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딸들이 '게임' 좋아했다면…"

[백년포럼] "1997년 경제·외환 위기와 한국경제의 진로"

16년만의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 마침 헌법에 '경제 민주화' 조항을 넣은 주역이 야당을 이끌었다. '경제 민주화', 기대해도 될까.

핵심은 결국 재벌 개혁이다. 하지만 재벌이 이번 선거 결과 앞에서 딱히 긴장하는 기색은 없다. '경제 민주화' 목소리가 전보다 더 높아질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게다.

재벌들에겐 개혁에 대한 내성이 있다. 계기는 1997년 IMF 외환 위기다. 재벌 탓에 불거진 위기였다. 그래서 개혁 목소리도 높았다. 하지만 승자는 결국 재벌이었다. 위기에서 살아남은 재벌은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권력집단이 됐다.

개혁 목소리를, 재벌이 두려워하지 않게 된 이유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재벌 개혁 '요요 현상'


IMF 위기 이듬해 출범한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일했던 이동걸 동국대학교 초빙교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상 첫 정권 교체, 그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재벌 개혁 실무를 담당했던 경험이다. 김대중 정부 초기에는 재벌 개혁이 어느 정도 진행됐었다.

하지만 곧 반동이 왔다. 이 교수는 김대중 정부 출범 첫 해였던 1998년 6월 지방선거가 중요한 계기였다고 했다. 선거를 앞두고 개혁의 고삐가 느슨해졌다. 투자, 고용 등을 위해 일단 재벌과 타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탓이다. 재벌 책임론 때문에 숨죽이고 있던 재벌들도 이 무렵부터 자기 목소리를 냈다. 재벌 친화적인 관료 및 정치인들이 개혁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 결과, 일종의 '요요 현상'이 생겼다. 줄을 감아서 던지면 되돌아오는 장난감 요요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는 개혁이라는 뜻이다. 아니, 원래 있던 자리보다 더 후퇴했다. 재벌의 영향력이 세진만큼,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생명보험사 상장 기준 변경, 횡재한 삼성

이어 집권한 노무현 정부에선 결국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라는 말이 나왔다. 거대한 반동을 온몸으로 뒤집어쓴 당사자가 이 교수다. 노무현 정부 당시 삼성생명 상장 논란으로 그는 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에서 돌연 물러났다. 삼성생명 상장 문제는 삼성 지배구조 문제의 핵심이었다. 또 이 교수는 삼성생명의 변칙적인 회계처리 사실을 밝혀내 삼성그룹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이 교수가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에서 물러나면서, 삼성생명 상장 문제는 철저히 삼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생명보험사 상장 기준이 변경되면서, 상장 이익을 주주가 독식하게 됐다. 당초 방안은 보험 계약자와 주주가 '8 대 1' 또는 '9 대 1'로 상장 이익을 나눠 갖는 구조였다. 그게 '0 대 10'으로 뒤집어졌다. 삼성은 가만히 앉아서 조 단위의 횡재를 했다. 외환 위기 이후,더 강력해진 재벌의 영향력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후 이 교수는 이명박 정부에서 금융연구원장을 지냈지만, 역시 임기 중간에 물러났다. 당시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 화제가 됐었다. "연구원을 정부의 'Think Tank'(두뇌)가 아니라 'Mouth Tank'(입) 정도로 생각하는 현 정부에게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한갓 사치품일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그 뒤로 이 교수는 계속 대학에 있었다. 지난달 3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진행된 제6회 백년포럼에서 그가 발제를 했다. "1997년 경제·외환 위기와 한국경제의 진로"라는 주제다. 아울러 이날 포럼에는 유철규 성공회대학교 교수가 토론자로 참가했다.


