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을 꿈꿨던 지도자, 미국이 처단했나?

[유라시아 견문] 신파키스탄 : 이슬람 사회주의

재출발

1971년은 1947년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심리적, 감정적 동요가 엄청났다. 인도의 대분할은 파키스탄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슬람 국가의 분리 독립을 간절히 바랐다. 반면 파키스탄의 분할은 기필코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군사력을 통해서라도 방글라데시의 분리 독립을 저지코자 했다. 그러나 무산되었다. 나라의 동쪽 날개가 떨어져나갔다. 적대적 경쟁국 인도에 군사적으로 완패했을 뿐만이 아니라, 영토와 인구의 절반마저 잃어버렸다. 파키스탄의 존립 자체가 휘청거렸다. 정체성과 정당성 모두 흔들렸다.

고립감도 증폭되었다. 방글라데시는 인도에 더 가까울 가능성이 컸다. 무굴제국 이래 남아시아의 주역이라 여겼던 펀자브의 자부심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특히 인도-방글라데시가 합작하여 선동하는 '펀자브 패권주의'는 뼈아픈 대목이었다. 서파키스탄의 다른 주에서도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과연 파키스탄이 건사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스러운 지경이었다. 그간 나라를 이끌어온 군부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 인물과 새 정치가 절실했다. 그때 등장한 이가 줄피가르 알리 부토이다. 위기의 파키스탄을 도맡아 국가 재건을 주도했다. 20세기 후반 남아시아 지도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사상가에 값하는 정치인이었다.

부토는 1928년생이다. 대영제국기의 말미에 태어났다. 명문가의 자제였다. 가학으로는 이슬람을 전수받고, 가정교사에게는 영국식 교육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는 뭄바이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퍽이나 조숙했던 모양이다. 무슬림연맹 대표 지나에게 편지를 쓴다. 사사로운 내용이 아니었다.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는 코란과 마호메트의 적이라며, 우리(무슬림)의 사명은 파키스탄 건국이라고 했다. 국민회의와 타협하여 통일 인도를 지속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당장은 학생이라 기여할 수 없지만, 파키스탄을 위하여 제 삶을 바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다짐도 새겼다. 일종의 충성 서약이었던 셈이다. 말은 씨가 되었다. 훗날 조국이 그의 숨을 거두어간다.

1947년 파키스탄이 탄생하던 해,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남캘리포니아주립대학(USC)에 입학한다. 몸은 캘리포니아였지만, 마음은 펀자브에 있었다. 학생 잡지에 열정적인 기고문을 투고한다. 대분할의 수천만 희생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 건국을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아시아, 새로운 시대의 이상을 조국에 투사했다. 당시 USC는 '플레이보이를 위한 학교'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베벌리힐스에서 유유자작하는 부잣집 도련님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부토와는 기질이 맞지 않았다. 곧 샌프란시스코로 학교를 옮긴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는 정치학 공부에 전념했다. 마키아벨리, 홉스, 흄, 토인비까지 두루 읽었다. 동시대 정치인 중에는 네루를 주목했다. 그의 비동맹 외교가 외세에서 자유로운 독립 국가의 품격을 높인다고 여겼다. 인도를 적대하면서도 취할 것은 취했던 것이다.

역사적 인물 가운데는 나폴레옹을 역할 모델로 삼았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의 21살 생일에 아버지가 선물한 책이 나폴레옹 전기였다. 가죽 양장으로 포장된 다섯 권짜리 대작이었다. 카를 마르크스 역시 아버지가 소개해 주었다. 다음 생일의 책 선물이 <공산당 선언>이었다. 실제로 나폴레옹과 마르크스는 부토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나폴레옹에게서 권력의 정치를, 마르크스에게서 가난의 정치를 배웠다고 술회한 바 있다.

버클리 캠퍼스 또한 캘리포니아 좌파의 거점 같은 곳이었다. 부토 역시 사회주의 서적을 열독했다. 흥미롭게도 사회주의가 이슬람의 원리에도 부합한다고 접수했다. '이슬람 사회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 버클리 다음으로는 대서양 건너 옥스퍼드 대학으로 진학한다. 식민모국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 또한 아버지의 권유를 따른 것이었다.

