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수치는 '계몽 군부'의 얼굴마담이다!

[유라시아 견문] 삼총사 : 미얀마의 봄

아웅산

영국이 만달레이를 재점령하자 아웅산은 총구를 돌려세웠다. 비밀리에 영국과 내통했다. 영국이 랭군(양곤)으로 진격하면 내부에서 합세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작전은 5월 3일 단행되었다. 유럽에서 히틀러가 자살한 지 이틀 후였다.

버마독립군은 출정하는 척하다가 회군했다. 일본을 향해 총을 쐈다. 배반이고 반란이었다. 주구가 주군을 물었다. 아웅산은 일본 군복 차림 그대로 영국 사령관을 만났다. 기민하다고도, 기만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혹은 둘 다였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기회주의자였다. 도덕이 통용되지 않는 난세였으니, 도덕적 판단은 삼가기로 한다.

유럽에서 독일이 패배하고 아시아에서 일본이 패전하면서 유럽은 재차 동남아시아로 돌아왔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속속 복귀했다. 그러나 대동아의 '해방'을 맛본 동남아의 탈식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인도차이나서도 인도네시아에서도 무장 투쟁이 일어났다. 일본 점령 하에서 군사적으로 더욱 단련되었다.

본국의 사정도 달라졌다. 특히 영국 국민들은 '제국의 영광'에 넌덜머리를 냈다. 7월 선거에서 노동당이 압승했다. 내정에 집중하라 했다. 복지 국가를 만들라 했다. 대영제국은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식민지는 점점 뒷전이 되었다. 매듭을 잘 짓지도 못했다. 곳곳에서 대영제국의 파편으로 분단/분할 체제가 들어섰다.

중동에서는 팔레스타인이 갈라졌다. 그들의 땅에 이스라엘이 삽입되었다. 유럽인과 유태인의 모순을 중동으로 배출시킴으로써 아랍인과 유태인 간 분단 체제가 생겨났다. 남아시아에서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었다. 훗날 파키스탄마저 분화하여 방글라데시가 생겨났다.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이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가 떨어져나갔다. 미얀마도 비슷한 궤적을 따를 뻔했다. 버마 국, 샨 국, 카렌 국, 카친 국으로 더 잘게 쪼개질 수 있었다. 영국은 아웅산을 버마 족 대표로만 인정했다. 소수 민족을 따로 독립시켜 영향력을 지속하려는 흑심이었다. 기독교 신도가 다수인 카렌 국을 영연방으로 편입시켜 홍콩처럼 통치하려 했다.

아웅산은 '버마연방공화국(Union of Burma)'으로 응수했다. 각 소수 민족 대표들을 찾아가 달래고 얼렀다. 도출된 것이 1947년 2월 빤롱(Panlong) 협정이다. 빤롱은 가장 많은 소수 민족이 살고 영토도 가장 넓은 샨(Shan) 주의 산간 마을이다. 이곳에서 각 주의 고도 자치를 허용하는 연방제 국가를 합의한 것이다.

그래도 버마 족에 대한 의심이 말끔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부 수립 10주년이 되는 1958년에 연방 탈퇴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 또한 아웅산의 기민한 방책이었는지 기만적인 책략이었는지는 판단하기 힘들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문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협정서에 날인했던 당사자가 5개월 후 암살되었다. 열세 발의 총알이 아웅산의 몸에 박혔다. 초대 정부의 예비 국무위원 9명도 현장에서 즉사했다. 7월 19일의 비극은 '순국자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 아웅산. ⓒwikipedia.org
서른 두 해, 아웅산의 삶은 짧고 굵었다. 학창 시절은 공부벌레였다. 영어와 버마어에 능하고, 팔리어까지 섭렵했다. 독서 습관이 유명하다. 묵독이 아니라 암송했다. 불교 경전을 읽듯이 영어책을 소리 내어 읽어갔다. 랭군 대학 총학생회장을 거쳐 전국 대학생 위원장이 되었다. 이때 네루와 친분을 맺는다. 전국 대학생 의장이 되고 만달레이에서 열린 첫 총회에 네루를 초청한 것이다.

