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는 미국의 '달러 패권'을 지켜준다

[박홍서의 중미관계 돋보기] 사드의 계보학

과학 철학에 '관찰의 이론 의존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동일한 사물도 관찰자의 이론(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사드라는 동일한 대상 역시도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사드를 바라보는 관점은 세 가지 정도로 나뉠 수 있다. 이들 관점의 '우열'은 가리기 어렵다. 관점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간의 '층위'는 분명 존재한다.

첫째, 수면 위에 드러나 보이는 사드는 북핵 위협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 수단이다. 사드 배치를 주장하는 정부와 주류 언론, 또 대중들의 관점이다. 사실, 북핵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남한의 핵무장일 것이다. 기술적으로 핵에 대한 완벽한 방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남한 핵무장을 찬성할 리 없다. 핵을 가지는 한국이나 또 그로 인해 핵무장으로 나아갈 일본이 미국의 안보 울타리에서 벗어나 제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이 왜 그렇게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을 반대했겠는가.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건 결국 사드라는 요격 미사일 배치뿐이다. 미국도 강력히 권유하고 있다. 따라서 사드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다. 북한을 두둔하는 종북 세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허점투성이다. 무엇보다 미국 내에서조차 그 요격 성능이 의문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예정대로 사드가 배치될 경우 사드는 수도권을 방어할 수 없다.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살고,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수도권 방어에 사드가 무용지물이라면 도대체 왜 사드를 배치하는가?

그뿐이 아니다. 사드를 배치하면 그 반작용으로 북-중 동맹이 강화돼 북한의 대남 위협이 더욱 배가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벌써 대북 제재에 대한 중국과의 공조에 균열 조짐이 보이고 있다. 김정은 정권에게 축복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한의 계속되는 미사일 도발은 사드 배치를 철회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사드배치를 '확정' 짓게 만들려는 처절한 노력일 수도 있다.

▲ 지난 9월 5일, 노동 미사일 발사 장면을 참관하는 김정은. ⓒ연합뉴스

둘째, 이제 수면 밑으로 내려가 보자. 수면 위에서 보이지 않던 미-중 간의 세력 경쟁이라는 보다 커다란 빙산 덩어리가 보인다. 북한의 위협은 명분일 뿐이다. 미국은 사드를 통해 있을지 모를 중국과의 전쟁에 대비한다. 중국의 미사일 운용에 관한 일거수일투족을 중국 코앞인 한반도에서 사드 레이더로 파악한다. 전략적으로 큰 이득일 수밖에 없다. 사드가 자국의 안보 이익을 심각히 훼손한다고 중국이 반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드는 미국의 대중국 선제 핵공격을 가능하게 한다. 중국의 반격 능력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사드를 포함한 미국의 요격 미사일 체제는 강대국 간 '상호 확증 파괴' 논리를 훼손해 전쟁 가능성을 높인다.

이러한 상황이 사실이라면, 사드 배치는 한국에게 당연히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한국은 스스로 풀섶을 지고 미-중 경쟁 구도라는 불구덩이로 걸어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의 아귀다툼에 끼어 온갖 고초를 당했던 한반도 역사를 스스로 재현하려는 것이다. 400년 전 광해군이 그렇게 회피하고자 했던, 그러나 집단 사고에 빠진 인조 정권이 기어이 초래했던 그 어처구니없는 전철을 되밟고 있는 것이다.

셋째, 좀 더 수면 깊숙이 내려가 보면, 이제는 미국과 중국의 '담합'이라는 또 다른 그림이 보인다. 미국은 공멸이 뻔한 중국과의 전쟁을 할 의사가 없으며, 단지 사드를 이용해 한국이라는 집토끼를 관리하려 한다는 관점이다.