귀국 직후부터 부토는 출세가도를 달린다. 금수저의 특혜를 한껏 누렸다. 집안 인맥이 원체 든든했다. 1957년 유엔(UN)의 파키스탄 대표부에 발탁된다. 약관 30세, 파키스탄은 물론이요 당시 유엔 대표단 가운데서도 가장 어렸다. 1958년에는 상무부 장관에 취임한다. 역시 최연소 장관이었다. 1960년에는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승진하고, 1963년에는 외교부 장관이 된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국가의 향방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직책에 앉게 된 것이다.

외교부 장관이 되면서부터 그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토는 민족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이며 이슬람교도였다. 당장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중화민국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하겠다고 했다. 베이징 방문과 마오쩌둥과의 회동으로 일약 국제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발칵 뒤집힌 것은 워싱턴이었다. 파키스탄은 소련과 중국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자리한 동맹국이었다. 그 나라의 외교부 장관이 한마디 상의도 없이 '중공(Chi-Com)'의 수뇌와 악수를 나눈 것이다. 곧장 아유브 칸에게 압력을 가한다. 부토의 자질과 재주를 아끼던 칸도 패권국의 압박을 버텨낼 수는 없었다. 결국 1967년 외교부 장관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부토를 도리어 키워준 꼴이었다. 금수저 관료에서 '인민의 지도자'로 거듭났다. 1967년 7월 21일, 부토의 퇴임 연설을 듣기 위해 라호르에 인민들이 집결했다. 특히 청년 학생들이 많았다. 파키스탄의 68 혁명에는 두 명의 영웅이 있었다. 런던의 타리크 알리, 그리고 펀자브의 부토이다. 양자 간에 차이는 있었다. 알리는 천상 지식인이었다. 런던에서 좌파 잡지를 편집하며 담론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반면 부토는 정치인이었다. 현실에서, 현장에서, 역사를 만들어갔다. 아유브 칸의 반대편에 선 대항 정치인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물 들 때 노 저어야 한다.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 연설을 시작했다. 그 기세를 모아 11월 30일 파키스탄 인민당도 창당했다. '이슬람은 우리의 신념, 민주주의는 우리의 정치, 사회주의는 우리의 경제,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를 표방했다. 군사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의 출발이었다. 기어이 아유브 칸을 끌어내린다. 68 혁명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전면적 승리는 아니었다. 또 다른 군인 아히야 칸이 권력을 계승했다. 다만 1970년 총선을 약속했다. 부토는 파키스탄 인민당을 중심으로 범좌파 연합을 주도했다. 그리고 서파키스탄에서 압승을 거둔다. 1971년 방글라데시가 분리 독립하고 아히야 칸 정부가 붕괴되자, 서파키스칸에 남은 것은 부토와 파키스탄 인민당뿐이었다. 자연스레 부토에게 권력이 이양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권력 교체가 아니었다. 반공주의 군사 독재 국가에서 '이슬람 사회주의 국가'로의 전면적인 변화였다. 파키스탄 판 '전환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슬람 사회주의

1973년 새 헌법이 발포된다. 의회제로 운영되는 이슬람 공화국을 표방했다. 부토는 초대 총리가 되었다. '사회주의 파키스탄'이라는 새 정치에 나선 것이다. 건국 이래 지난 25년과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미국이 파키스탄을 모델로 삼아 입안한 '반공주의 개발 독재'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렇다고 소련식 공산주의를 추수한 것도 아니었다. 과학적 사회주의, 신이 없는 사회주의를 사절했다. 이슬람 사회주의, 즉 알라와 더불어 하는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천년의 문명에 백년의 이념을 결합시켰다. 이성과 영성의 조화를 꾀했다.

