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에서는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석연찮은 이유로 탄핵받았고, 영국에서는 선출된 지 1년도 안 된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의원단 다수의 불신임을 받는 바람에 때 아닌 대표 선거가 있었다. 호세프 대통령은 결국 물러나게 됐지만, 코빈 대표는 1년 전 선거보다 더 높은 득표율로 다시 대표에 당선돼 쿠데타를 진압했다.
그런데 영국 노동당 내 쿠데타의 판박이라 할 만한 사건이 스페인에서도 일어났다. 9월 29일 '스페인의 노동당' 격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이하 '사회노동당')에서 집행위원회 다수가 집단 사퇴하며 페드로 산체스 사무총장(실질적인 대표)의 사퇴를 압박했다. 산체스는 사퇴를 거부하면서 3주 뒤에 당직 선거를 실시해 당원으로부터 심판받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당은 삽시간에 사무총장 지지파와 집행위원회 다수 지지파로 쪼개졌다.
1972년생인 산체스가 사무총장으로 당선되던 2014년에만 해도 그는 포데모스 바람에 맞서 사회노동당을 지킬 총아였다. 그러나 2년 만에 그는 당 상층부의 미움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 됐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스페인 사회노동당을 뒤흔든 당 내 쿠데타
스페인은 작년(2015년) 12월에 총선을 치르고 올해 6월에 선거를 또 했지만 아직까지도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같았으면 양대 정당인 인민당(우파)과 사회노동당 중 어느 한 쪽이 과반수가 됐을 텐데 그렇지 못했던 데다 어느 정당도 연립 정부 파트너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대 정당이 독점하던 정치 공간에 포데모스, 시민당 등 신생 정치 세력이 진출해서 다당 구도가 된 탓이다. 이들 신진 세력은 경제 위기와 정치권 부패 추문, '분노한 자들' 운동 등 사회적 격변을 연료 삼아 급성장했다.
양대 정당 가운데 좀 더 위기감을 느끼는 쪽은 사회노동당이다. 인민당은 정작 부패 사건의 주범인데도 사회노동당보다는 잘 버티고 있다. 2011년 총선 득표율 45.0%가 작년 총선에서는 28.7%로 곤두박질치기는 했지만 올해 선거에서는 33.0%로 조금 늘었다. 게다가 제1당 지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우파 정치 공간에서 인민당의 아성에 도전하는 시민당의 기세가 포데모스만큼 강력하지는 못한 게 주된 이유 중 하나다.
반면 사회노동당의 상황은 더욱 나빠지기만 하고 있다. 젊은 얼굴 산체스를 내세우고도 총선에서 연거푸 2위를 했다. 여당인 인민당이 긴축 정책과 부패로 사면초가 신세였는데도 말이다. 3위인 포데모스와 득표율 차이는 1~2%밖에 되지 않았다. 양대 정당 가운데 하나가 집권 중에 인기를 잃으면 다른 한 쪽이 반사 이익을 얻어 집권한다는, 1970년대 민주화 이후의 공식이 처음으로 깨진 것이다.
상황이 나빠질수록 사회노동당 안의 의견은 양분됐다. 한 쪽은 인민당과 대연정을 하거나 인민당 소수 정부 출범을 묵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수의 당 간부와 직업 정치인들이 이런 입장이다. 이들은 10월 말까지 정부를 구성하지 못해서 세 번째 총선을 치렀다가는 사회노동당 지지율이 더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 제3당으로 밀려나는 꼴을 보느니 인민당 집권이 낫다는 것이다. 실제로 9월에 실시된 갈리시아 주와 바스크 주의 지방 선거에서 사회노동당은 포데모스에 득표 순위가 밀렸다.
반면 당원 다수의 정서는 다르다. '좌파'인 사회노동당이 '우파' 정부, 그것도 부패의 온상인 인민당의 집권을 도와줄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산체스 사무총장은 본래 당 내 우파 출신이지만, 이번에는 이런 당원 정서를 대변하고 나섰다. 인민당 집권을 막으려면 길은 하나밖에 없다. 사회노동당이 우니도스 포데모스(포데모스와 공산당 등의 선거 연합)에다 카탈루냐 분리독립파(좌파 성향이다)까지 포함시켜 좌파 연정을 구성해야 한다.
