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류 대 탈퇴로 남부 잉글랜드 대도시와 북부 잉글랜드 구 공업 지대가,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이, 청년과 노인이 서로 대립했다. 이전에도 전국 선거 때마다 감지된 것이기는 했지만, 이번 국민 투표로 영국 사회의 분단이 더욱 첨예하게 폭로됐다.
브렉시트 대 브리메인, 아군끼리의 오인 사격?
상황은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몇몇 기사를 읽다 보면, '탈퇴'에 투표한 이들은 영국독립당 같은 극우 세력의 반이민자 선동에 맞장구치는 인종주의자들로만 보인다. 반면 '잔류' 지지자들은 시대착오적인 탈퇴파 때문에 지구화 열차에서 강제 하차 당할까봐 안달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선택지가 '브렉시트 대 브리메인'이 아니라 '복지 대 긴축'으로 제시된다면, 그림은 전혀 달라진다. '탈퇴'가 다수인 피폐한 구 공업 도시의 장기 실업자도, 압도적으로 '잔류' 쪽인 런던의 젊은 계약직 노동자도 한 목소리로 '복지'와 '긴축 반대'를 선택한다. 모두 어떤 식으로든 복지 국가가 재건되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국민 투표에서 확인됐듯이 이 동일한 바람이 상반된 선택으로, 심지어는 서로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브레이크 없는 자본주의 질주의 끝은 결국 이러한 광경이다. '잔류' 지지층과 '탈퇴' 지지층 사이를 흐르는 깊은 강은 다름 아니라 (마거릿) 대처 혁명의 결과다. 대처 정권이 제조업을 포기하고 금융에 의존하는 국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영국 국민은 둘로 쪼개졌다. 같은 노동자라도 금융 자본주의의 초국적 네트워크 주변에서 어떻게든 살 길을 찾는 이들과 이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이들의 처지가 갈렸다. 이 간극은 '노동 계급'이라는 전통적 용어가 무색할 정도로 커지기만 했다.
런던 시민에게는 리버풀이나 맨체스터보다는 뉴욕이나 브뤼셀이 더 가깝게 느껴지게 됐고, 망각된 곳에 사는 망각된 사람들은 동유럽인과 경쟁하는 처지라는 강박에 빠져들었다. 신자유주의 지구화 논리의 참으로 교과서적인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금융 대도시라는 점(點)과 점 사이의 연결선(線)이 중요하지 국민 국가라는 면(面)은 거추장스러운 유산일 뿐이다. '제3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대처주의를 수용한 신노동당은 13년 집권에도 불구하고 이 근본 문제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이제 이런 질서를 갈아엎자면, 그럴 비전과 의지를 지닌 다수 집단을 구축해야만 한다. 영국 사회는 멀지 않은 과거에 이러한 집단의 등장을 경험한 바 있다. 20세기 중반에 런던, 리버풀과 맨체스터,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노동자들은 노동당과 노동조합회의(영국 노총)를 중심으로 하나의 전국적 세력으로 결집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전후 애틀리 정부가 출범해서 복지 국가의 초석을 놓는 사회 개혁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처주의는 노동 계급을 포함해 사회 전체를 갈가리 찢어놓음으로써 이런 일이 재연될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대처의 직계 혹은 방계 후예들은 끊임없이 브렉시트/브리메인 같은 선택지를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균열과 분단을 이어간다. 이런 일들이 별다른 강력한 도전 없이 계속될수록 기존 질서를 바꾸거나 최소한 이를 개선할 주체의 성장은 더욱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옛 사회주의 예언자들의 낙관과는 달리 지금 영국은 자본주의의 무덤 파는 자들이 오히려 자본주의보다 먼저 파묻혀 질식해버릴 상황을 보여준다.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맥락을 조금 바꾸고 한국어 단어들을 채워 넣으면 우리의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영세자영업자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국인들의 혼란스러운 국민 투표 결과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쳐다볼 수 없는 것이다.
세 가지 대안 : 극단적 중도와 두 현상 타파 세력
이 상황에서 어떤 대안이 있는가? 최근 유럽에서 선거 때마다 뚜렷이 확인된 세 가지 선택지가 이번 영국 국민 투표에서도 감지됐다. 아니, 브렉시트 대 브리메인이라는 이항 대립으로 인해 셋 중 어느 하나는 시야에서 가려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영국 사태의 또 다른 비극적 요소였지만 말이다.