1972년 철강과 전력, 화학 등 주요 산업을 국유화한다. 1974년에는 은행도 국유화시켰다. 노동자의 권리를 신장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노동조합의 권한도 대폭 강화시켰다. 지주들의 토지 소유권을 제한하고, 정부가 직접 소농과 소작농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제도도 마련했다. 부패와의 전쟁도 펼쳤다. 행정부와 군부의 고위 인사 2000여 명이 퇴출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정책들을 실현해가는 과정에서도 다분히 의식적으로 '무사왓'이라는 단어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무사왓은 평등을 뜻하는 코란 속의 아랍어이다. 최신의 사회주의적 개혁 프로그램을 통하여 오래된 이슬람 정신을 만개시킨다는 속뜻을 담고 있었다.

교육 정책도 인상적이다. 기왕의 마드라사를 고수한 것도 아니고, 군사 정부 아래 영미식 교육을 지속시킨 것도 아니다. '마드라사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의 임기 중에 6500개의 초등학교가 신설되었다. 900개의 중학교도 만들어졌다. 고등학교는 407개였다. 전문 대학은 51개, 일반 대학은 21개를 세웠다. 그 모든 학교에서 이슬람 교육을 의무화시켰다. 학교와 교회를 분리시킨 것이 아니다. 교육 현장에서 성과 속을 공존시켰다. 이성을 연마하는 한편으로 영성도 고양시키고자 했다.

1974년 이슬라마바드에 콰이드 이 아잠 대학과 알라마 이크발 개방 대학이 들어선다. 콰이드 이 아잠은 '위대한 지도자'라는 뜻의 우르두어로 건국의 아버지 지나를 기리는 대학이며, 후자는 파키스탄의 철학적 기초를 세운 시인이자 사상가인 무하마드 이크발을 받드는 대학이다. 두 학교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의 이슬람학을 자랑하는 명문 대학이다. '이슬라마바드'라는 새로운 수도 이름에 걸 맞는 이슬람학의 메카를 지향한 것이다.

종교만 앞세우지도 않았다. 과학도 동시에 발전시켰다. 1975년에는 이크발의 이름을 딴 의과대학도 세워진다. 1974년 나티아갈리에서는 해외 과학자와 파키스탄 과학자가 교류하는 국제 물리학 대회가 처음 열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76년에는 이론 물리학 연구소도 세운다. 핵무기를 자체 개발한 파키스탄의 물리학 발전 또한 부토의 진두지휘에 의한 것이었다. 이슬람은 오래전부터 수학, 화학, 의학 등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일군 문명이었다. 20세기의 현대 과학과 전혀 배타적이지 않았다.

또 다른 혁신 대학으로 이슬라마바드의 인민 개방 대학을 꼽을 수 있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무료로 고등 교육의 혜택을 베풀었던 국립 대학이다. 신파키스탄이 지향하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체현한 대표적인 교육 기관이었다고 하겠다. 1970년대 파키스탄은 온통 '교육 혁신 국가'였다.

▲ 부토와 마오쩌둥. ⓒwikimedia.org


범아시아주의와 범이슬람주의

그래도 부토 하면 역시 외교 정책이다. 1950년대 인도에 네루가 있었다면, 1970년대 파키스탄에는 부토가 있었다. 1966년 8월 런던을 방문한다. 외교부 장관으로서 공식 방문이었지만, 타리크 알리와의 사적인 만남도 있었다. 알리의 초청으로 파키스탄 유학생을 대상으로 연설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아시아-아프리카 연대와 제3세계 연합을 주도하는 국가로서 파키스탄의 야심찬 비전을 제시한다.

허장성세로 그치지도 않았다. SEATO와 CENTO 모두에서 탈퇴한다. 미국과의 군사동맹기구에서 자진 사퇴했던 또 다른 사례가 있었나 모르겠다. 1965년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서는 (북)베트남 편을 들었고, 1967년 발발한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는 아랍 편을 들었다. 기존의 친미 노선을 철회하고 주체 노선으로 갈아탄 것이다.

1969년 그의 세계관과 정치적 비전을 집약한 <독립이라는 신화(The Myth of Independence)>라는 책도 출간한다. 그의 무덤으로 가는 길에 읽어 보았다. 짧지만 단단한 글이었다. 단숨에 읽힐 만큼 선동적이기도 했다. 1970년대 세계 학계를 풍미하는 사미르 아민의 종속 이론과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선취하고 있었다.

