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서울대병원에서 촛불을 밝혔나?

[장석준 칼럼] 사회주의의 해체인가 재발명인가

요 며칠 새 나온 신간 중에 사회과학 서적 독자들의 눈길을 끌 만한 자극적인 제목을 단 책이 하나 있다. <사회주의 재발명>(문성훈 옮김, 사월의책 펴냄)이다. 저자는 악셀 호네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3세대를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 사회학자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마르크스주의를 현대 사회에 맞게 변형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제2세대의 대표자인 위르겐 하버마스에 이르러서는 사회주의 운동의 실천 현장과는 거리가 꽤 먼 이론이라는 인상을 주곤 했다. 그런데 그 전통을 잇는 학자가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건 저작을 낸 것이다. 원서 제목은 국역본보다는 좀 밋밋한 '사회주의 이념'이지만, 그래도 사회주의를 새삼 핵심 의제로 부각하려는 저자의 의도는 명확히 드러난다.

사회주의를 재발명하겠다니 좌파 성향 독자라면 누구든 솔깃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젊었을 적에 운동권 서적 좀 본 민주화 세대 중에도, 금융 위기 이후 세상의 진로에 고민이 많은 젊은 세대 중에도 이 책에 관심을 보일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제목에 끌려 책을 손에 든 독자들 중 상당수는 어쩌면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호네트는 중앙 집권형 계획 경제는 대안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더 이상 노동 계급이 사회 변혁의 주체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고 한다. 당연히 전위 정당이니 프롤레타리아 독재니 하는 도식들도 기각된다. 과거 사회주의 교과서에서 사회주의와 등치되던 내용들 중 거의 대부분이 <사회주의 재발명>에서는 부정 혹은 극복 대상이다.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 : 사회적 자유

▲ <사회주의 재발명>(악셀 호네트 지음, 문성훈 옮김, 사월의책 펴냄). ⓒ사월의책
이쯤 되면 사회주의 '재발명'은커녕 '해체' 아니냐는 항변이 들릴 법도 하다. 이런 항변에 저자는 아마 "해체 맞다"고 답할 것이다. 호네트의 입장은 확고하다. 그는 두 세기 동안 사회주의의 '목표'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실은 '수단'에 불과했다고 단언한다. 다른 진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시대적인 수단들이었다는 것이다. 진짜 목표를 발굴해내려면 목표로 오인됐던 수단들을 제 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그곳은 대개 무덤이다.

그럼 이런 무자비한 작업을 통해 호네트가 찾아낸 진짜 목표는 무엇인가? '사회적 자유'다.

생시몽, 푸리에, 오언으로부터 마르크스, 엥겔스에 이르는 초기 사회주의자는 세상에 이미 존재하지만 당장은 가려져 있는, 그러나 앞으로 반드시 세상의 중심 원리가 돼야 할 무언가를 말로 표현해보려 애썼다. 때로는 어울리지 않는 옛 용어를 빌려 썼고, 때로는 새로운 단어를 가공했다. 그래서 나온 게 '공동체', '연합', '코뮌', 이런 말들이었다. 호네트는 이 말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사회적 자유'라 아우른다.

출발은 프랑스 대혁명이다. 대혁명의 구호 '자유, 평등, 우애'가 모든 영감의 발단이다. 혁명의 즉각적 수혜자인 자본가들은 이 구호의 첫째 항을 '개인적 자유', 즉 소유권을 바탕으로 시장 경쟁을 벌이는 원자적 개인의 권리로 이해했다. 이에 따라 서유럽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질서가 확산되기 시작했고, 일정한 재산을 소유한 남성들만의 의회가 들어섰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당시 막 상식이 돼가던 이 흐름에 반기를 들었다. 자유를 개인적 자유로 바라본 결과는 자유와 평등, 우애 사이의 모순과 대립이었다. 개인적 자유의 주창자들이 이 자유를 향유할수록 나머지 대다수는 비-자유로 내몰렸다. 자유로운 자와 자유를 박탈당한 자가 나뉘었고, 따라서 평등하지 못했다. 평등하지 못한 집단들 사이에는 물론 우애가 있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응수는 '사회주의'라는 작명 안에 집약돼 있다. 한 마디로 '사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개인들은 이미 '함께' 살고 있다. 사회를 이룸으로써만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될수록 이는 더욱 절실해진다. 개인적 자유 관념은 이런 진실에 눈 감는다. 그래서 사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행위로 나아간다. 이것이 참된 자유일리 없다. '함께' 사는 모든 이들이 '함께' 누려야만 진정한 자유다. '개인적'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 자유다.

