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바둑의 발견

[장시기의 바둑의 인문학]

인공지능의 대표 알파고와 인간지능의 대표 이세돌의 바둑 대결! 물론 알파고가 인공지능의 대표도 아니고 이세돌이 인간지능의 대표도 아니다. 로봇으로 명명되는 인공지능의 다양한 역할이 있고, 예술이나 철학 그리고 과학의 영역에서 인간지능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문제는 바둑이다. 지금까지 바둑은 세간의 모든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감히 접근을 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인정되었다. 그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도전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이 연재의 목표이다.

지금은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지구촌의 다양한 지역까지 바둑의 보급이 확산되었지만, 서구 유럽의 지식체계가 지구촌 전역으로 확산된 근대적 세계 속에서 바둑은 동아시아의 독특한 풍경이다. 문제는 동아시아의 독특한 풍경으로 존재하는 바둑을 지구적 차원의 지식체계, 혹은 사유방식으로 발견한 사람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라는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들뢰즈는 탈근대의 철학자, 사건의 철학자, 생명의 철학자, 혹은 몸의 철학자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서구 유럽의 근대적 과거와 다른 새로운 지식의 계보학을 만든 미쉘 푸코(Michell Foucault)는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로 일컬어질 것"이라고 예언한 바가 있다. 이러한 들뢰즈의 사유체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둑이다.

들뢰즈는 실천운동가였던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와 함께 발표한 [천 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 에서 관습적인 국가철학적 사유와 새로운 노마돌로지(Nomadology: 유목민적 삶과 사유의 형식으로 구성된 지식)의 사유를 체스(혹은 장기)와 바둑으로 비유한다. 들뢰즈가 [천 개의 고원]에서 이야기하는 체스와 바둑의 차이는 단지 [천 개의 고원]하나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체스와 바둑의 차이는 그의 마지막 저서 [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hilosophy?)]를 포함하여 [안티 오이디푸스(Anti-Oedipus)], [의미의 논리(The Logic of Sense)],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은 물론이고 영화에 대한 연구의 근본적 의미를 바꾸어 놓은 [영화 1(Cinema 1)][영화 2(Cinema 2)]를 모두 포함하는, 들뢰즈의 철학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다.

체스(혹은 장기)와 바둑의 차이를 토대로 들뢰즈는 세계를 구성하는 사유체계를 예술적 지식과 철학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바둑은 이 세 가지 지식이 종합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이 강좌는 바둑을 어떻게 둘 것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둑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즉, 예술적 지식과 철학적 지식 그리고 과학적 지식의 접점과 종합을 찾아서 서로 다른 각각의 학문 분야들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등의 현실 문제를 바둑의 존재론적 세계, 바둑의 인식론적 세계 그리고 바둑의 실천론적 세계의 분야로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 이 강좌의 근본적인 목표이다. (필자 )