명민한 지성의 부토는 가슴마저 뜨거운 야심가였다. '전환 시대'가 자신을 요청한다는 사명감과 소명심에 불타올랐다. 인도의 네루는 이미 죽었고(1964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군사쿠데타로 축출되었다(1965년). 중국은 문화 대혁명(1966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오쩌둥도 저우언라이도 국제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힘들었다. 호치민 역시 전쟁 수행에 급급했다.

아시아의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다. 본인이라고 생각했다. 유엔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외교부 장관으로서 경험도 풍부했다. 동쪽으로는 중국, 베트남, 태국, 라오스, 미얀마, 북조선을 방문했고, 서쪽으로도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들을 순회했다. 서독과 동독을 동시에 방문한 뒤, 폴란드와 소련을 찾아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도 있다.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잇는 자리에 파키스탄이 있었고, 소련과 중국을 접한 곳에 파키스탄이 있었다. 유라시아의 가교 국가로 파키스탄을 다시 자리매김했다.

그의 신아시아 구상에서 핵심은 중국이었다. 파키스탄과 중국의 유대가 아시아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했다. 제3세계의 발전과 진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의 운명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승인의 선봉장 역할을 한 것도 그였다. 중국 없이는 아시아의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견해를 처음 개진한 인물이 부토였다. 부토의 조언을 경청한 예외적인 지식인이 미국에도 한 명 있었다. 바로 헨리 키신저이다. 키신저가 중국의 문을 열어간 '전환 시대'의 행보는 부토의 그것을 답습한 것이었다. 닉슨이 마오쩌둥과 악수를 나눈 것(1972년)도 부토(1963년)보다 10여년 늦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친중파의 혐의를 씌우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겠다. 동쪽으로 편향되지도 않았다. 동시에 서쪽을 향하여 범이슬람주의도 내세웠다. 그는 신심 깊은 무슬림이었다. 무신론이 뿌리 깊은 유교 문명의 사회주의 국가와는 근본적인 상이점이 있었다.

▲ 1974년 2월 라호르에서 개최된 범이슬람회의. ⓒwikimedia.org

1974년 2월 라호르에서 개최된 범이슬람회의(Pan-Islamic Summit)가 상징적이다.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말레이시아 등 전 세계 38개 이슬람 국가들이 참여한 성대한 국제 행사였다. 일순 파키스탄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인 듯 했다. 알제리의 민족 해방 전쟁 승리를 기리고, 팔레스타인의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했다. 부토는 이집트의 나세르부터 리비아의 카다피까지 앞에 두고 열정적으로 연설/설교했다. 진정한 이슬람은 동/서를 가르지 않고, 물질/정신을 나누지 않는다며, 파키스탄이 물질주의적 서방과 정신주의적 동방의 가교가 될 것이라는 웅장한 구상도 피력했다.

핵 국가 파키스탄을 공식적으로 표방한 것도 범이슬람회의에서였다.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문명 모두 핵무기를 가졌다. 신앙을 배타한 양대 공산주의 국가 역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오로지 이슬람 문명만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며 핏대를 세웠다. 불공정하고 불합리하며 부조리한 국제 질서의 산물이라며 목청을 높였다. 1974년 이슬라마바드에서 범이슬람회의와 국제물리학회의가 동시에 열린 것 또한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치밀하게 준비하고 연출된 행보였다.

그러나 이슬람과 핵무기의 결합은 미국이 도저히 좌시할 수 없는 사태였다. 부토를 만류하기 위해 급파된 인물이 또 키신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회는 불쾌하게 끝을 맺는다. 한때 중국을 통한 냉전 돌파라는 기획에서 의기투합했던 두 인물은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결국 핵개발을 중지할 것을 압박하는 키신저를 홀로 남겨두고 부토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선다. 적막이 흐르는 빈 방에서 리얼리스트 키신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토의 최후와도 직결되는 순간이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1977년 재차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슬람 사회주의' 아래서 영향력을 상실해가던 군부의 청년 장교들이 앞장섰다. 부토는 엉뚱하게 살인 혐의로 피소되었다. 사법부는 사형을 선고했다. 잘 짜인 각본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와 인연을 맺었던 해외 지도자들이 석방과 선처를 요구했다.