네루는 약관의 아웅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40년 인도 국민회의 대의원 총회에 초대했다. 간디와 네루의 옆자리에 서면서 아웅산은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곧장 영국 식민 경찰의 표적이 되었고, 낭인 신세가 되었다. 그를 낚아챈 것이 대일본제국의 스즈키 대령이었다.

그를 암살한 쪽은 우파 진영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 마지막 총리를 지냈던 노정객의 앙갚음이었다. 사전에 영국과 교감이 있었다는 음모설도 있지만, 문서로 밝혀진 것은 없다. 꼭 그랬을 것 같지만은 않다. 버마공산당의 약진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아웅산은 활용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좌파 또한 아웅산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카렌 족도 카친 족도 그랬을지 모른다. 총구 여럿이 아웅산을 겨누고 있었다. 방아쇠를 먼저 당긴 쪽이 우파였을 뿐이다.

오래 살았더라면 이집트의 나세르,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베트남의 호치민에 견줄만한 세계사의 주역이 되었을지 모른다. 역사적 인물 대신 상징적 신화가 되었다. 양곤에는 보족 아웅산 시장이 있다. 보족(Bogyoke)은 장군이라는 뜻이다. 보석, 수공예, 의류 등 수백 개의 가게가 밀집해 있다. 남대문시장쯤 되겠다.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경기장 이름도 보족 아웅산 스타디움이다. 그의 초상화와 사진을 파는 가판대도 많다. 國父(국부)의 존엄을 누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름을 남겼다. 꼬물꼬물 두 살배기 딸이 일흔이 되어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아웅산 수치'라는 이름, 혈통이야말로 그녀의 최대 정치 자산이었다.

우누(U Nu)

1948년 1월 4일, 오전 4시 20분. 유니온 잭이 내려갔다. 미얀마의 깃발이 올라갔다. 꼭두새벽에 행사가 열린 것은 미얀마의 민간 신앙에 따른 것이었다. 기운이 가장 좋은 때라고 했다. 영국인들은 납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제 미얀마의 주인은 미얀마 인이었다.

신생 독립국의 수장이 된 인물이 우누다. 우연이었다. 천운이었다. 다른 일정으로 예비국무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의 부재를 확인한 암살자들이 자택까지 찾아갔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홀로 살아남아 초대 총리가 된 것이다. 전망은 밝지 않았다. 미얀마에 대한 오해가 없지 않다. 탈식민 동남아국가들 가운데 가장 유망했다는 것이다.

초창기 리콴유가 싱가포르를 '버마처럼 잘 살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이 널리 회자된다. 식민지 시절 활황을 구가했음이 사실이다. 인도와 동남아를 잇는 대영제국의 이음새였다. 세계적인 쌀 수출국이자 석유 생산국으로 파운드가 흘러들었다. 랭군 대학 역시 동남아 최고 대학의 지위를 누렸다.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도 조지 오웰도 버마에서 한때를 보냈다. '버마식 사회주의'로 낙후한 국가가 되고 말았다는 비난인 셈이다.

과장이 없지 않다. 군사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상상된 과거'를 동원한다. 해방 공간, 미얀마는 허허벌판이었다. 영국과 일본, 동서의 양대 제국이 충돌하면서 식민지 근대성은 사그리 사라졌다. 300명의 무장 세력만 있으면 양곤을 제외한 어느 도시도 탈취할 수 있는 무정부 상태였다.

한때는 제2도시 만달레이마저도 카렌 족과 버마공산당이 점령했다. 나라를 이끌 예정이었던 가장 우수한 지도자들을 한순간에 잃은 채, 또 수많은 내부 구성원들이 분열된 상태로 신생 정권이 출범했던 것이다. 출발부터 고난의 행군이었다.

▲ 우누. ⓒwikipedia.org
우누는 1907년생이다. 독실한 불교 집안의 자제였다. 전 생애에 걸쳐 불교의 영향이 물씬하다. 양곤 대학 시절 별명이 '철학자 누' 혹은 '돈키호테'였다. 홀로 전통 복장을 고수했다. 그럼에도 영어 공부에는 열성이었다.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꿈이었다. 극본을 써서 영국 문단에 응모했다. 그 원고를 버나드 쇼에게 직접 보냈다는 일화에서 돈키호테의 기질이 잘 드러난다. 방학이면 혼자 시골 방을 얻어 집필에 전념했다고 한다. '버마의 버나드 쇼'가 되겠다며 허세도 부렸다.

