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9일 기준금리를 전격 인하했다. 사상 최저 수준인 1.25%다. 한국은행이 전날 국책은행(산업은행, 수출입은행)의 조건부자본증권(코코본드)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시중에 10조 원을 풀겠다고 예고한 지 하루만이다.
앞으로의 전망은? 많은 이들의 예상은 비슷하다. 임금은 깎이고 물가는 오를 것이며, 전세값도 덩달아 상승할 것이다. 천문학적 가계 대출은 늘 것이고, 부동산 거품은 더욱 부풀어 오를 것이다. 여기에 서민들은 재벌 기업의 부실까지 떠 안게 됐다. 제 손으로 뽑은, 무능한 정부까지 책임져야 하는 처참한 대가는 덤인가?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해는 공유하는 행태의 전형이 벌어지고 있다. 낮익은 풍경이다.
실물 경기가 최악으로 치닫고, 그에 따라 시중에 돈을 풀고, 인플레에 시달리고, 다시 경기가 나빠지는 악순환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새삼스럽지 않다. 정책 결정자들이 숨겨왔던 상처는 곪아 터졌다.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왜, 언제부터 대한민국은 실패하기 시작했을까. 유권자들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박근혜 4년차 아닌, 보수 정권 9년차 최악의 위기
임기말 징후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은인자중하던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입을 열기 시작했고,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은 청와대를 정면으로 비난했다. 어버이연합 관제 데모 청와대 지시설이, 어버이연합의 핵심 간부 입으로부터 튀어 나왔다.
정권 핵심부에 있었던 전직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과 박근혜 정부 장관을 지낸 인사가 줄줄이 야당에 입당했고, 4.13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15년 6월 국회법 거부권 파동 때 여당 원내대표를 단칼에 자르던 대통령의 권력은, 2016년 5월 국회법 파동 때 완전히 달라졌다. 19대 국회 임기 이틀 전 금요일을 이용한 '꼼수 거부권' 수준으로 초라해졌다.
박근혜 정부는 집권 4년차에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다. 정치와 선거에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박근혜 대통령도 경제 위기는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국민은 계산서를 미리 뽑아들고 분노하는 중이다.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으로 최소 6000명 가량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상황인데, 그들의 부양 가족과 그들로 인해 생계를 유지했던 상권 등은 초토화될 상황이다.
당장 조선 산업 붕괴 위기의 여파로 철강 등 유관 산업도 줄줄이 위기에 처해 있다. 정부의 대책이라는 것은 비정규직을 늘리는 파견법과 서비스법, 그리고 "중동으로 가라"는 식의 공허한 외침들 뿐이다.
문제는 이같은 현상의 뿌리를 박근혜 정부 이전, 즉 이명박 정부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가 대우조선해양 사태다.
5조 원 대의 분식회계와 저가 출혈 수주, 비자금 조성 의혹 등은 주로 이명박 정부에서 발생한 일이다. 대우조선해양의 비자금 조성 의혹, 재벌 기업처럼 움직이는 준공기업의 비상식적 행태 등은 이명박 정부시절 <프레시안>이 꾸준히 제기해 왔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이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모양이다.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남상태 전 사장 연임 로비 의혹, 그와 관련된 이명박 정부 실세들의 수상한 움직임 등을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정치인과 관료와 기업인이 어떻게 한 나라의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는지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박근혜 정부 4년차 위기는, 보수 정권 9년차 위기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옛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며 2007년 정권을 회복한 뒤, 9년 가까이 '노무현 정부 탓'을 해 왔다. 이제는 그것도 통하지 않는다.
이런데도 보수 정권이 다시 등장할 수 있을까? 한때 박근혜 대통령을 도왔던 국민의당 이상돈 최고위원의 말을 들어보자.
"전 정권(이명박 정부)이 가지던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이걸 시정하겠다고 들어선 게 새로운 정권(박근혜 정부) 아닙니까? 새 정권이 3년 반 동안 한 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모두 악화시켜잖아요. 이제는 우리 야권에서는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경제 악화로 민심 떠나…보수 분열은 더욱 가시화
보수 정권 10년은 역설적으로 보수의 분열을 촉진시켰다. 2002년 노무현 정부 탄생 이후 호남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이 갈라진 것처럼, 보수 역시 지역, 이념적으로 균열 현상을 겪고 있다.
특히 동남권 신공항 문제는 보수 정부의 결정적 실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 때 홍역을 앓았던 동남권 신공항 문제로 TK와 PK는 현재 반토막이 났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공론화된 신공항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왜 신공항이 필요한지 등에 대한 진지한 접근보다는, 지역주의를 이용한 정치적 이익 차원에서 접근했던 게 화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3월 30일 동남권 신공항 건설 백지화를 선언했지만 '박 전 대표'라는 별칭으로 통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다음날인 31일 대구를 직접 찾아가 "이번 결정은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라 유감스럽다"며 차기 대선 공약으로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왜 하필 대구에서였을까? 당시에도 부산 지역과 대구, 경북 지역은 동남권 신공항 유치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때문에 부산 지역에서는 박 대통령이 대구에 "선물 보따리"를 안길 것이라며 격앙돼 있는 상황이다.
서병수 부산시장은 신공항 유치가 무산되면 시장직을 던지겠다고 말했다. 친박 중의 친박으로 꼽혔던 그의 '자기 정치' 선언은, 박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동남권 신공항 용역 결과는 오는 6월 말경 발표된다. 이에 따라 영남의 분열, 그리고 정계 개편 관련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온다.
보수의 주요 지역 기반이 둘로 쪼개지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이는 1992년 '3당 합당'이 낳은 지역 구도의 균열을 의미한다.
노선도 갈리고 있다. 크게는 영남 기반의 수구적 친박계와 수도권 중심의 개혁적 보수 인사들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유승민 의원 등 개혁파의 활동 공간이 넓어지고 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의 독단적 국정운영 탓이다. 개혁파를 멀리하고 극우파를 가까이 했던 게 화근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같은 스타일을 고칠 것 같지 않다.
'이명박근혜' 시대는 실패로 귀결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 정권을 누가 잡더라도, '이명박근혜'를 새 정권과 분리시키지 않는다면, 분노한 유권자의 관심을 끌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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