우선 첫 번째 대안은 무엇인가? 실은 이는 대안이 아니다. 현 상태를 유지하자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즉, 2008년 이후 지구 경제의 장기 침체 그리고 이것이 야기한 숱한 파국의 조짐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역전되거나 궤도 이탈할 수 없다는, 계속 이 길을 가는 것 외에 "대안은 없다"는 입장이다. 보수당의 캐머런파도, 신노동당의 블레어-브라운파도 다 이런 입장이다. 그러고 보니 '잔류' 진영은 바로 이들의 결집체다.
좌파 저술가 타리크 알리는 이들에게 '극단적 중도파'라는 재밌는 이름을 붙여줬다(The Extreme Centre, Verso, 2015). '극우', '극좌'만 있는 게 아니라 '극중앙'도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중앙'이란 현재 형성돼 있는 세력 관계 속의 합의 혹은 균형을 말하는 것일 테고, 지난 수십 년간 이 '중앙'이란 다름 아니라 신자유주의 합의였다. '극단적 중도파'란 이 '중앙'을 절대 교리로 삼아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중앙'의 어떤 이동도 용납하지 않는 정치 세력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영국의 양대 기성 정당 내 주류가 다 이런 극단적 중도파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도 극단적 중도파이고, 샌더스에 대한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 역시 극단적 중도파의 승리다. 그리고 유럽연합은 지구 행성에서 극단적 중도파의 가장 왕성한 서식처다.
2008년 위기로 극단적 중도파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런 환상은 작년 그리스 사태로 여지없이 깨졌다. 영국 국민 투표에서도 이들은 52%를 만들어내지 못해 충격에 빠졌을지언정 아직도 48%를 결집시킬 수 있는 저력을 지니고 있다. 국민 투표 개표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당원, 조합원, 지지자들의 압도적 다수가 선택한 노동당 대표(제러미 코빈)를 몰아내는 '쿠데타'에 돌입할 정도로 이들은 여전히 저희가 주류라는 자신감에 차 있기도 하다.
이들이 몰고 갈 미래는 빤하다. 대처 혁명의 연장이다. 여기에 어떠한 인간의 탈을 덧씌우더라도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두 국민(Two Nations)'은 그냥 계속 '두 국민'일 뿐이다. 다만 신자유주의 지구화 네트워크에 포섭된 쪽 국민들이 계속 더 다수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면 만사형통이다. 한데 이번에 이들은 이 게임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너무도 결정적으로 실패했다.
어쨌든 승자는 52%의 블록이다. 이들 대부분은 항상 캐머런파 보수당 대 블레어-브라운파 신노동당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총선에서는 비가시화되거나 부차화됐던 존재들이다. 하지만 유럽연합 잔류 대 탈퇴라는 선택지가 제시되는 바람에 의도하지 않게 이들이 역사적 실체를 부여받았다. 아니 실은 이를 의도한 세력이 있었다. 그들이 곧 두 번째 대안, 극우 민족주의자들이다.
언론은 이들을 흔히 인기영합주의자들이라 손가락질한다. 선동가의 다른 표현이라면 맞는 말이지만, 진지하지 못한 정치인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극단적 중도파에 비해 이들은 현상 타파의 입장에 서 있다. 이들은 나름대로 대안이라 할 만한 방향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52%가 결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유럽에서 극우파가 급성장하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극우파 영국독립당이나 보수당의 차기 총리감 보리스 존슨 등이 유럽연합 탈퇴를 주창하며 제시한 대안은 '국민 국가'의 복원이다. 이들은 점과 점을 잇는 선으로부터 배제된 북부 잉글랜드 주민, 멸종돼 가는 제조업 노동자, 노령층에게 국민 국가라는 면을 복원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사회 집단들에게 이러한 약속은 유럽연합 안에서 언젠가는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과거 복지 국가의 기억에 부합하는 대안이었다.
반이민자 선동은 이러한 국민 국가 복원의 꿈과 연결해서 봐야만 한다. 국민 국가에는 명확한 안과 바깥이 있으며, 그것의 적은 바깥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혹은 안에 들어와 있는 바깥에서 찾을 수도 있다. 그 '바깥'이 동유럽 이민자이고, 무슬림이고, 겉만 영국인인 런던 엘리트들이다. 사실 이미 '바깥'의 존재들이었던 '탈퇴' 지지층에게 이것은 자기 현실의 도착된 투사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브렉시트/브리메인 선택지에 가린 제3의 대안 : '사회'를 복원하려는 운동
현상 타파 세력이 이들뿐이라면, 그야말로 지옥일 것이다.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브렉시트/브리메인이라는 선택지는 영국 국민들에게 위의 두 진영 외에 다른 대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은폐했다. 그래서 투표 결과 역시 지옥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3의 대안은 분명 존재한다. 극우 국가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질서로 '국민 국가'의 복원을 꾀한다면, 이 대안은 '사회'를 복원하려 한다. 대처가 "없다"고 하면서 실은 "없앤" 사회를 재건하려고 한다. 런던과 뉴욕 사이보다는 여전히 훨씬 더 인간의 거리에 가까울 런던과 리버풀의 관계를 새로 다지는 것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을 출발점이라는 입장이다.