아웅산과는 막역한 선후배 사이였다. 1936년 대규모 학생 시위도 둘이 주도한 것이다. 영국은 우누에게 유학을 권했다.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그를 영문학으로 유혹했다. 단칼에 거절했다. 도리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연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때는 공산주의에 심취한 모양이다. 이번에는 '공산주의자'라고 자처하고 다녔다.

그럼에도 레닌이나 스탈린을 흠모하지는 않았다. '버마의 고리키'라고 했다. 역시나 작가적 정체성이 강했던 것이다. 신실한 불자였기에 과학적 유물론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은 '사회주의자'로 낙찰이 되었다. 우누는 '불교 사회주의자'였다. 총리로서 좋은 업(Karma)을 짓고 가겠다고 했다.

그는 미얀마를 '불교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불교에 바탕을 두고 사회주의를 접목시키려 했다. 미얀마의 장래로 표방한 피다우타(Pyidawtha) 또한 낙토 혹은 정토로 풀 수 있는 개념이다. 정갈한 땅이자, 즐거운 땅이다. 산업 국가보다는 농업 사회주의, 불교 경제를 지향했다.

실제로 1950년대 불교 중흥이 역력했다. 식민지 시기 사라졌던 사찰들과 불교 학교(Sangha)들이 대거 부활했다. 일국주의에 그치지도 않았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대규모 국제 불교대회를 개최했다. 스리랑카부터 라오스까지 수많은 승려와 불교학자들이 회합했다. 세계 3대 불교 성지의 하나로 꼽히는 파간의 위상을 십분 활용했다.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동남아를 잇는 인드라망의 허브였다. 불교를 공유하는 문명적 공속감으로 탈식민 국가들의 민족주의를 다스렸다. 불살생과 비폭력의 불교 사상은 국제 정치로도 번안되었다. '비동맹'이 그것이다. 미얀마는 소련의 위성국 되기를 거부하고 비동맹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비동맹운동을 대내적으로는 불교 중흥에 역점을 두었지만, 실제로 양곤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우누보다는 네윈이었다. 최대의 안보 위협이 된 국민당 잔군을 축출해야 했고, 공산당과 소수 민족의 봉기도 진압해야 했다. 버마공산당도 한국 전쟁 발발을 기회로 여겼다.

조선노동당이 남진하자 버마공산당도 남하했다.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요청한 것도 판박이였다. 이 안팎의 냉전/내전 속에서 네윈은 불교 사회주의가 한가한 타령이라고 여겼다. 청년 장교들을 주축으로 별도의 기구를 만들었다. 문민 통제를 받지 않는 군부 내 사조직이었다. 갈수록 이들에게 힘이 쏠렸다. '불교 사회주의'를 대체한 '버마식 사회주의'가 공식화된 것이 1962년이다.

우탄트(U Thant)

우누가 총리가 되고 각별히 도움을 청한 이가 우탄트였다. 우탄트는 학생 운동의 막후 브레인이었다. 1930~40년대 양곤 대학 기관지를 비롯해 주요 문건을 전담하다시피 집필했다. 아웅산이 현실주의자, 우누가 낭만주의자라면, 우탄트는 실용주의자에 빗댈 수 있는 인물이다. 집안 배경이 특별하다. 중국계와 인도계, 이슬람계가 섞였다. 태생부터 세계인, 지구 시민이었다.

우누의 비동맹 노선을 완성시킨 것도 우탄트였다. 1950년대 미얀마는 외교 강국이었다. 1954년 한해에만 국제 불교 회의와 콜롬보 회의를 동시에 성사시켰다. 인도와 파키스탄, 실론(스리랑카), 미얀마, 인도네시아가 참여한 콜롬보 회의는 이듬해 반둥 회의의 디딤돌이었다, 반둥 회의의 사무총장 역시 우탄트였다.

