는 것을 집집이 두고 살던 시절이 있었지.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관리 비용도 만만치 않았던 기계를'이라며 기이하게 생각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과거에 생활 수단으로 필요했던 말타기가 지금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존속시키는 스포츠인 승마가 된 것처럼, 자동차 운전은 일상의 필수 요소가 아닌 여가 활동이 될지도 모른다. 자동차는 계속해서 존재하겠지만, 다른 모습으로 공유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현재 서울의 광대한 면적을 차지하는 주차장을 생소한 과거의 유적처럼 바라보며 지혜로운 활용 방안을 고민하게 될 것도 같다. 물론 엄청난 경제적 이득 이상의 사회적 자본이 생겨나는 것은 덤이다.

각주

1) 로버트 모세스 :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뉴욕을 차 중심으로 리모델링한 도시계획자. 맨해튼과 브롱크스를 가로질러 미 동부의 교통망을 총체적으로 뒤바꾸었다. 간선도로, 고속도로, 교량과 크고 작은 공공건물과 구획단지 프로젝트를 실시해 거대블록으로서의 뉴욕을 정비했다. 도시디자인의 혁명을 주장한 그로 인해 저소득층 거주지를 쉽게 슬럼이라 규정짓고 작은 집과 골목에 사는 이들을 쫓아냈다.

2) 제인 제이콥스 : 1950년대부터 당시 뉴욕에도 활발하지 못했던 도시 시민운동에 불을 지핀 건축평론가. 대도시의 양극화와 공공임대주택의 비인간성을 두고 거대 도시정책을 비판하다. 실제로 그녀는 대중들의 대변자로서 시민활동을 펼쳤고, 이로 인해 뉴욕의 소호와 그리니치빌리지를 지나가려던 모세스의 맨해튼 고속도로 계획은 중단되었다. "모든 도시계획은 이웃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오늘날에도 재인용되고 있다.

3) 고속도로 반란(Freeway Revolts) : 1960,70년대부터 자동차 중심의 인프라 확장에 반대한 당시 선진국을 중심으로 발생한 운동. 이로 인해 실제로 새로운 고속도로 건설이 다수 폐기되거나 규모가 축소되었다. 폐기된 자리는 공원이나 근린지구가 되었고, 서울에서는 청계천의 고가도로가 철거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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