▲ 이동걸 동국대학교 초빙교수ⓒ프레시안(김윤나영)

"박정희 죽어도 세상은 그대로였다"

이 교수의 발제는 두 차례의 격변기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첫 번째는 1987년 민주화 투쟁이다. 두 번째는 1997년 외환 위기다. 두 시기를 거치며 한국 경제는 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기존 체제를 넘어서는 대안을 준비한 세력이 없었기에, 한계가 분명했다. 재벌의 지나친 영향력은 그 결과물이다. 만약 한국 경제의 경로 변경을 미리 준비했던 세력이 있었다면, '재벌 공화국', '헬조선'의 현실은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이날 행사를 준비한 다른백년 창립준비모임의 문제의식과도 통한다.

1987년은 정부와 재벌 사이의 힘의 관계가 바뀐 분기점이다. 그전에는 기본적으로 관치경제였다. 박정희 체제의 완벽한 연장선이었다. 박정희가 죽은 건 1979년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관치 경제라는 기본 틀은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경제 노선이 박정희가 살아 있던 당시에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 이듬해인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한다. 말 그대로 화학, 철강, 기계 등 중화학공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한다는 뜻이다. 이는 군수산업 육성과도 맞물려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주도한 이런 투자는 1970년대 말이 되면서, 사실상 실패로 드러났다. 여기에 1978년 2차 오일쇼크까지 겹치면서 경제는 파국으로 흘렀다. 이 교수는 "(1979년) YH사건, 부마항쟁도 이러한 경제적 실패와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이런 사태는 결국 권력 내부자에 의한 박정희 사살로 일단락됐다.

이 교수는 "당시 박정희 제거가 박정희의 경제적 실패에 기인했다면 박정희 제거 후의 체제는 '박정희 경제체제'를 바꾸는 새로운 체제로의 변화였어야 할 텐데, 불행하게도 바뀐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제거는 박정희의 경제 실패에 상당히 기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박정희 제거'로 끝나고 말았다"라는 설명이다.

이어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구(舊)체제의 연속"이었던 건 당연했다. 다만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중화학공업에 대한 구조조정은 불가피했다. 기본적으론 관치 경제였다. 하필 이 시기, 한국 경제는 최대의 행운을 누린다. 유가, 금리, 환율 등이 모두 낮은 이른바 '3저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며 자화자찬했는데, 이는 외부 변수에 기인한 것이었다.

"'한강 유람선' 이후의 비전이 없었다"

▲ 유철규 성공회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성현석)
토론자로 나선 유철규 교수가 부연 설명을 했다. 경제 측면에서 1987년은 구체제가 내건 비전이 종식되는 순간이었다. "잘살아보세" "선성장후분배" "산업국가 건설" 등이 1970년대 정부가 산업화를 위해 대중을 동원하며 내건 구호들이었다. 당시 목표는 1987~1988년 사이 대부분 달성됐다. 한강에는 유람선이 떴고, 마이카 시대가 열렸으며, 아파트가 널리 보급됐다. 이들은 1970년대 정부가 경제 성장 이후의 장밋빛 미래라고 묘사했던 것들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집권 세력은 그걸 제시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따라서 1980년대 말의 체제 위기는 필연이었다는 게 유 교수의 설명이다.

요컨대 197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이 했던 것처럼 노동자들을 마냥 힘으로 찍어 누를 수도 없었다. 주먹으로 때린 뒤에는 비전으로 달래야 한다. 하지만 그게 없다. "지금 한강에 유람선 떠다니지 않느냐. 언제까지 더 참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답할 말이 없다. 하필 경제가 호황이었으므로, 위기감을 조성해서 대응할 수도 없었다.

집권 세력뿐아니라, 저항 세력 역시 한계가 있었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열망을 담아낼 정치력이 없었다. 1987년 이후 역사를 규정한 조건이다.

재벌의 위험, 처음 인정한 게 1986년

그 사이, 재벌은 꾸준히 성장했다. 그러나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이 지닌 위험에 대해서는 대체로 둔감했다. 재벌의 폐해를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게 1986년 말이다. 이때 공정거래법을 개정하여 '경제력집중 억제' 조항을 신설했다.

