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죽이고 요리한 남자…인간인가, 괴물인가?

[프레시안 books] <엄마를 요리하고 싶었던 남자>

<향수>(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열린책들 펴냄)의 그르누이가 현존한다면 정신의학자들은 어떤 진단을 내렸을까. 누군가는 그의 살인을 어머니에게서 얻지 못한 모성애를 향수라는 상징으로 대체하고자 한 욕망으로 해석할 것이다. 향수에 관한 집착에 포인트를 얻어 그를 편집증 환자로 설명하기도 쉬울지 모른다. 대중 다수는, 그저 그를 정신장애를 앓는 연쇄살인마로, 괴물로 기억하고 잊을 것이다.

사람 속에 괴물이 산다. 신에 의존하던 우리는 근대에 들어 인간 정신을 탐구해, 정신 세계라는 우주를 우리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이제 우리는 정신 질환을 앓는 이에게 귀신이 깃들지 않았음을 알고, 정신 질환자 가운데 극히 일부는 이전에 정체를 알기 힘든 폭력성에 노출되었음도 안다.

그러나, '안다'는 건 경험과 다르다. 극단적으로 정신 우주가 무너진 사람의 세상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의 세상과 유리되어 있다. 그 우주를 접하기란 극히 어렵다. 극단적인 광기에 휩싸인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극소수에 불과하니 접하기 어렵다. 접한다면? 우리의 우주와 충돌해 파멸한다.

<엄마를 요리하고 싶었던 남자>(마갈리 보동 브뤼젤·레지 데코트 지음, 이희정 옮김, 푸른지식 펴냄)는 괴물에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다. 저자 마갈리 보동 브뤼젤은 프랑스의 대표적 정신의학 전문의이자 법의학자로, 20년 넘는 정신질환 범죄자와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에 12편의 끔찍한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의 이야기를 스릴러 소설 <38 병동>을 쓴 레지 데코트가 정리해 이 책을 만들었다.

그렇다. 이 책은 끔찍한 이야기다. "엄마를 요리하고 싶었던"이라는 설명문은 사실 그대로다. 뤼드비크는 엄마의 목을 자른 후, 머리를 요리했다. 그는 엄마가 가족을 모두 죽이려 한다고 믿었다. 엄마는 생전에 요리를 잘했으나, 가족을 죽이려 한 후 쓰레기 같은 요리만 줬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복수로 그는 엄마를 요리했다. 뤼드비크는 자신의 끔찍한 방법은 후회했지만, 엄마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주목할 건 그와 상담한 저자의 태도다. 그는 뤼드비크의 엄마가 실제로 어떠한 태도를 가졌는가는 명쾌하게 정리하지 않는다. 대신 엄마에 관한 뤼드비크의 혐오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찾아본다. 그제서야 뤼드비크가 피해 망상에 시달린 환자였음을 확인한다.

이 혐오스러운 인간이 환자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런 이야기가 11편 더 이어진다.

앙리는 명문대를 졸업했고, 금융계에서 일하는 전도유망한 자였다. 다만,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 후 항우울제를 먹은 것 정도가 다른 이와 약간 다른 점이었다. 어느 날 그는 여드름 치료를 위해 피부과를 찾았다. 그런데 약을 먹은 후 앙리는 강한 불안감을 느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환청이 들렸다. 그는 머리에 병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부과 의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앙리는 그와 같은 의사가 사람을 치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시는 치료하지 못하도록, 앙리는 의사를 살해하고 몸을 토막냈다. 앙리는 자신이 사회 규범에 반한 행동을 했음을 명확히 인지했고, 사건 몇 달 후 자수했다. 그러나 자신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사건 조사 결과, 그 의사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흥미를 채우기 위해 책을 손에 잡았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부끄럽지만 말이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면 정체를 알기 힘든 인간에 관한 관심과 존중이 커진다.

책은 '인간이란 어떠하다'는 식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주지 않는다. 담담하게, 다양한 상황에서 극단의 행위를 저지른 그들의 말을 기록한다. 그런데 이 괴상한 이야기들을 읽을수록 혐오감은 사라지고, 인간이라는 우주가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게 된다.

▲ <엄마를 요리하고 싶었던 남자>(마갈리 보동 브뤼젤·레지 데코트 지음, 이희정 옮김, 푸른지식 펴냄). ⓒ푸른지식
우리는 극단적 살인마의 행동을 뉴스로, 각색된 영화로, 소설로 접한다. 그럴 때마다 그들과 공존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한발 더 나아가서 나오는 논쟁도 새롭지 않다. 사형제를 존치해야 한다거나, 사회가 괴물을 낳았다는 일차원적인 이야기가 고작이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이런 모든 주장에 의문이 든다. 과연 사람은 그렇게 쉽게 판단 가능한 존재인가.

우리는 바다에서 은하계를 여전히 탐험하듯, 사람이라는 우주 역시 완전히 알지 못한다. 저자와 같이 임상 경험이 풍부한 이도 책 곳곳에 고백처럼 '약물 치료가 편견처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이들에 관한 '치료'가 어떤 식으로 효과를 얻었는가도 설명한다.

저자가 상담하던 초기에는 광포한 공격성을 드러낸 이가 그를 다시 만나 환하게 웃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는 아직 질환을 앓은 이의 흔적을 약간은 보이지만, 자신을 옥죄던 정신 감옥에서 벗어나 우리와 다시 섞여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얼핏 괴물로 보이던 이를 잘 치료하면 다시 사람의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이 메시지는, 비록 희미하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일관하는 주제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잔혹한 살인마이며, 동시에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다. 괴물이라는 한 단어로 파편화하기 매우 어렵다. 그들은 어쩌면 칼날처럼 예리한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다, 떨어지지 말아야 할 쪽으로 떨어져버린 존재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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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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