산체스는 여기에서 총리가 될 길을 찾았을지 모르지만, 이는 당 고참 지도자들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방안이다. 이 결정을 하는 순간, 사회노동당은 이제까지 밟아온 경로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인민당과 함께 민주화 이후 스페인 체제의 기둥 구실을 하던 당에서 우파와 대결하며 사회 변화를 책임지는 당으로 변신해야 한다. 산체스와 달리 사회노동당 상층부 다수는 이런 변신을 감내할 생각이 없다.
민주화 과정에서 사회노동당을 이끌었고 14년간 총리를 역임한 펠리페 곤잘레스가 포문을 열었다. 당 내 쿠데타가 벌어지기 이틀 전에 곤잘레스는 산체스가 6월 총선 직후에는 인민당 집권을 받아들이겠다고 당 원로들에게 약속해 놓고는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한다고 공격했다. 곤잘레스는 "당이 아니라 국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며 인민당 재집권을 지지했다.
이것이 공격 나팔 신호가 됐다. 곧바로 집행위원회 다수가 산체스 사무총장 퇴진을 요구하며 반란에 돌입했다. 산체스는 당원들의 지지를 호소하며 일단 버텼지만, 코빈과는 달리 그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9월 30일에 열린 연방위원회(한국 정당의 전국위원회에 해당)에서 10월에 사무총장 선거를 실시하자는 산체스의 제안은 132 대 107로 부결됐다. 산체스는 곧바로 사임을 발표했다.
쿠데타의 성공이었다. 이로써 지난 여름 영국 노동당을 달구었던 내전이 사회노동당에서 반복될 일은 없게 됐다. 더불어 세 번째 총선 없이 인민당 정부(사실상 사회노동당과의 거국 정부)가 들어서는 게 거의 기정사실이 됐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위기는 신자유주의 중심 연합의 위기
비록 결말은 달랐지만, 영국과 스페인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에서 최근 벌어진 일에는 분명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당원과 열성 지지자들은 금융 위기 이후 정세에 맞춰 당 노선의 일대 전환을 요구했다. 코빈은 이런 목소리를 대변해 기적처럼 당 대표가 됐고, 심지어는 온건파 성향인 산체스도 여기에 동참하려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당의 주인 노릇을 해온 고참 정치인과 간부들은 노선 전환에 완강히 반대하고 있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당 내 쿠데타까지 감행하면서 말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기존 주류가 이토록 사생결단으로 새 노선의 등장을 막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당 내 기득권 세력의 수구 성향이나 권력욕 때문일까? 물론 이런 요인도 있겠지만, 더 깊숙이 바라봐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저변에서 전개되는 시대의 꿈틀거림을 감지해야 한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사회가 벌이는 가면극이다. 선거를 통해 대중의 인정을 받은 정치 세력의 언행 중 어느 하나도 다양한 사회 세력들의 움직임과 동떨어진 게 없다. 신진 세력에 맞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내 구 주류에게도 당연히 그러한 사회적 토대가 있다.
지난 30여 년간 유럽 각국의 중도 우파 정당과 중도 좌파 정당은 신자유주의 금융화를 어떤 식으로든 지지하고 이에 동참하는 사회 집단 및 세력들의 동맹을 구축했다. 그 중심에는 물론 흔히 '1%'라 불리는 지배층이 있다.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지배가 불가능하다. 부동산 시장에 참여한 중간층이나 제한된 노사 타협을 통해 상대적 안정을 지켜낸 일부 조직 노동까지 포섭해서 그야말로 '대중적'인 연합을 구축해야 했다. 편의상 이를 '신자유주의 중심 연합'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신자유주의 '중심' 연합을 구축하는 데 함께 하면서 역으로 이 '중심' 연합을 대변하는 데서 정치적 역할을 찾은 것이 바로 '중도' 좌우파 정당들이다. 역사적 배경이 좌파냐 우파냐에 따라 강조점과 역할에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목표는 동일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중심 연합의 안정적인 지속이었다.
가령 영국 노동당은 '제3의 길' 시절에 철저히 런던 금융 엘리트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면서도 소선거구제와 '노동'당이라는 당명에 힘입어서 선거 때마다 노동 대중의 표를 빨아들일 수 있었다. 노동당을 지지한 노동자 표는 이들의 실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신자유주의 중심 연합이 건재함을 보여주는 지표로 계산됐다. 이런 식으로 노동당은 이 중심 연합의 지속에 기여했다.