대외적으로는 네루, 나세르, 저우언라이, 수카르노가 주목받았지만 막후에서 실무 작업을 주도한 사람이 우탄트였다. 실제로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을 가장 먼저 방문한 이들 가운데 우누와 우탄트가 있었다. 자금성에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만났다. 돌아오는 길에는 베트남에 들려 하노이에서 호치민도 만났다.

이스라엘을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 중의 하나도 미얀마였다. 홀로코스트에 희생당한 유태인들을 안타까이 여겼다. 이스라엘의 좌파 세력에도 호감을 품었다. 그들의 '유대교 사회주의'가 미얀마의 '불교 사회주의'와 통하는 구석이 있다고 여겼다.

영-미와 소련도 방문했다. 런던에서는 여든의 윈스턴 처칠을 만났다. 그는 미얀마 왕국을 전복시켰던 랜돌프 처칠의 아들이다. 묵은 감정은 털어내자며 위스키로 건배했다. 피식민국의 우누와 우탄트가 식민 모국에 용서와 자비를 베풀었다. 모스크바에서는 니키타 후르시초프를 만났다.

사회주의에는 우호적이되 '사회주의 국제주의'라는 계서제에는 거리를 두었다. 소련의 속국이 된 동유럽에 동정을 품었다. 미국도 빼놓지 않았다. 말론 브란도가 오스카 상을 받고, 애너하임에 디즈니랜드가 개장하던 시절에 미국을 둘러보았다. 그럼에도 미국식 소비 문화에는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욕망의 절제를 가르치지 않는 '아메리칸 드림'에 혀를 내둘렀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를 망라한 이 지구적 행보에 전략을 짜고 대화를 조율하고 연설문을 쓰고 언론과 소통했던 이가 바로 우탄트였다. 그 발군의 능력을 인정받아 1957년에는 유엔(UN) 미얀마 대사로 임명된다. 그리고 불과 4년 후에 만장일치로 제3대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된다. 우누의 조언자이자 조력자에서 세계 평화의 기획자로 승진한 것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스라엘-아랍 전쟁 등 냉전기 주요 사건들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임기 말에는 베트남 전쟁 해결에 주력했다. 미국과의 갈등으로 줄담배를 피우다 암까지 생겼다. 사상은 없고 처세에만 능한 훗날의 아시아 출신 유엔 사무총장과는 격이 달랐던 것이다. 미얀마의 전통에 서구식 교양까지 겸비한 현대판 보살이었다.

▲ 우탄트. ⓒwikipedia.org

민동(Mindon)

미얀마 총선을 지켜본 지 4개월이 더 지났다. 수치의 최측근이 대통령이 될 모양이다. 그녀는 외교부 장관을 맡는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위태위태하다. 국정 경험이 전혀 없는 이들이다. 아마추어 정부이다. 현실적으로 군부-관료에 기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수치가 '계몽 군부'의 얼굴 마담인지 모른다. 미얀마에 머무는 동안 수치의 글들을 읽어보았다. 감흥이 없었다. 심드렁했다. 구태여 미얀마의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말들이다. 역사와 유리된 진공의 언어이다. 사론이 결여된 이론 신앙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고백성사만으로는 더 이상 식상함을 피하기 힘들다.

미얀마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책은 <더 메이킹 오프 모던 버마(The Making of Modern Burma)>였다. 저자가 우탄트 민트(U Thant Myint)이다. 우탄트의 손자이다. 피는 못 속인다. 안목이 빼어나다. 글 솜씨도 뛰어나다. 1850년대 미얀마의 마지막 황제 민동의 개혁 정책을 꼼꼼하게 되살핀다.

메이지 유신에 못지않은 대대적인 개혁이었다. 교토에서 도쿄로의 천도에 빗댈 만큼 만달레이를 새 왕조의 수도로 개조했다. 미얀마의 근대를 담보하는 '신도시'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중국식 관료제를 도입하여 신진 엘리트를 양성하고, 영국식 군사 제도를 모방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고자 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산업 혁명도 시찰했다. 문무 제도를 정비하여 불교 국가의 근대화, 개신(改新) 불교를 꽃피우고자 했다. 중국화와 서구화의 결합으로 동남아 최초의 대승(大乘)국가가 발진했던 것이다.