특히 부토의 연설에 감화 받고 영감을 얻었던 카다피는 리비아 망명이라는 타협책을 파키스탄 군부에 제시했다. 부토를 리비아로 이송하기 위해 파견된 특사가 이슬라마바드 공항에서 1주일이나 대기했다. 그러나 끝내 사형이 집행되었다. 1979년 4월 4일, 부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사법 살인이었다. 이슬람 세계 전체가 경악했다.

음모론이 무성하다. 쿠데타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문서로 드러난 바는 (아직) 없다. 진실은 키신저의 비밀 메모나 CIA의 보고서가 공개된 후에나 밝혀질 것이다. 현재로서는 정황 추론만 가능하다. 미국의 사전 승인이나 교감 없이, 혹은 묵인하겠다는 의사 없이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군부가 뒤 짚을 수 있었을까?

4년 전 남태평양 건너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 전복이다. 미국이 보기에 부토는 아옌데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사회주의자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핵무장 이슬람 국가마저 추진하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부토가 사망한 바로 그해, 동북아시아의 한 독재자도 암살당한다. 그 역시도 미국의 뜻을 거스르고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6개월의 시차가 난 부토의 사형과 박정희의 암살은 전혀 무관한 사태였을까?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언할 수가 없다.

부토의 처형 이후 파키스탄은 미국에 충성하는 동맹국으로 회귀했다. 걸프만 산유국들의 오일 달러를 수호하는 역할이 파키스탄 군부에 맡겨졌다. 펀자브 출신 장교들과 군인들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 등으로 파견되었다. 두바이와 아부다비 건설을 사수하는 역할도 이들이 수행했다. 대영제국 아래 펀자브가 했던 역할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다. 이득이 없지 않았다. 아니 상당했다. 중동의 오일 머니가 파키스탄 군부의 뒷주머니로 흘러들었다. 무력에 금력까지 갖춘 독보적인 집단이 되었다.

부토가 제거된 이듬해(1980년) 미국의 한 젊고 똘망똘망한 국무부 관료가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그리고 '파키스탄 안보 보고서'를 작성한다. 파키스탄의 군사 독재 유지가 오일 달러의 사수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작성자의 이름이 퍽이나 흥미롭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이다. 1989년 '역사의 종언'이라는 희대의 논문을 발표한 바로 그 후쿠야마이다. 키신저부터 후쿠야마까지, 적지 않은 미국의 브레인들이 파키스탄을 주목했던 것이다. 그만큼 파키스탄은 유라시아 지정학의 요충국가이다.

부토는 갔지만, 그의 글은 남았다. 꽤나 많은 글을 남기고 갔다. 한데 모아서 논문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일만큼 흥미로운 지점도 많았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원형이라고 함직한 내용도 엿보인다. '이슬람 사회주의'를 양 날개로 크게 펼쳐 유라시아 전체를 아울렀다. 사회주의 국제주의와 범이슬람주의와 범아시아주의를 통합하고자 했다. 그래서 베를린부터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거쳐 평양까지 가닿는 경제 합작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눈을 찌르는 대목은 그의 유라시아 구상에서 일본은 제외시켰다는 점이다. 일본이 커지는 것은 곧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16년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은 진술이다. 번뜩이는 직관이고, 예리한 통찰이다.

1979년 그는 갔지만, 그의 소망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해 중국과 이란에서 '장기 21세기'의 서막을 알리는 중차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과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동시에 발진했다. 중화 세계의 귀환과 이슬람 세계의 중흥을 알리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두 방향의 역사 조류는 목하 일대일로를 통하여 하나의 대세로 합류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일대와 일로를 잇는 연결 국가라는 점, 중국과 중동 사이에 자리한 가교국가라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부토의 사상과 구상에서 이미 일대일로의 청사진을 간취할 수 있는 것이다. 先見之明(선견지명)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지난 백 년을 회고하며 다른 백 년을 다짐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의 무덤 앞에서 오래 묵념했다.

▲ 부토의 이슬람식 영묘.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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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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