그런데 금융 위기가 닥쳤다. 긴축 정책이 실시됐고, (부유층이 아니라) 서민들 사이에서만 경제 침체가 지속됐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자체는 별로 흔들리지 않았지만, 이를 지탱하던 사회적 토대에는 선명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이 균열을 정치적 실체로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신자유주의 중심 연합의 균열을 더욱 확대해서 결국 해체하고 새로운 중심 연합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들이 나타난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는 아직 맹아 상태이지만, 몇몇 나라에서는 세력화에 성공했다.
나라마다 방식은 다르다. 불완전하지만 어쨌든 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인 스페인에서는 정당을 새로 만들어(포데모스) 사회노동당과 경쟁했고, 소선거구제인 영국에서는 노동당 안에서 코빈 의원을 중심으로 새 흐름을 형성했다. 어쨌든 두 경우 다 신자유주의 중심 연합에 맞선 도전 연합의 부상이었다.
도전 연합은 대개 청년층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노동 세력이 점차 결합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다. 도전 연합이 내거는 요구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주류가 내버린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적 성과, 즉 사회 국가의 건설 혹은 재건, 강화다. 동시에 이들은 이런 요구를 기존 대의 기구와 관료 체계 일변도였던 구 사회민주주의의 정치 형식을 넘어서는 참여, 자치 민주주의를 통해 관철해가려 한다.
사회민주주의 정당 내 구 주류의 난동은 이러한 도전 연합에 동참하길 거부하고 기존 중심 연합을 지키려는 몸부림이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중심 연합을 대변하며 누리던 기득권을 차마 버릴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중심 연합의 구축이 승리를 보장할 수 없는 험난한 투쟁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심점'의 좌표를 이동시키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경기를 일으키는 '극단적 중도파(Extreme Centre)'의 행태를 보인다.
말하자면 최근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신자유주의 중심 연합의 균열과 도전 연합의 등장, 이에 맞선 기존 중심 연합의 완강한 저항이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드라마는 이제 막 시작 단계다. 도전 연합을 꾸리는 게 어려운 일이라면, 이를 탈신자유주의 중심 연합으로 키우는 것은 배로 더 힘든 일이다.
코빈의 노동당은 총선에서 자력으로 승리하든가 스코틀랜드민족당 등과 연합 전선을 결성한다는 쉽지 않은 과업을 성사시켜야 하고, 포데모스는 위기의 사회노동당을 제치거나 아니면 그 일부 세력을 끌어들여 좌파 제1당으로 부상해야 한다. 더구나 그리스 시리자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제1당이 되거나 집권하는 것조차도 단지 제1막을 끝내는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도전 연합이 모습을 갖출 수 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세계사의 국면이 바뀌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게 유럽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정치 지형은 다르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신자유주의 중심 연합을 지속시키려는 노력이 중도 좌우파 정당들 사이의 합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정당 내에서 이 합의를 고수하려는 기존 주류의 난동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한국에서 이는 대통령 선거의 이른바 '중원' 경쟁으로 전개되는 중이다.
2012년 대선에서는 그나마 '복지'나 '경제 민주화'가 쟁점이 됐다. 그러나 내년(2017년) 대선을 앞두고는 주요 정당들이 모두 '중간층' 획득 전략에 몰두하고 있다. "중간층 획득 전략"이라는 정치 언어는 실은 누가 더 신자유주의 중심 연합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킬지를 놓고 경쟁하겠다는 뜻이다. 그러자면 부동산 시장을 들썩일 공약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다. 과감한 조세 개혁이나 불안정 노동자의 노동권 강화도 기피 대상이다.
이대로라면 내년 대선은 필시 이 방향으로 마냥 흘러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설령 여당과 야당이 자리를 바꾸더라도 사회 현실에서 바뀌는 건 별로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질서를 대체할 세력이 이미 싹을 드러낸 나라들과의 시간 격차도 더욱 벌어질 것이다. 정치는 여전히 제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기성 중심 연합을 흔드는 정치-사회 세력이 필요하다. 아직은 도전 연합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존재하고 말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믿음에 내기를 건 모험이 감히 시도돼야 한다. 영국과 스페인에서도 이제야 정치가 부활하는 것처럼, 그때에야 비로소 이 땅에서도 정치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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