하지만 당시 경제가 호황이었던 탓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집권 세력뿐 아니라 저항 진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교수는 "첫 번째 대변혁기인 1987년 당시 정치민주화 세력은 있었으나 경제민주화 세력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1987년 6월 항쟁은 정치적 민주화 항쟁에 한정된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경제적 이슈가 변화의 동인이 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경제민주화 의제도 없었고 노동자, 서민, 중소기업 등 경제적 약자의 이익을 수렴하고 대변할 세력도 없었다"라는 설명이다.

"김종인의 '경제 민주화' 조항, 25년 동안 한 게 없었다"

1987년 이후, 정부와 재벌 사이의 관계는 조금씩 뒤집어졌다. 재벌의 힘이 세졌는데, 경제민주화 세력이 없었으므로, 그저 재벌에게 휘둘리기만 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게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도입된 경제 민주화 조항(헌법 119조 2항)이다. 재벌이 성장하고, 기존 역관계가 뒤집어지는 시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이 경제 민주화 조항 도입을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이 교수의 평가는 매서웠다. 그는 "경제 민주화 조항이 2012년까지 한 게 없다"고 잘라 말했다. 2012년은 경제 민주화 논쟁이 달아올랐던 해다. 마침 대선이 있었고, 재벌의 골목상권 침해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고조돼 있었다. 이 교수의 평가는 타당하다. 실제로 2012년 이전에는 헌법에 경제 민주화 조항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25년 가까이 사문화돼 있던 내용이었다.

"부실 재벌만 문제"라고?

재벌은 '문어발'처럼 사업을 확장하고, 이를 규제하는 논리와 이념, 제도는 없었으며, 집권 세력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로 노태우, 김영삼 정권 10년이 지나갔다. 이들 정부는 재벌을 사실상 방치했다. 노태우 정권의 개혁은 부동산 정책에만 국한됐다. 김영삼 정권의 개혁은 금융실명제와 금리자유화를 제외하면, 대부분 OECD 가입을 위해 서둘러 실시한 시장 개방과 규제 완화였다. 재벌이 몸집을 불리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그 끝에, 1997년 외환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비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재벌 문제에 국한하면 더 그렇다. 역사상 첫 정권 교체를 이뤄낸 김대중 정부는 "부실 재벌 처리"에 전념했다. 요컨대 재벌 자체가 아니라, 부실 재벌만 문제라는 게다.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이 낳을 수 있는 다양한 위험에 대한 인식은 없었다. 그 결과가 삼성 공화국이다. 생존 재벌은 더욱 비대해지고 강력해졌다.

당시 청와대에서 정책을 담당했던 이 교수 역시 판단이 헷갈린다. "김대중 정부, 그리고 개혁 진영이 재벌을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봤는지, 재벌을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봤는지, 재벌이 원하는 것을 솔선해서 다 해결해주는 '재벌 하수인'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분명한 건, 역대 모든 정부가 국정 운영에 재벌을 적극 참여시켰다는 점이다.

선거 앞두고 중단된 재벌 개혁비난하며 의존하는 국민 정서


여기엔 국민 정서도 한 변수였다. 다수 국민은 재벌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재벌 의존적이다. '오너'가 있어야 기업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강했다. 부실재벌 총수에 대해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정작 재벌 총수의 방만 경영으로 인한 피해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들이 말이다. 결국 1998년 6월 지방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정부의 재벌 개혁은 동력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요요 현상'이 있었다. 위기 주범으로 몰려 숨죽였던 재벌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잠시 밀려났던 게 제자리로 온 셈이다. 마치 요요 장난감처럼. 아니, 오히려 재벌은 더 강해졌다. 개혁 목소리에 대응하는 법도 터득했다. 한마디로 개혁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생존 재벌은 정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권력이 됐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낙수 경제'와 '빨대 경제', 그리고 봉건 영주

이 교수는 '낙수 경제'와 '빨대 경제'라는 말로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상황을 설명했다. 대기업에게 모든 혜택이 돌아가는 게 '낙수 경제'(trickle-down economy)다. 대기업의 곳간을 채우고 나면, 흘러넘치는 돈이 중소기업 등 약자에게 돌아간다는 논리다.

