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양적 완화" 언급, 구조 조정 산으로?

[해설] 대통령과 금융위원장의 엇갈린 발언

대통령의 한마디에 정부의 구조 조정 정책이 꼬여버렸다. 26일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임종룡 금융위원장 "양적 완화는 아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 26일 오전 해운·조선업 구조 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선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책 은행의 자본 확충이 필수적이다. 이들 국책 은행이 해운·조선업계에 빌려준 돈은 약 20조 원대다. 구조 조정이란 부실 기업을 정리한다는 뜻인데, 국책 은행 입장에서 이는 돈을 떼일 수 있다는 말이다. 국책 은행의 건전성이 나빠진다. 구조 조정 정국에서 산업은행 등 국책 은행의 역할이 커지리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산업 생태계 차원의 위기가 될 수 있다. '국책 은행의 자본 확충' 이야기가 나오는 건 그래서다.

그럼, 어떻게 국책 은행에 돈을 대줄 건가. 방법은 크게 두 갈래다. 정부 재정을 지원하는 방식이 있다. 또 한국은행이 직접 돈을 공급하는 방식이 있다(발권력 동원). 전자는 재정 정책, 후자는 통화 정책 영역이다. 정부가 통화 정책에 개입하는 건 논란이 될 수 있다. 중앙 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 위원장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날 "유동성 확보를 위한 양적 완화가 아니라 손실을 보전할 수 있는 자본금을 확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분명히 '양적 완화'는 아니라고 했다. 통화 정책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박근혜 대통령 "한국판 양적 완화, 긍정적 검토"

그런데 같은 날, 대통령은 다른 말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를 진행했다. 한 경제지 편집국장이 지난 총선 당시 새누리당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한국판 양적 완화'에 대해 질문했다. 박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 대답했다.

금융위원장은 기업 구조 조정을 지휘하는 정부 측 사령탑이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이다. 같은 날,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른 말을 했다. '한국판 양적 완화'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아직 모호하다. 그러나 대통령과 금융위원장이 다른 생각을 하는 건 분명하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 '상식'에 비춰보면, 임 위원장의 말은 예상 범위 안에 있다. 현행 법에 따르면, 한국은행이 직접 산업은행에 돈을 공급할 방법은 없다. 한국은행법은 정부가 통화 정책에 개입하는 걸 규제한다. 산업은행법 역시 한국은행으로부터 직접 돈을 받는 길을 막아뒀다.

역사적 맥락이 있다. 한국은 전쟁을 겪은 나라다. 한국전쟁 당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 독재 시절 역시 지독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모두 정부가 지나치게 통화 정책에 개입했던 탓이다. 경제학 교과서가 위험하다고 가르친 정책이다. 군사 정부 시절, 친정부 성향 경제학과 교수들까지 한국은행 독립을 요구하는 집단 서명에 참여했던 이유다. 한국은행이 지금 수준의 독립성을 누리게 된 건, 1997년 외환 위기 이후다. 그전까지는 경제 부처 장관이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겸했다. 1997년 말 한국은행법을 고치고 나서야 한국은행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게 됐다.

'한국판 양적 완화'를 위해 관련 법을 바꾼다는 건, 이런 역사적 과정을 뒤엎는다는 뜻이다. 그럼 안 되나. 물론, 안 될 건 없다. 경제학은 자연과학이 아니다. 시대 상황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중앙 은행의 독립성'이 자연 법칙은 아니다.

'여소야대' 무시하는 박근혜 대통령?

문제는 민주적 절차다. 20대 국회의원 선거 이전이었다면, 대통령이 양적 완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여당이 과반 의석을 얻는 걸 전제로 말이다. 그리고 법을 바꾸면 된다. 하지만 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은 예상과 달랐다. 여당이 과반 의석을 얻지 못했다.

의석을 가장 많이 확보한 더불어민주당의 경제 사령탑은 양적 완화에 극히 부정적이다. 중앙 은행에 대해 가장 강도 높은 독립성을 보장하는, 독일식 질서 자유주의 모델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제3당인 국민의당 역시 대체로 시장주의 색깔이다. 경제학 교과서의 논리에 충실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양적 완화에 찬성하기가 어렵다.

'여소야대' 상황이 바뀌지 않고서는, '한국판 양적 완화'를 추진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대통령은 왜 한국판 양적 완화를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 했을까. 같은 날, 국민의당 안철수 상임공동대표는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의 강연을 듣고 나서 "박근혜 대통령이 양적 완화가 뭔지 모를 것 같은데요? 하하하. 아유 참…"이라고 말했다. 물론 비꼬는 말이다.

수많은 일자리, 막대한 세금이 걸려 있는 구조 조정 정책이 순식간에 희화화돼 버렸다. 박 대통령이 너무 쉽게 뱉은 말 때문이다. 대통령과 몇몇 정치인에겐 그저 말실수, 아니면 웃음거리로 끝날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곧 거리로 내몰릴 노동자들에겐 그게 어떻게 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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