민동 본인부터 솔선수범했다. 轉輪聖王(전륜성왕, Cakravartiraajan), 즉 불교적 성군이 되고자 분발했다. 정법(正法, Dharma)으로 지상을 다스리는 달마가 되고자 했다. 그리하여 남유라시아 불교 세계의 역할모델이 될 것을 다짐했다. 국제 불교 대회를 처음 주최한 것도 민동이었다. 1954년 열린 국제 불교 대회는 '제6회'라고 표기되었다. 우누의 '불교 사회주의'란 민동을 계승한 것이었다. 대영제국으로 단절된 역사를 복원하려 한 것이다. 언뜻 1950년대 '미얀마의 봄'은 1850년대 미얀마의 만개인 듯 보였다.

실제로 1850~60년대는 미얀마 왕조의 절정기였다. 마치 베트남이 민망 황제 아래 대남제국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을 때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것처럼, 미얀마 또한 전성기에 직면하여 영국의 침략을 겪은 것이다.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세 차례의 정복 전쟁 끝에야 식민지가 되었다. 그만큼 내부 역량이 탄탄했던 것이다.

▲ 만달레이에 있는 민동 황제의 동상. ⓒ이병한

메이지 일본과의 차이라면 지리가 숙명이었다. 인도를 삼킨 영국이 지척에 자리했다. 영국산 무기에 인도인 용병을 합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봉건적이어서, 후진적이어서, 정체되어서, 개혁이 모자라서 패한 것이 아니다. 대영제국의 군사력에 굴복했던 것이다.

두 세대에 걸친 식민 통치로 미얀마의 전통적 국가 체제와 사회 질서는 무너졌다. 콜카타에 근거지를 둔 영국 총독의 군대와 경찰, 사법 제도가 이식되었다. 기층 사회와 유리된 상층부였다. 제도와 문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 식민지 통치 기구마저도 일본과 영국의 혈투 속에서 붕괴되었다.

전통의 근대화에도 실패하고, 식민지 근대화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 폐허 속에서 제도적 공백을 채워간 것이 네윈의 군사 정부였다. 나는 '버마식 사회주의'를 옹호할 뜻이 조금도 없다. 다만 한없이 딱할 뿐이다. 가엾고 안타깝다. 20세기 제3세계의 비극을 미얀마식으로 변주했던 것이다.

부디 수치가 1950년대 '미얀마의 봄'을 복기하기를 바란다. 아버지가 합의했던 연방제 국가와 우누의 불교 사회주의와 우탄트의 비동맹노선을 곰곰이 곱씹어보기를 권한다. 나아가 19세기 민동의 종교 개혁과 르네상스, 불교적 계몽주의도 살펴보았으면 좋겠다. 다른 문명화, 다른 근대화의 맹아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출발하는 미얀마 또한 '다른 백 년'의 든든한 동반자이기를 바란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따져 봐도 그녀의 삶과 사상은 영국 산이다. 새 시대를 여는 맏딸이기보다는 구시대의 막내이기 십상이다. 나로서는 2016년 신정부 출범 이후의 '민주화 세대'에 기대를 걸게 된다. 2048년, 독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미얀마의 주역이 될 이들이다. 재차 지리가 역사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새 천년 중국은 중화 문명의 중흥을 설파한다. 인도는 힌두교 국가(Hindutva, 힌두뜨와) 건설이 한창이다. 20세기형 진보를 대체하는 문명 복고, 재활과 부활의 흐름이 뚜렷하다. 인도와 중국, 양대 문명 대국 사이에 자리한 미얀마의 향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 미래를 미리 접해보고자 양곤 대학을 방문했다. 각 나라의 주요 대학에서 학생들과 대화하고 구내 서점을 살펴보고 학생 식당에서 한 끼를 때우는 것이 내 나름의 의례이다. 그런데 어이없는 경우를 당했다. 외국인의 출입을 금한단다. 교문만 서성이다 황망하게 돌아섰다. 가야할 길이 꽤나 먼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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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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