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샌더스 돌풍'을 가로막았나?

74세 시골 정치인이 일군 정치 혁명의 끝은?

"240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가 된 여성." 힐러리 클린턴이 7일(현지시간)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승리를 선언하자 외신들은 일제히 여성 대통령 탄생 가능성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자리는 가장 높은 '유리 천정'이다.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는 당선권에 근접해 있음을 시사한다. 당선 가능성은 힐러리 이전에 대선에 도전했던 35명의 여성 후보들과 그를 구분 짓는 경계다.

그러나 민주당 경선은 '당선 가능성'에서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를 상대로 한 본선 경쟁력 조사에서 힐러리를 능가하는 저력을 보인 버니 샌더스가 탈락했다.

동시에 미국 대선 레이스를 휘몰아친 '변화를 향한 열정'이 갈 곳을 잃었다. 사실상 본선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사상 최악의 비호감 후보들 중에 한 명을 뽑는 선거"가 됐다.

샌더스가 힐러리 발목을 잡았다?

샌더스의 패배는 견고한 미국 기득권의 벽을 가늠케 했다. 워싱턴 정가와 뉴욕의 월가가 '주류 중의 주류'인 힐러리를 음양으로 지원했다. 미디어도 가세했다. 주류 언론은 샌더스를 대선판에서 배척하는 첨병 노릇을 했다.

힐러리의 인기가 오르지 않는 이유를 샌더스에게 돌렸다. 대부분의 언론은 샌더스가 경선에서 힐러리의 발목을 잡은 탓에 트럼프와의 양자 구도 구축이 더뎌졌다고 분석했다.

최종 분수령이던 캘리포니아주 경선이 시작도 되기 전에 AP통신은 민주당 슈퍼대의원을 자체 집계해 힐러리가 '매직넘버(대의원 과반)'를 달성했다고 보도했다. 샌더스 진영이 반발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언론의 여론몰이는 처음부터 심각했다. 샌더스가 출마선언을 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그 소식을 21면에 실었다. 이 신문에 칼럼을 쓰는 폴 크루그먼 교수는 샌더스의 공약이 "비현실적"이라며 노골적으로 힐러리를 지지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진보적 경제학자로 이름 높은 크루그먼은 이로 인해 '진보 기득권'이라는 반발을 샀다.

워싱턴포스트는 "과거엔 히피였고 브루클린 사투리에 구깃한 양복을 입고 곱슬거리는 백발을 휘날리는 70대 사회주의자"라고 샌더스를 조롱했다. 이 신문은 "샌더스는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에 결코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1% 억만장자들에 저항하는 정치 혁명"은 이렇게 '사회주의자' 혹은 '비현실적 몽상가'의 선동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공공의료 강화, 고등교육의 의무화, 최저임금 인상 등 불평등 해소, 인종차별 철폐 공약에 호응한 유권자들의 '샌더스 돌풍'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언론은 어리둥절했다.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민주당 경선 시작과 더불어 샌더스 돌풍이 예상을 뛰어넘자 CNN은 "그동안 평론가와 기자들은 힐러리가 대선후보로 지명될 것이라는 통념에 젖어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샌더스를 갈 길 바쁜 힐러리의 발목을 잡는 훼방꾼으로 묘사하는 언론의 통념은 바뀌지 않았다.

샌더스를 지지해온 로버트 라이시 전 노동부 장관은 주류 언론이 샌더스 현상을 외면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주류 미디어들이 워싱턴의 정치 기득권과 뉴욕의 금융 기득권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거 광고라는 엄청난 매출을 챙겨야 하는 주류 언론은 '슈퍼팩(기업들이 제공하는 선거자금)'을 비판하는 샌더스가 달가울 리 없다. 라이시는 주류 언론의 이 같은 장삿속을 꼬집으며 "주류 언론이 기득권의 눈으로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건 전혀 놀랍지 않다"고 했다.

▲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7일(현지 시각)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서 가진 연설에서 지지자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화답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힐러리의 적은 힐러리 자신

샌더스는 캘리포니아주 경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남은 경선 완주를 선언했다. 그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트럼프를 이기는 것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바꾸는데 있다"고 했다. 경선 판세를 뒤엎는 기적이 아니라 민주당에 조금이라도 진보적 의제를 반영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그러나 사실상 경선 결과가 정해지자 샌더스 지지자들은 투표를 포기하겠다거나 차라리 트럼프를 찍겠다고 반발하고 있다. 샌더스 지지자들의 상실감이 일차적으로 힐러리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난달 워싱턴포스트와 ABC방송의 조사에선 샌더스 지지자의 69%가 본선에서 힐러리를 지지하겠다고 밝혔으나 트럼프를 찍겠다는 응답도 20%나 됐다. 비슷한 시기 NBC 방송의 조사에서도 트럼프를 찍겠다는 응답이 17%, 힐러리를 찍겠다는 응답이 66%였다.

결국 샌더스 지지층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느냐가 힐러리의 최대 관건이 된 가운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힐러리 구원투수로 나설 예정이다. 백악관은 오는 9일 샌더스와 오바마 대통령이 만남을 갖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샌더스의 경선 포기를 당부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으나 백악관은 "미국 노동계층에게 중요한 핵심 선거 이슈를 놓고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회동"이라며 "오바마 대통령은 샌더스 상원의원이 수백만의 민주당 유권자들을 참여시킨 특별한 성과와 열정을 향후 어떻게 이어갈지 논의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힐러리 진영도 샌더스를 '아름다운 패자'로 만들려는 눈치다. 공개적으로 샌더스에 대한 사퇴 압력을 넣는 대신 힐러리는 "샌더스는 진보적 명분을 위해 투쟁해왔고, 소득 불평등 문제를 제기한 것은 민주당에 유익했다"고 추켜세웠다.

샌더스도 힐러리가 후보로 최종 지명되면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밝혀왔기 때문에 '경선 불복' 같은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샌더스 현상'이 개인 샌더스에 국한되지 않는, 기득권 정치에 대한 중산층 이하 서민들의 불만의 표출인 만큼, 민주당과 힐러리가 샌더스표 정치혁명의 의제를 얼마나 수용하느냐가 샌더스 지지층을 단속하는 잣대가 될 전망이다. 힐러리의 적은 샌더스도 트럼프도 아닌, 기득권 정치의 표상이 된 자기 자신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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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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