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옥, 카슈미르

[유라시아 견문] 카슈미르 : 대분할 ③

비대칭적 분할 체제

펀자브와 이웃한 카슈미르도 쪼개졌다.

분할의 양상은 한층 복잡한 것이었다. 기층과 상층이 크게 어긋났다. 종교와 국가를 균질화하는 '두 민족' 이론이 적용되지 않았다. 무슬림이 다수임에도 인도에 편입된 영토가 훨씬 넓었다. 카슈미르의 3분의 2를 인도가 차지했다. 파키스탄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미수복된 '이슬람의 땅'을 되찾고자 했다. '자유 카슈미르'로 해방하려고 했다. 인도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카슈미르는 초대 총리 네루의 고향이기도 했다. 세속주의 인도를 과시할 수 있는 최적의 보루였다.

결국, 분단 건국 4달 만에 전쟁이 일어난다. 유엔(UN)의 중재 끝에야 휴전에 이를 수 있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휴전선(Line of Control)은 남한/북조선의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길다. 장장 750킬로미터에 달한다. 서로 핵무장을 한 강대국 사이에 그어진 거대한 분열선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자, 가장 오래된 분쟁 지역이다. 국지전은 수시로 일어나고, 전면전도 종종 발생한다. 가장 최근으로는 1999년에 전쟁이 있었다. 그래서 인도령 카슈미르에만 70만 군대가 배치되어 있다. 파키스탄 역시 100만 대군의 3분의 2를 자국령 카슈미르에 주둔시켜 두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이 전개된 지난 15년 동안도 파키스탄의 주력군은 항시 인도와 접경한 카슈미르에 집결되어 있었다. 군사 밀집도에서 단연 세계 으뜸이다.

그래서 여태 내가 다녀본 곳 가운데 가장 삼엄한 장소였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터에 자리를 잡은 듯한 인도령 카슈미르 주도 스리나가르의 카슈미르 대학 캠퍼스에도 군인들이 즐비했다. 스리나가르 곳곳에 경찰과 군인이 포진되어 있었고, 외국인임에도 불심검문이 다반사였다.

그 살풍경을 카메라에 담다가 경찰에게 딱 걸렸다. 카메라는 물론 핸드폰까지 압수당했다. 사진을 모두 지운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 난 것도 아니었다. 언론사 명함을 확인한 후로는 내 숙소까지 사람을 붙였다. 당국의 허가 없이는 취재가 불가하단다. 기자가 아니라 학자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매일 저녁 숙소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군인에게 카메라에 담은 사진을 보여주어야 했다. 일부는 그 자리에서 즉시 삭제되었다. 몹시 불쾌했지만, 장총과 권총 앞에서 불만을 내놓고 표출하기는 힘들었다. 군사 정부 시절, 식민지 시절이 이랬을까 싶었다.

카슈미르는 인도-파키스탄의 비대칭성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분할 당시부터 인도의 국력이 압도적이었다. 영토와 인구 등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그 비대칭적 분할 체제는 파키스탄의 경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동맹 노선을 표방하며 '대국 외교'를 추구했던 인도와는 달리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세력 균형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동맹 정책을 추진했다.

패권국 미국과 결탁했다. 특히 신중국 건국(1949년) 이후 혼란에 빠진 미국의 가려운 곳을 정확하게 긁어주었다. 세계 지도를 가리켜 파키스탄의 위치를 강조했다. 소련과 중국을 접한 곳에 파키스탄이 자리했다. 유라시아의 사회주의화를 봉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파키스탄을 동맹국으로 삼으면 소련, 중국, 인도, 유라시아의 3대국을 모두 견제할 수 있었다. 당시 파키스탄에는 대영제국의 후예답게 군사적인 경험이 충분하고, 이슬람 국가로서 사상 무장(=반공주의)도 투철한 군대가 30만이었다. 양국 간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된 것이 1954년이다.

