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리를 개돼지로 만드는가?

[민교협의 정치시평] 권력의 사유화를 넘어서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

최근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 사유화 반대 목소리가 높다. 재벌가 사람의 '슈퍼 갑질'이 비난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베테랑>은 싸가지 없고 안하무인인 재벌 3세를 혼쭐 낸 경찰이 정의의 폭력(?)을 통하여 자본에 주눅 든 시민들에게 대리 만족감을 흠씬 선사했다. 또 2015년 대표적 영화 가운데 하나인 <내부자들>도 그랬다. 한국 사회에서 전횡하는 소위 파워 엘리트, 즉 정계, 경제계, 언론계의 권력 야합을, 조폭 깡패 이병헌이 신랄하게 폭로하며 징벌했다. 그래서 파워 엘리트들이 "개돼지"로 야유했던 대중이 권력을 조롱하는 편에 설 수 있었고, 사유화된 권력에 사유화되었던 영혼들이 맘껏 비웃을 수 있었다.

최근 야당의 촉망받던 여성 국회의원에서 촉발이 된 가족 중심 의원실 운영 문제가 세간에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여당의 윤리위원장 내정자는 '가족 채용'이 논란이 되어 윤리위원장 자리를 사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평소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아온 어떤 사회단체 책임자의 독단적 단체 운영 문제마저 시끄럽다. 이러한 권력의 사유화 문제를 비판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늦었지만 다행인 듯싶다.

그런데 정말 묻고 싶다. 과연 한국 사회가 자본과 권력의 사유화를 명실상부하게 비판하고,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고 자유로운가 하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 아무리 살펴봐도, 권력의 사유화 현상이 더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영화나 대중매체와 달리 실제 사람은 권력과 자본 앞에 더 위축되고, 그것에 자발적 충성을 다하는 영혼의 사유화 현상이 온 사회에 넘쳐나고 있다.

최근의 대학 구조 조정만 해도 그렇다. 중세 왕권 앞에서도 죽으면 죽었지 정론을 굽히지 않았던 선비와 같은 존재인 대학생이나 지성인의 상징과 같은 교수들은, 권력과 자본 앞에서 학문적 양심도, 자유와 정의의 깃발도 꺾은 지 이미 오래다. 취업의 논리로 대학과 학문이 재단되고, 권력의 논리로 진리와 양심이 사유화되고 있는 현상이 만연하다. 이익에는 생명을 걸지만, 불의에는 눈을 감고 마는 시대적 분위기가 만연할수록 권력과 자본은 내 영혼을 사유하게 된다.

▲ 영화 <내부자들>. ⓒ쇼박스

한때 사유권은 천부인권이었지만…

한때 사유권은 자본주의라는 종교에 의해 천부인권이라 불렸다. 중세 봉건 시대로부터 근대적 소유 개념을 설파하고 이를 절대화, 종교화했던 존 로크(1632~1704년)는 사유 재산권을 자연권 이론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땅이나 원료 등과 같은 자연적인 것에 노동이 부여되었을 때 비로소 사유 재산, 노동 가치가 발생한다고 믿었다.

그러한 신념에 따라, 교황이나 봉건 영주, 왕·귀족 등에 의한 임의적 징수에 대립한 사유(재산)권은 천부인권이라는 혁명적 개념으로 탄생했다. 그는 자신의 노동의 결과인 재산에 대해서 소유권자만이 배타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한다"는 식의 주장은 중세 사회를 끝장내게 할 만큼 서구 사회를 뿌리째 흔들었다.

부르주아 혁명으로 자본주의가 서구를 점령하고 19세기 천민적 자본주의가 절정에 오를 때 자본가에게 망치와 낫까지 빼앗긴 노동자들은 비로소 자신이 쏟은 노동(가치)의 작은 일부만을 임금으로 되돌려 받았음을 처참한 가난 속에서 깨닫게 되었다. 또 그 노동 가치가 자본가로 하여금 중세 영주도 누리지 못했던 부귀영화를 누리게 했음을 노동자들이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횃불을 피워 올린 사람이 바로 카를 마르크스였다.

그 시기 노동자들의 비참상은, 한국의 일제 강점기 이래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노동자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서구의 천민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19세기 후반 벨기에의 실존 가톨릭 신부, 아돌프 단스의 삶을 소재로 쓴 소설 <피에르 단스>(스틴 코닝스 감독의 영화 <단스>(1992년)도 유명하다)를 볼 필요가 있다.

단스 신부가 벨기에 면방직 도시인 알스트에 파견되었을 때, 그를 맞아준 것은 열 살도 되지 않은 듯한 어린 여자 노동자의 동사한 시신이었다. 자본과 권력에 농락당했던 여성 노동자들, 그리고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과 연대한 단스 신부는 노동자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의원이 되었지만, 의회는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에게 이미 장악되어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친기업, 반노동 관련 법률을 만들 수 있었고, 단스 신부와 같은 민주주의와 노동자 인권, 인간 해방을 부르짖는 장애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교단에 압력을 넣으면 될 뿐이었다. 이미 권력과 자본에 시녀가 된 종교 집단마저 사유화되어 있었다. 정치와 종교, 문화를 포섭한 경제, 그러한 독점적 자본주의, 제국주의화 된 국가 간의 갈등과 충돌이 낳은 거대한 결과는 양차 세계 대전이었다.

내 것이 내 것만은 아니다

양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사회는 서서히 노동과 자본의 협치에 기반을 둔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했다. 수세기에 걸친 노동자들의 가열한 인간화 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을 막기 위한 타협의 산물이 사회민주주의와 사회 복지 제도의 건설이었다.