한데 호네트는 사회적 자유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면, 우리의 관심은 상대방에게 끼칠 피해를 걱정하는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 '서로를 위해' 무엇을 할지 생각하게 된다. '서로를 위한' 행동을 하면서 삶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이 경험을 지속, 확대하려 노력하게 된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원리가 중심이 될 때에 비로소 사회가 사회다워진다고 믿었다. 로버트 오언은 이를 다음과 같이 감명 깊게 정식화했다.

"우리가 지금 주장하는 원리는 분명하게 이해되고 한결같이 실천되는 자신의 행복은 공동체의 행복을 늘리는 행위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개인적 행복은 주변 모든 사람의 행복을 늘리고 확장하려는 노력에 비례해서 그렇게 될 수 있다."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로버트 오언 지음, 하승우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펴냄, 2008년), 27쪽)

사회주의란 이렇게 사회적 자유를 통해 자유, 평등, 우애라는 근대의 약속을 하나로 꿰뚫으며 실현하려는 이념, 운동이다. 사회주의가 역사 속의 숱한 실패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재발명돼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인 사회적 자유야말로 개인적 자유의 복고 운동(이름 하여 '신자유주의')이 세상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고개를 돌릴(성서의 메타노이아, 즉 회심) 방향이 어디인지 가리켜주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재발명>에서 호네트가 동시대인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보다 이것이다.

사회적 자유는 우리 시대 회심의 방향

그래도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과거 사회주의 교과서에서 흔히 마주쳤던 '계급 의식'이나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 등등에 비하면 '사회적 자유'는 지나치게 느슨한 윤리적 관념으로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사회주의 재발명>이 이 논의만 하는 것은 아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정책들을 모색하기 위한 예비 논의가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논의에 합류하자면 어쨌든 사회주의의 궁극 목표가 사회적 자유라는 저자의 재정식화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나는 이를 적극 지지한다. 이유는 이렇다.

첫째, 사회적 자유는 사회주의 사상, 운동의 생명을 지속시킬 가장 강력한 동기다.

흔히 사회주의의 핵심 구성 요소로 치부되는 것들은 삶이라는 시험을 버텨내기에는 내구성이 강하지 못하다. '국유화' 같은 정책은 마치 현실 사회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현존하는 공기업의 모습에서 금방 빛이 바랜다. '전위 정당' 신화는 좌파 정치 조직에서 바깥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혹은 더 기괴할 수도 있는) 인간 군상을 마주하는 순간에 환멸로 바뀌기 쉽다.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계기가 이런 요소들 때문이라면 반-사회주의로 전향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변혁 운동 언저리에 어쨌든 계속 남아 있는 이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이보다는 어떤 기억 때문이다. 평소에 무덤덤하던 사람들이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다가오고 또한 그들의 삶에서 나 역시 의미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며 벅찼던 기억. 이런 관계들로 충만한 다른 세상의 모습을 언뜻 본 것 같았던 기억. 지금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모인 이들이 남기게 될 기억.

사람들은 이런 기억에 어눌하게나마 '동지애'나 '연대' 같은 이름을 붙여 간직한다. 호네트에 따르면, 바로 사회적 자유다. 이를 잊지 못하는 한, 그 사람은 변혁 운동에 등 돌릴 수 없다. 이것만큼 오래가고 절실한 동기는 없다. 사회적 자유는 역사 속 사회주의의 다른 어떤 내용보다도 근본적이며 강력한 요소임에 분명하다.

둘째, 사회적 자유는 사회주의를 가장 사회주의답게 만드는 원리다.

진짜 목표인 사회적 자유 대신 그 수단들이 목표 구실을 하는 동안에 사회주의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공산당 선언>의 가장 보석 같은 구절,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은 먼 미래의 약속이 됐다. 이 약속의 땅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 당장은 혹독한 시험을 견뎌내야 했다. 당-국가의 지령에 따르며 노동 규율을 강화하고 만성적인 생필품 부족에 익숙해져야 했다. 자유의 감각은 무뎌지고 망각됐다.