겉만 보면 '국민 국가'를 이야기하는 쪽과 뭐가 크게 다른가 싶을 수도 있다. 현실에서 사회는 항상 국민 국가라는 그릇에 담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양 쪽 다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파괴해놓은 복지 국가의 재건을 말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국민 국가' 복원 입장에서 적대자는 그 외부 혹은 비국민들이다. 반면 '사회' 복원 입장의 적수는 사회에 기생하면서 이를 파괴하는 자본 권력이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남긴 상처와 상실감에 고통 받는 이들에게 극우 국가주의자들이 지목하는 원흉이 또 다른 가난한 폴란드 출신 노동자라면, '사회'를 복원하려는 이들이 대결하려는 상대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주인공인 거대 자본이다.
영국에서는 작년(2015년)에 노동당 대표로 선출된 코빈의 노선이 이 대안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물론 녹색당과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좌파 민족주의 세력도 있다). 노동당의 코빈 집행부는 대표 당선부터 유럽연합 국민 투표까지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참으로 부지런하게 새로운 정책들을 준비했다. 예비내각 재무장관인 존 맥도넬이 중심이 돼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의 결합을 통해 복지, 산업 정책의 재원을 마련할 방안을 만들었고, 영국 복지 국가의 골격에 기본 소득 구상을 결합시킬 가능성도 타진했다.
이것은 대처 혁명 이후 처음으로, 갈가리 찢긴 영국 사회를 다시 이으려는 야심찬 시도다. 또 전임 노동당 대표 에드 밀리밴드가 방향은 제대로 잡았으되 적절한 정책 내용을 채우지는 못했던 '한 국민(One Nation)' 비전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어쩌면 영국 사회의 분단이 국가 자체의 와해로 이어지기 전에 이를 뒤집을 마지막 기회를 살려보려는 안간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코빈은 유럽연합 국민 투표 끝나자마자 대립 전선을 시급히 '긴축 대 반긴축'으로 옮겨야 하며 국민 투표 이후 수습 과정(유럽연합 탈퇴 협상, 가을에 실시될지 모를 조기 총선 등)에서 이 싸움에 전력투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동당 안에서 돌아온 답은 예비내각 내 반코빈파의 집단 사퇴, 하원의원 172명의 대표 불신임 투표였다. 브리메인 캠페인이 실패한 책임을 코빈에게 전가하면서 이참에 코빈 집행부를 몰아내려는 당 내 쿠데타가 시작된 것이다. 주동자들은 블레어-브라운파, 말하자면 노동당 안의 극단적 중도파들이다.
반코빈 쿠데타가 최종 성공해서 블레어-브라운파가 노동당을 다시 접수한다면, 영국 국민들은 탈퇴 아니면 잔류라는 이번 유럽연합 국민 투표 같은 선택지에 영영 갇히게 될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 탈퇴 혹은 잔류의 대상은 더 이상 유럽연합이 아니라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겠지만 말이다.
반면 현상 유지도 아니고 극우 국가주의도 아닌 대안이 과연 현실 정치의 한 축으로 버티고 성장할 수 있을지는 온전히 코빈을 지지하는 당원, 조합원, 지지 대중의 진용에 달려 있다. 오직 이들이 성장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동맹의 동심원이 커져갈 때에만 유럽연합 국민 투표로 확인된 사회의 처참한 와해가 역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진정한 유럽 내 동지 포데모스가 지난 3년 동안 걸어온 길을 영국에서도 밟아나가야 하는 것이다(지금까지 스페인은 극우 국가주의 비전이 힘을 못 쓰고 있는 몇 안 되는 유럽 국가 중 하나다).
드디어 진짜 싸움이 시작됐다. 화염에 휩싸인 유럽 대륙을 뒤로 하고 덩케르크에서 마지막 영국 군함이 철수했지만, 영국의 전투는 이제야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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