1950년대 파키스탄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었다. 두 개의 안보 기구에 동시에 참여한 유일한 국가였다. 동남아시아에서는 SEATO에 가입하고, 서아시아에서는 CENTO에 가입했다. 전자에서는 필리핀, 후자에서는 이란, 터키와 보조를 맞추었다. 대영제국 아래서 인도가 맡았던 역할, 즉 중동과 동남아에서의 안보 지킴이를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다.

영국을 대신하여 이제는 미국이 군사 훈련을 시켰다. 펜타곤의 군사 학교에서 장교를 양성했고, 미국의 군사 고문단이 파키스탄에 파견되었다. 서파키스탄의 군사 기지(카라치와 라호르)에서는 소련의 정보를 수집했고, 동파키스탄의 군사 기지(치타공과 다카)에서는 중국의 정보를 수집했다.

양국의 통신을 감청하고 장거리 미사일과 핵실험 등 군사적 동향을 파악했다. 그 대가로 최신의 전투기와 탱크, 잠수함 등을 파키스탄에 보급했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 세력 균형도 흔들렸다. 군사력만큼은 파키스탄도 못지않았다. 거듭하여 카슈미르 수복을 시도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더 중요하게는 파키스탄 내부의 균형이 무너졌다. 파키스탄 건국을 주도했던 무슬림연맹은 곧 힘이 빠졌다. 군부가 과대 성장했다. 파키스탄 독립 선포 당시 호기롭게 표방했던 '이슬람 민주주의'는 슬그머니 기각되었다. 정당이나 교단이 아니라 군대가 나라를 이끌었다. 군사 독재 국가가 된 것이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 인도와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양국의 갈림길 자체가 비대칭적 분할 체제의 소산이다. 이 파키스탄을 모델로 삼아 군부가 주도하는 반공주의적 근대화 이론을 정립한 이가 새뮤얼 헌팅턴이다. 냉전기 '파키스탄 모델'이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로 널리 퍼졌다.

점령

1987년 카슈미르도 '민주화'되었다. 선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줄곧 델리의 중앙 정치를 대변하는 정당들만 있었을 뿐이다. 1951년 첫 총선 이래 '인도 정당'들이 카슈미르를 지배했다.

1987년 처음으로 토착적인 지방 정당 무슬림연합전선(Muslim United Front)이 선거에 참여했다. 카슈미르 일대는 녹색으로 물들었다. 거리와 시장, 지붕마다 무슬림연합전선의 녹색기가 휘날렸다. 1947년과는 전혀 다른 해방의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응당 압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무슬림연합전선 후보가 출마한 44개 지역 가운데 고작 4곳에서만 당선되었다. 명백한 부정선거였다.

이로써 1947년 이래 40년간 카슈미르가 처해 있던 위상이 확실해졌다. 세계 최대의 탈식민 국가의 내부 식민지였고,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 안의 독재 구역이었다. 인도군은 국군보다는 점령군이었다. 'Democracy without freedom is Demon-Crazy'가 카슈미르의 구호가 되었다. 인도의 독립운동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를 비틀어 '카슈미를 떠나라(Quit Kashmir)'를 외치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무장 투쟁도 본격화되었다. 하더라도 대개는 짱돌을 던지며 저항하는 수준에 그쳤다. 알카에다보다는 팔레스타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일부 급진적 청년은 이웃한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로 잠입했다. 군사 훈련을 받고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무자히딘이 되어 돌아왔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던 소련을 축출한 탈레반처럼, 인도로부터 카슈미르를 해방시키자고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소수에 그쳤다. 다수는 이슬람 근본주의와는 무관했다. 자유와 자치를 요구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인도는 총력전으로 응징했다. 1989년 한 해만 8만 명이 학살되었다. 700만 카슈미르 인구의 1%가 죽은 것이다. 같은 해 천안문 사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폭압이었다. 실제로 북쪽으로 이웃한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견주어도 억압의 강도가 훨씬 높고 가혹하다. 국가폭력도 만연하다. 무슬림에 대한 고문과 강간이 숱하게 자행된다. 카슈가르와 카슈미르는 천양지차다.