거대한 약속의 실현을 위해 이 약속과는 정반대되는 현재를 받아들이라는 것, 이것은 실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일상 풍경이다. "성장을 위해 빈곤과 고된 노동을 달게 받아들여라!" 그런데 사회주의도 이 풍경의 일부가 됐다.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해 당이 정한 생산 할당량을 채워라!" 자본주의만큼이나 사회주의도 거대한 배반의 질서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그러나 사회적 자유로부터 재출발하는 사회주의는 더 이상 이런 반역에 동조할 수 없다. 사회적 자유는 결코 유예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실험을 통해서든 지금 당장 구현돼야 한다. 초보적인 형태로라도 사회적 자유가 규제 원리가 되지 못하는 실험은 폐기 대상일 뿐이다. 자율과 자치가 사회주의와 동의어가 되어야 하고, 더 이상 '국가'주의가 '사회'주의를 대신해선 안 된다. 이렇게 사회주의는 근대의 족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런 사회주의는 새로운 세대의 지향과도 맞아떨어진다. 스페인 '분노한 자들' 운동 등 최근의 사회 운동을 꿰뚫는 한 가지 공통점은 자율성의 추구다. 이들 운동에 참여한 젊은 세대는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실감할 수 있는 대안을 원하며 대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참여해 이 대안을 실현해나가길 바란다. 정치 개혁이든 복지든 모든 과제를 자율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다. 사회적 자유의 환기는 이러한 시대정신에 부합한다.

셋째, 사회적 자유는 인류 모두의 보편적 가치가 될 수 있다.

'자유, 평등, 우애'가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처음 제기됐으니 서구 특산물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구호를 '개인적 자유'로 해석한 사회 세력은 인류 역사상 서유럽에 처음으로 특이하게 등장한 집단이 맞다. 이후 세상의 나머지 곳곳에서 이를 개화문물이라며 학습하고 모방하고 갱신한 결과가 현재의 지구 자본주의다. 이 점에서 개인적 자유를 중심에 둔 흐름은 서구 중심주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유, 평등, 우애'에서 '사회적 자유'를 이끌어내려는 흐름은 그렇지 않다. 사회적 자유가 규범이 되는 순간은 유럽 민주주의 혁명과 노동운동에서 반복됐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에 맞서는 해방 투쟁에서도 나타났다. 지배 세력이 자유를 독차지하는 모든 곳에서 민중에게 남은, 혹은 지배자들이 유일하게 빼앗을 수 없는 자유는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유는 이렇게 지구 전역에서 자생적으로 솟아나 서로 합류하며 대양으로 나아가는 보편적 현상이다.

우리만 해도 그렇다. "오 자유여, 봉기의 창끝에서 빛나는 별이여"(김남주, '자유를 위하여')라고 시인이 노래한 동학 농민 혁명부터 1980년 5월 광주를 거쳐 최근의 노동 운동과 촛불 항쟁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도 민중의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사회적 자유가 움트고 자라났다. 가령 호네트가 제시하는 '사회적 자유'와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렇기에 <사회주의 재발명>이 제안하는 사회주의는 우리에게도 토착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아니, 토착적이기에 보편적인) 지침일 수 있다.

공위기에 터져 나온 첫 번째 발언

요즘 사회과학자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들 중 하나가 '공위기(空位期, interregnum)'다. 왕이 죽었는데 새 왕의 즉위가 계속 뒤로 미뤄지는 혼란 시기라는 뜻이다. 죽은 것은 물론 금융화의 정점에 이른 지구 자본주의다. 다들 인간 세계가 더욱 답답해지기만 하는('헬지구') 이유가 자본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서 그런 것임을 어느 정도는 안다. 어쩌면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선동조차 불필요한 시대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이미 널리 퍼졌다고 해서 대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대안이 존재한다는 신념 또한 붕괴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위기'라는 푸념이 세상을 짓누른다.

<사회주의 재발명>은 이 무거운 침묵의 시대에 첫 번째로 용감하게 손을 들어 내놓은 발언이다. 공위기를 끝내려면 어디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지에 대해 세상에 던진 선명한 제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땅히 호네트의 이 발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다음 발언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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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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