물론, 양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많은 나라와 유럽 공동체가 사회 복지 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이,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체 이익을 앞세우는 공동체주의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유럽 집단 안보 체제를 통하여 군비 경쟁을 유럽 밖으로 내몬 결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공동체주의는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한다'는 인식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재산의 사유 개념을 대대적으로 수정하고 말았다. 특히 재산 상속은 불로소득과 유사한 개념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많이 벌수록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강탈당하는 것이 아니게 됐고, 당연시하게 되었다.

많이 벌수록 사회적 가치와 사회기반시설 등을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시인하기도 했다. 시민들의 세금으로 건설한 도로와 철도, 항공, 전력, 상하수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시민의 소비와 저축, 주식이나 펀드 구매로 형성되는 자산을 헐값에 전용하다시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대기업이다.

엄밀하게 말하여 개인의 자산을 전유하고 있는 기업(?)은 구멍가게 같은 자영업 정도에 불과하다. 기업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기업은 노동자들과 주주들, 소비자의 공유적 성격이 강해진다. 이제 로크 식의 사유권 개념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주장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대표적인 세계 기업인 삼성전자만 해도 최대 주주 이건희의 주식 비율은 3.38%밖에 되지 않고 이 씨 일가가 가진 삼성전자 전체 지분이 18%(상반기 평가액 33조 원) 정도에 불과하다.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 이재용의 주식 지분은 17.2%이다. 롯데칠성의 신격호는 1.3%, GS의 하청수는 4.8%의 주식 비율을 가지고 최대 주주의 노릇을 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재벌 대기업의 자산에는 재벌 일족의 지분보다 타인의 지분이 더 많다. 심지어 많은 한국 사람이 경험했듯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망할 기업을 살린 것은 국민의 세금이었다. 산업 구조 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업 문제에 대한 각종 대책 역시 국민의 세금으로 시행된다. 과연 그러한 사기업이 소위 사기업 오너의 전유물일 수 있는가?

그러나 많은 한국 사람들은 삼성전자를 포함한 삼성그룹은 이건희의 '것'이자, 이 씨 '오너 일가'(이상한 합성어다)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삼성전자가 소위 회사의 보유 현금을 태워버리든지 삶아 먹든지 이씨 집안의 마음이라고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 실제로 자사 주식가를 높이기 위해 2003년과 2004년에 이어 2015년에도 회사 유보금 11조 원을 들여 자사주를 소각했다. 결과적으로는 보유 현금만 날린 셈이었다.

또 이건희 회장을 2년간 생사를 알 길이 없는 사실상의 '식물인간 상태'로 만들어 놓은 채, 이재용을 중심으로 한 삼성그룹은 가족들끼리 사고팔고 하며 상속세를 조정하고 지배 구조를 인위적으로 개편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 삼성전자는 자사를 세계 기업으로 만들어 준 정보 기술(IT) 산업의 성장 동력이 떨어졌다고 보고하며 새로운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 HT(Health Technology) 산업, 즉 헬스케어 기술, 의료 자본으로의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정부도 마찬가지로 강조한다. 이쯤 되면 한국의 자본주의 정신은 아직도 서구의 19세기 자본주의적 논리에서 정체된 듯하다.

1997년 외환 위기와 산업 구조 조정 과정에서 보았듯, 산업 구조 조정은 단순한 공장 시스템의 변화가 아니다. 이는 산업 전반의 변화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람들의 삶의 방식, 대학의 학문 구성조차도 영향을 미친다. 산업 구조 조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길바닥으로 나앉게 될지, 취업을 준비했던 청년들이 지원도 하기 전에 일자리 자체가 사라지는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질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러한 산업상의 문제들이 가족의 위기, 사회적 위기를 또 얼마나 심각하게 초래할지 상상하기도 싫다. 그러한 예상 가능한 문제에 대한 대처는 기업도 정부도 하지 않고 있다.

자본과 권력의 사유화를 넘어서자

우습게도 대중 매체 드라마가 다가올 미래에 대해 훈련을 시키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정부의 대변인 노릇을 충실하게 하는 한국방송(KBS)의 드라마를 검토하면 미묘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2015년의 <파랑새의 집>과 <굿닥터>, 최근 방영이 되는 <뷰티풀 마인드> 등과 같은 작품들의 배경은 헬스케어 산업, 병원이다.

병원 드라마인 <굿닥터>와 <뷰티풀 마인드>는 단순한 병원 드라마나 의료 기업 드라마가 아니다. 시청자가 자연스럽게 HT 산업을 가깝게 느끼고, 병원 민영화와 같은 줄기세포 기술을 앞세운 의료 자본의 변화를 친숙하게 느끼도록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변화를 겪고 있는 의료 산업 경영진에는 무능력한 재벌 2세, 3세나 배우자도 으레 들어가 있다.

물론 드라마의 스토리상에서는 새로운 변화에 저항하거나, 재벌 2세 등의 지배 구조의 상속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들어있지만, 근본적인 비판은 없다. 자본의 사유화는 당연하다는 투다. 그러한 주제의 드라마화를 거치면 자본의 사유화는 내면화되고, 시청자의 취향까지 사유화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 금수저, 흙수저 문제는 용어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또한, 자본과 권력은 더는 둘이 아니다. 자본과 권력은 세습화되면서,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의 영혼마저 지배하고 있다. 흙수저는 무늬만 수저일 뿐 밥을 떠먹을 수도 없고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없다. 흙수저 자식이 금수저가 됐을 때 밥을 먹을 수 있는 구조가 된다면, 한국 사회는 양극화 현상을 극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미래조차 암울해질 것이다.

언제까지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자본과 권력의 사유화 현상을 쫓아만 갈 것인가? 우리에게 진정한 자본과 권력의 사유화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대안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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