그런데도 주목받지 않는다. 프레임 탓이다. '민주주의 인도'와 '이슬람 파키스탄'의 구도로 접근한다. '세속주의 인도'와 '근본주의 파키스탄'으로 이해한다. 카슈미르에 내재하지 못하고 대분할 체제의 균열을 투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방의 주류 언론에서도 소홀하고, 유엔 같은 국제기구의 관심도 덜 미친다.

'민주화'의 대서사에 부합하는 중앙아시아의 색깔 혁명과 중동의 '아랍의 봄'은 대서특필하지만, 2010년 카슈미르의 대규모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은 외면당한다. 현실주의 정치, 이른바 '대전략'이 작동하는 면도 있다. 인도를 '브릭스'에서 떼어내어 유라시아의 대통합을 저지하려 든다. '민주주의 가치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와 중국과 갈라 쳐서 일본과 연결시키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카슈미르에 대한 '인도주의적 개입'은 외면한 채 수수방관하는 것이다. 그래서 흡사 오키나와의 처지가 연상되기도 했다. 대국 간 냉혹한 '그레이트 게임'에 희생되고 있다.

인도 역시 대분할 체제의 뒤틀린 시각으로 접근한다. 거듭 외부의 사주, 즉 파키스탄의 '내정간섭'으로 곡해한다. 인도의 '자유주의적' 시민 사회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카슈미르에 고도의 자치가 보장된다면 이슬람 국가가 될 것이고, 인도의 민주주의와 세속주의에 해를 입힐 것이라고 한다. 파키스탄과 합작하여 분리 독립하거나 파키스탄으로 병합될 것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처럼 글로벌 테러의 온상이 되리라는 것이다.

카슈미르의 눈물과 분노가 인도의 점령군적 행태로부터 촉발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커녕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편승하여 이스라엘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스라엘로부터 이슬람 국가들과 싸워 승리한 경험을 전수받고, 이스라엘산 무기를 구입하여 카슈미르 일대에 실전 배치해 두었다. 자가당착, 적반하장이다.

지난 3월과 4월, 네루대학 사태로 말미암아 여러 TV 채널에서 카슈미르를 둘러싼 토론과 논쟁을 지켜볼 수 있었다. 볼수록 답답하고 갑갑했다.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세속주의자 모두 냉담하다. 인도인민당과 국민회의를 막론하고, 여야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대영제국의 토사물임에 분명한 '인식의 인종주의'를 답습하고 있다. 유럽에서 전수받은 이슬람 혐오를 복제한다. 카슈미르 인을 테러리스트와 동일시한다. 중무장한 인도 군대는 보이지 않고, 저항하는 카슈미르 인만 클로즈업될 뿐이다. 자의적이고 악의적인 편집이다.

커다란 도착이 아닐 수 없다. 인도는 유럽처럼 이슬람과 천 년 전쟁을 겪었던 지역이 아니다. 신앙으로 사생결단하는 종교 전쟁이 부재했던 곳이다. 오히려 무굴제국의 영향 아래 페르시아-힌두 문명이 융합되는 인류사의 대장관을 연출했던 장소이다. 자신의 빛나는 역사와 격절된 채 퇴행적인 분할 체제를 지속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고/금 간의 분단이 역력하다. 국가 간 체제가 나라만 쪼개었을 뿐 아니라, 문명화 과정 또한 굴절시켰다. '역사 없는 근대'가 판을 친다. '근대화'의 병폐이고, '교조적 민주주의'의 적폐이다.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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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카슈미르는 한때 지상 낙원이라 불렸다. 풍광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봄과 여름이 절정이다. 히말라야의 설산을 배경으로 붉은 튤립과 노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눈이 고인 호수는 고요하고, 눈이 녹아 흐르는 폭포는 장엄하다.