'빨대 경제(trickle-up economy)'는 중소 하청기업의 희생 위에서 대기업이 성장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한국 산업 생태계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없는 불모지가 됐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계층 이동이 어려워지면서 신분이 고착됐다.

이 교수는 "한국에는 재벌이라 불리는 30~50명의 봉건 영주가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자기 영토 안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아울러 자기 영토에 종속된 중소기업까지 다스린다. 이들 봉건 영주들은 대를 이어 세습하고, 그들을 정점으로 신(新)신분사회를 형성한다.

수출 주력 품목은 10년째 그대로, 부자는 모두 상속자

이 대목에서 유 교수의 설명도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주요 산업은 지난 10년 사이 변한 게 없다. 기업과 정부, 언론이 한목소리로 '반도체 이후의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자고 했지만, 그렇다. 13대 주력 수출 품목은 지난 2006년 이후 순서도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다. 상위 10대 그룹 구성 역시 KT가 빠지고 현대중공업이 포함된 정도를 빼면 변화가 없었다. 세계 400대 부호에 포함된 한국인 5명은 모두 상속자다.

활기를 잃어버린 채 늙어가는 경제다. 새로운 도전자는 싹이 시들고, 기득권의 벽만 높아지는 체제다. 먼저 노령화한 일본조차 한국보다는 활기가 있다. 세계 400대 부호에 포함된 일본인 5명은 모두 자수성가 부자다.

이 교수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IMF 위기 이후, 한국 경제에서 그나마 혁신이 이뤄진 게 정보기술(IT) 분야다. 최근 주춤하지만 게임 산업의 성장이 한동안 두드러졌다. 이 교수는 "재벌가 딸들이 빵 대신 온라인 게임을 좋아했다면"이라고 물었다. 그러면, 온라인 게임 산업이 초토화됐으리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재벌이라는 봉건 영주를 정점으로 한 신분사회가 된 현실은, 앞서 두 차례의 격변기에 모두 경제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갖고 있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벌 체제를 넘어서는 경제 민주화 전망을 그리고 준비하는 진영이 없었다. 그게 이 교수의 핵심 문제의식이다.

재벌 개혁이 어려운 이유

▲ 이동걸 동국대학교 초빙교수. ⓒ프레시안(김윤나영)
재벌 개혁, 경제 민주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이 교수가 아주 잘 안다. 그는 "'분산된 다수의 큰 이익(국민의 이익)'과 '집중된 소수의 작은 이익(재벌의 이익)'이 충돌할 때 후자가 승리하는 현실적인 인센티브 구조"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대부분의 첨예한 재벌 개혁 이슈에서 재벌들이 항상 매우 열심히 싸우고,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싸우고, 그리고 늘 이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진 내용이다.

"아무리 개혁의 성과가 크더라도 국민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아주 작으며, 아무리 재벌의 폐해가 크더라도 국민 개개인이 나누어 부담하는 직접적인 손해는 매우 작으므로 대다수 국민들은 침묵한다.


침묵하는 다수는 항상 재벌 편이거나 재벌 편으로 간주되었고, 재벌 개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와 지지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침묵하는 다수를 대신해서 싸우는 개혁파는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며 대의를 위해서 싸우고, 재벌과 친재벌파는 이익을 위해서 싸운다. 후자가 항상 다수이고 유리하다."

명백히 불리한 싸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더구나 지금은 개혁이 더 어려워졌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 개인이 사라지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총수 개인이 생각을 바꾸면 해결되는 문제가 많았다. 이제는 다르다. 재벌 문제는, 이미 구조적이다.

비례대표, 왜 줄였나

결국 국가와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구조적인 문제이므로, 구조적으로 풀어야 한다. 그러자면 정치 개혁이 필수다. 이 교수는 비례대표제 대폭 확대를 특히 강조했다. 상대적으로 다양한 집단이 정치에 참여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것만 되도, 재벌이라는 봉건 영주들은 상당 부분 민주적 통제 범위 안에 들어온다. 하지만 20대 국회에서 비례대표는 오히려 줄었다. 안타까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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