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소도시의 개인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라고 했다. 첫 상담 전, 휴가를 따로 내기가 어려운 형편이라며 저녁 시간을 내주면 부지런히 올라오겠다고 열심히 설명하는 목소리에는 울음이 묻어 있었다. 상담하러 들어선 그녀의 얼굴엔 통화에서 느껴지던 눈물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다니고 있는 병원장의 형에게 강간을 당한 피해자였다.
가해자는 병원의 건물주이기도 했다. 가해자는 퇴근 시간 무렵 혼자 남아 뒷정리를 하던 피해자를 주사실 환자 침대에서 강간했다.
피해자는 과거에 성폭행 피해를 당하였던 경험이 있었다. 그 트라우마로 정신과 치료를 계속 받고 있었다. 규모가 크지 않은, 병원이라는 직장의 특성상 관계가 친밀했다. 피해자는 동료에게 사정 전부는 아니어도, 트라우마로 폐쇄된 공간에서 과호흡이나 경직으로 저항이 안 되는 자신의 증상을 털어놓았었다. 병원장의 형은 피해자의 상태를 악용했다.
피해자는 좁고 차단된 주사실에서 가해자를 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체격 조건이 현저히 다르다 보니 별 소용이 없었다. 피해자는 극렬히 저항할 틈도 여지도 갖지 못했고, 극한의 공포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다시 한 번 피해자가 됐다. 피해자는 충격으로 자기 손목을 긋기도 했다. 함께 자취하는 동료 간호사가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면 과다 출혈로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런저런 심적 고통을 이겨내고 고소를 결정하기도 어려웠지만, 기소까지의 과정은 더 녹록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기소가 됐고, 못된 가해자는 비로소 '피고인'이 되었다. 피해자는 뛸 듯이 기뻐했다. 가해자 처벌은 피해자의 치유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첫걸음이다. 원래는 이렇게 해사하게 웃는 청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해자는 웃음을 되찾았다.
문제는 피고인의 권리가 보호되다 못해 피해자의 인권이나 인격이 침해당하기에 십상인, 법정에서의 피해자 증인 신문 자리였다. 피고인의 변호인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십분 활용해 피해자를 '실은 너도 원했잖아' 식으로 몰기 일쑤다. 객관적 자세를 견지하며 죄의 유무를 판단해야 할 재판부는 이러한 신문을 말리기보다는 되레 피해자의 답변을 궁금해하기 쉽다.
진행하는 재판이 많아 격무에 시달리는 검사에게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것같이 적극적인 '이의 있습니다'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피해자가 피고인, 피고인 변호사와 마주하여 홀로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다.
이 사건의 피고인 변호사는 증인 신문을 시작하자마자 피해자의 심정을 박살 냈다. 증인이 간호사니까 동맥이 어디 있는지 잘 알지 않냐, 왜 동맥을 끊지 않고 정맥을 끊었냐, 죽고 싶은 게 아니었던 거 아니냐, 보여주러 그런 거냐. 잔인한 질문이 이어졌다. 피해자를 미리 만나 이런저런 단속을 했지만 이런 저급한 질문이 이어지자 피해자는 채 10분을 버티지 못하고 제가 안 죽은 게 문제인 거냐 따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재판장은 피해자에게 화만 내지 말고 대답을 좀 해보라며 채근했다. 상황이 그쯤 되자 피해자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검사가 선뜻 나서서 화제 전환이나 휴정을 구하지도 못했다. 도저히 더 이상은 침묵을 지키기 어려웠다. 재판부의 양해를 구해 피해자 변호사로서 휴정을 구했다. 그리고 휴정 시간 동안 피해자를 증인 대기실에서 진정하도록 하고 나서, 법정으로 돌아와 이런 내용의 신문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항의했다.
이후 다시 시작된 증인 신문에서 피고인 변호인의 정맥 동맥 설은 사라졌다. 하지만 못지않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강간을 당한 다음 주에 선을 보러 나갔다는데 사실이냐, 일주일 전에 강간당한 여자가 낯선 남자랑 선을 본다는 게 상식적이냐, 피해자가 유부남인 피고인에게 업무 문자를 보내며 "ㅋ" "ㅎ" "^^" 같은 부호를 썼는데 부적절하지 않은지, 왜 주사실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았는지, 실은 즐겨놓고 정신과적 증상 때문에 강간으로 사후 구성한 것이냐….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질문이 난무했다. 강간 사건 후 트라우마를 더 심각하게 앓고 있는 피해자는 이성을 잃었다. 전의도 상실했다. 종래에 피해자는 피고인 변호인의 "저항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럴 걸 그랬네요"라며 조롱하듯 답했다. 아뿔싸, 싶었다. 일상의 언어와 법정의 언어는 사뭇 달라서, 판사가 어떤 방향으로 심증을 굳히고 있느냐에 따라서 저런 답변은 강간이란 범죄의 성립 여부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비공개였던 법정에서 피해자의 트라우마 원인과 증상을 재판부에 설명하고, 재판부가 이에 대해 피해자가 저항이 어려운 상태일 수 있음을 고려하여 직접 그에 대한 질의응답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재판이 끝난 후에는 이날 피고인 변호인의 가학적인 태도와 그에 따른 피해자의 쇼크 상태 등을 지적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업무상 위계의 관계를 더 실질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도 했다. 아직 재판은 한창 진행 중이고 결과는 아직 모르는 상황이다.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휘청거리는 피해자가 잔 다르크나 여전사가 될 필요는 없다. 여린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이고 지고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운 나쁘게 폭력에 노출되어 심신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법정에서의 증인석은 홀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죄와 벌을 명징하게 가를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이자 기회다.
물고 뜯고 할 만반의 준비를 해서 나오는 피고인 측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가시 돋친 질문을 들을 귀는 반만 열고 눈은 판사를 보자. 휘청거리는 무게는 뒤에 앉은 내 변호사와 나눠서 지자. 지금 열 받아서 하고 싶은 말도 흘릴 눈물도 많겠지만, 그건 내 변호사가 서면으로든 구술로든 해줄 거라 믿어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자리가 아니다. 해야 할 말을 다하는 것이 중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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