유독 이곳을 사랑했던 이가 악바르 대제의 아들 자한기르였다. 그는 야심찬 정치가보다는 섬세한 예술가 쪽이었다. 무굴제국의 보위는 아내에게 맡기고, 펀자브 평원에서 벗어나 고산의 절경을 향유하는 삶을 즐겼다. 곳곳에 자연미를 최대한 살린 이슬람식 정원과 별장을 만들고, 아편을 피우고 와인을 마시며 지상낙원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시를 페르시아어로 지었다.

야심보다는 시심을 자극하기로는 자한기르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카슈미르 출신의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델리와 라호르 등 펀자브의 대도시로 이주하여 전성기를 구가했다. 무굴제국기는 카슈미르의 호시절이고 봄날이었다.

뜻하지 않게 나도 그 절경을 눈에 가득 담을 수 있었다. 주요 분쟁지와 경계지 방문을 거부당한 탓이다. 델리에서 미리 통보하고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나흘이나 일정이 비었다. 이것도 알라의 뜻이려니, 산악자전거를 빌렸다.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고속도로를 따라 하루에 100킬로미터씩 달리고 또 달렸다. 차도 거의 오가지 않았다. 히말라야를 통째로 전세 낸 것 같았다. 그곳에서 태어나서 가장 큰 무지개도 보았다. 파키스탄과 인도는 물론 중국의 카슈가르까지도 닿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실제로 국경을 지운 유라시아 전도를 펴놓고 카슈미르의 위치를 짚으면 '이슬람 세계'의 한가운데 자리한다. 카슈미르의 동서남북으로 북인도와 중동과 중앙아시아와 서중국이 하나의 권역임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국가별 지도가 '문명의 지도'를 가리고 지우고 있다. 국가 간 체제가 얼마나 작위적인 질서인가 다시금 확인한다. 어떻게 세계를 좀더 '자연스럽게' 디자인할 것인가 궁리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부드러운 국경(soft border)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 모양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 간의 경제 합작을 추진한다. 카슈미르를 꼭짓점으로 삼아 세 대국의 연결망을 이어보자는 것이다. 삼국이 공동으로 카슈미르의 안보를 책임지는 연합군 창설 논의도 있다. 자연스레 군대 축소와 군비 절감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세 차례 전쟁을 촉발했던 히말라야의 화약고를 평화 지대이자 '문명 특구'로 건설하자는 것이다. 주권의 배타적 독점이 아니라 주권을 공유하고 분유하는 창발적 실험지, '정치적 낙원'을 도모한다.

물론 녹록지는 않을 것이다. 근대적 국가 이성이 이슬람적 형제애를 잠식한 지 100년이다.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 또한 70년을 헤아린다. 부드러운 국경 정책 또한 하루아침에 완수될 성질이 아닐 것이다. 이곳서도 2047년을 내다보는 긴 호흡이 절실하다.

그런데 그 부드러운 국경 정책의 당사자가 인도와 파키스탄만이 아님이 눈에 든다. 중국도 있는 것이다. 과연 중국령 카슈미르도 있던 것이다. 작년 하반기에 방문했던 카슈가르 바로 아래 동네였다. 벵골만과 아대륙을 길고 크게 우회하여 이웃 마을에 당도한 것이다. 저 히말라야 너머 동쪽이 카슈가르였다. 즉, 카슈미르는 양분된 것이 아니라 삼분되어 있다.

파키스탄과 인도만이 다투었던 것이 아니다. 인도와 중국도 경합했다. 전쟁까지 일어났다. 히말라야를 사이로 세계에서 가장 큰 두 나라가 충돌했던 것이다.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와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가 여기 카슈미르에서 착종되고 있었다. 1962년 중-인 전쟁으로 돌아간다.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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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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