▲ 9월 6일, 라오스에서 회담을 갖는 한미 정상. ⓒ연합뉴스


자본주의 최후 단계가 결국 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란 레닌의 예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자본주의가 금융 자본에 올인할 것이란 생각은 맞았으나, 자본주의 국가 간에 제국주의 전쟁이 필연적일 것이라는 예언은 들어맞지 않았다. 레닌은 핵무기라는 궁극의 무기를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핵공격에 대한 완벽한 방어 수단이 없다는 사실은 핵무기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강대국들 간의 '영구 평화'가 실현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강대국들은 안보보다는 경제 이익의 확보에 전력을 기울인다.

물론, 그렇다고 안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안보는 이제 경제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19세기 식으로 윽박지르는 함포 외교가 아니라 보다 세련된 형태의 안보-경제 연계 전략이다. 1971년 금-달러 태환의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된 이후에도 미국이 여전히 달러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 기반이기도 하다.

미국이 달러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 그 근저에는 정치경제학자 수잔 스트레인지(Susan Strange)가 말한 미국의 '구조적 힘(structural power)'이 존재한다. 그 구조적 힘은 생산, 안보, 금융, 지식 영역에서 미국이 복합적으로 발휘하는 힘을 의미한다. 미국은 이들 각 영역에서 단순히 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자체를 타국에게 제공한다. 돗자리를 깔아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달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국의 구조적 힘을 반복적으로 타국에 확신시켜줘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빠진 호랑이'라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타국은 더 이상 달러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고 미국의 패권은 결국 산산조각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미국은 안보를 '소환'한다. 안보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미국이 압도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타국도 안보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미국을 신뢰한다. 영화 <인디펜던스데이>처럼 외계인이 침공해도 미국이 지켜줄 것 같은 믿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독점하는 결제 수단(달러)을 믿고 구매한다. '신브레튼우즈' 체제의 등장이다.

2011년 오마바 정권이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선언한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이 숨겨져 있다. "아시아로의 회귀는 미국의 안보 능력에 의존하고 있는 세계 경제에 안정성을 제공한다"는 국무장관 시절 힐러리의 주장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중국 역시 신브레튼우즈 체제의 핵심 구성국이다. 물론, 중국은 한국이나 일본처럼 미국의 안보에 신세를 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국에 저항할 여력은 있다. 그러나 '과도한' 저항은 그리 합리적이지 못하다. 중국이 저항할수록 중국은 미국의 인정 투쟁 부조리극의 충실한 악역 역할을 해주는 꼴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에 대한 원론적 수준의 비판 이외에 그저 '일대일로' 구상 등을 통해 자신의 활동 반경을 묵묵히 넓혀나갈 뿐이다. 시간은 중국 편이라는 믿음과 함께.

이런 차원에서 보면, 사드는 북핵 대응용도, 또 미-중 경쟁의 산물도 아니다. 사드는 미국이 경제 패권을 고수하기 위한 하나의 명분에 불과한 것이다. 사드와 남중국해 문제가 본질적으로 궤를 같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반도에 사드는 필요한가? 사드에 관한 각각의 관점은 모두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역시 관점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드가 '북핵 대비용'이라는 관점만이 선전되고 강요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류 정치권력이, 주류 언론이, 그리고 지식 권력이 그리한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고 또 강요한다. 대중들은 그들에 의해 충순한 사드 지지자들로 '주체화'된다. 관점의 폭력일 수밖에 없다. 그 저의에 정치적 꼼수가 있는 게 아닌가하는 의심도 든다.

"진정한 해방은 권력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 놓은 당신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때 가능하다." 철학자 미셸 푸코의 단언이다. 왜 사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당신의 생각인가? 아니면 권력의 생각인가? 사드가 우리의 살림살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가? 왜 청년들이 절망해야 하며, 왜 서민들 호주머니가 털려야 하는지가 훨씬 중요한 문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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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서

한국외국어대에서 중국의 대한반도 군사개입에 관한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덕여대 연구교수 및 상하이 사회과학원 방문학자를 역임하고, 현재 강원대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제관계 이론, 중국의 대외관계 및 한반도 문제이다. 연구 논문으로 <푸코가 중국적 세계를 바라볼 때: 중국적 세계질서의 통치성>, <북핵 위기시 중국의 대북 동맹 딜레마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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