1. 질 들뢰즈의 바둑의 발견

"바둑알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목적도 목적지도 없이,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는 끝없는 생성이다." 프랑스의 생성의 철학자, 질 들뢰즈가 바둑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는 장기와 체스의 닫힌 시간이나 공간과 비교하여 바둑의 열린 시간과 공간, 즉 장기와 체스의 말들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영토적으로 제한된 공간 속에 존재하는 목적과 목적지, 그리고 역사적으로 한정된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출발점과 도착점이라는 죽음의 운동과 비교하여 바둑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이 만들어내는 생성의 시간적 변화를 발견한 것이다. 장기와 체스의 말들은 이미 만들어진 기호 속에 존재하지만 바둑의 알들은 새로운 이미지의 생명들로 끊임없이 생성되고, 장기와 체스의 말들은 이미 만들어진 존재들을 소비하지만 바둑의 알들은 새로운 생명의 존재들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지속된 발견의 과정이 새로운 사유의 장으로 유입된 것과 마찬가지로 질 들뢰즈의 바둑의 발견과 더불어 우리는 비로소 유한성의 존재가 아닌 무한성의 생명이 생성되는 과정을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장기의 세계나 체스의 세계가 아닌 바둑의 세계를 사유한다는 것은 그 동안 동양과 서양에서 하나의 신비의 영역으로 가두어 놓은 형이상학적 이데아(Idea)나 도(Tao, 道)를 형이상학적 유물론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과 몸,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이 아닌 몸 속의 정신과 자연 속의 인간처럼 이데아 속의 현실과 도 속의 덕(德)이라는 형이상학적 물질의 몸이나 자연과 더불어 이데아와 도를 인간적 사유의 장으로 끌어오는 것은 새로운 철학, 혹은 새로운 인문학적 사유의 풍경이다. 이런 측면에서 들뢰즈의 바둑의 발견은 자연이나 우주나 몸과 마찬가지로 이미 우리들 속에 있었지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의 발견이다. 들뢰즈의 바둑의 별견과 더불어 우리는 드디어 새로운 풍경 속에서 살고 사랑하며 사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의 탈근대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일본의 근대성은 "일종의 왜곡되고 전도된 시간성"(가라타니 고진 28) 속에서 만들어진 근대적 <풍경의 발견>에 의하여 가능해졌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산수화란 메이지 시대의 일본 근대화를 지도한 페노로사가 이름 붙인 것이고, 그렇게 해서 (근대적) 회화 표현의 카테고리 속에 위치하게 되었다."(27) 이런 측면에서 "<산수화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그 물음이 이미 (근대적으로) 전도(된 의식)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한다"(29)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탈근대적 주장이다. 근대적 풍경의 발견은 단지 산수화만이 아니다. 루소의 [고백록]에 등장하는 "알프스의 발견"(41), 19세기 초반의 "셰익스피어 발견"(20), "프로이트의 심리학 발견"(54) 등등의 수없이 많은 "일종의 왜곡되고 전도된 시간성" 속에서 만들어진 근대적 풍경은 근대의 너머에 있는 또 다른 풍경을 보지도 못하고 사유하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근대적 "<풍경의 발견>에는 단순히 내면적인 전도뿐만 아니라 실제로 새로운 (타자적) 풍경, 즉 과거의 (주체적) 텍스트가 완전히 잠식하지 않은 (타자적) 풍경의 (주체적) 발견이(라는 폭력)이 내포되어 있다."(56) 그것이 바로 근대적 일본인에 의한 "홋카이도의 발견"이다. "홋카이도의 발견"을 통하여 일본은 비로소 서구 유럽에 의한 식민지적 근대에서 벗어나 스스로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기 시작한 주체적 근대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홋카이도는 새로운 식민 장소였으며, 그것은 원주민인 아이누인들을 내몰며 강제로 동화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메이지 정부의 입장에서 그 일은 실업자가 된 수많은 무사들을 개척자 농민으로 재활시키는"(56-57) 일본 근대화 프로젝트를 구성할 수 있었으며, 그 이후로 조선의 발견이나 대만의 발견을 통하여 제국주의 국가 일본을 구성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메이지 시대의 홋카이도는 기후 풍토나 정치적 의미에서 볼 때 (17세기 영국 이주민이 만든) 뉴 잉글랜드와 유사하다"고 이야기한다.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찾으려는 가라타니 고진의 시선을 넘어서 지구촌 세계의 근대적 풍경의 발견으로 나아가 보자. 근대적 의미에서 아프리카의 남단 희망봉을 발견한 사람은 바르톨로뮤 디아스이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콜럼버스인 것처럼, 바둑을 발견한 사람은 질 들뢰즈이다.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에게 희망봉은 아프리카 남단에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자그마한 봉우리였을 뿐이다. 그러나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서구 유럽인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 서쪽 해안의 대서양에서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있는 작은 봉우리를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선 이후로 이 조그마한 봉우리는 유럽인들에게 뱃길로 인도와 중국으로 갈 수 있는 희망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 조그마한 봉우리는 서구 유럽인들에게 희망봉이 되었고, 그 이후로 희망봉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필두로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프랑스 제국들이 인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오세아니아 대륙을 식민지로 거느리고 아시아 대륙 전체로 침투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카리브해 연안도 마찬가지이다. 1492년 서구 유럽인 최초로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가로질러 오늘날의 쿠바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섬에 도달했을 때, 그는 그곳이 중국 남쪽 해안, 즉 오늘날의 베트남 연안에 있는 조그마한 섬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섬은 오늘날의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가는 입구였고, 콜럼버스 이래로 그곳에 살고 있었던 마야인과 잉카인들 그리고 아즈텍인들은 그들의 땅과 언어와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아메리카 대륙은 몽땅 서구 제국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발견의 힘은 그만큼 거대하고, 바르톨로뮤 디아스와 콜럼버스가 의도했든 안했든, 발견은 그 자체의 힘으로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것처럼 근대적으로 "일종의 왜곡되고 전도된 시간성" 속에서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그렇게 근대의 세계를 창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톨로뮤 디아스나 콜럼버스의 근대적 발견과는 달리 들뢰즈의 바둑의 발견은 근대적 세계와는 다른 탈근대적 세계의 새로운 풍경을 창출하는 원동력이다. 그것은 바르톨로뮤 디아스나 콜럼버스의 발견처럼 지리적 발견이나 물리적 발견과는 달리 들뢰즈의 발견이 사유방식의 발견이나 세계에 대한 이미지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은 포르투갈을 필두로 스페인과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프랑스 제국의 아프리카 침탈로 이어졌고, 서구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화는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화로 이어졌으며, 그 식민지화 과정의 지리적 끝자락에 중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이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연결고리는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을 통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나 그곳의 식민지화 과정과 일치한다. 스페인을 필두로 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식민지화를 통하여 비로소 태평양으로 진출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유럽 제국주의 식민지화 과정의 끝자락에 중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이 있었다.

문제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희망봉에서 출발한 동방으로 향한 근대 제국주의의 침탈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카리브해 연안에서 출발한 아메리카 대륙 서쪽 태평양으로 진출한 근대 제국주의 침탈이 서로 만난 지리적 끝자락, 바로 그곳에 있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이 서구적 근대성의 포획에 결코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이나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같은 근대적 풍경 이외의 또 다른 풍경이 항상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적 풍경 이외의 또 다른 풍경이 서구 유럽이나 아프리카 혹은 아메리카나 다른 여타의 아시아 지역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그들 지역에도 여전히 근대적 풍경 이외의 또 다른 풍경이 존재하였지만 그 풍경들은 근대적 풍경의 그늘 속에 은폐되거나 혹은 근대적 풍경의 강화로 인하여 화석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들뢰즈가 발견한 동아시아 지역에 있는 근대적 풍경 이외의 또 다른 풍경들, 그 풍경들 중의 하나가 바로 바둑이다. 어디에서 보았는지 모르지만, 들뢰즈는 가로 19 줄과 세로 19 줄이 서로 만나는 361 개의 점들 위에 있는 하얀 돌과 검은 돌이 만나는 사건들로 이루어지는 바둑을 두는 놀이의 풍경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 풍경은 바로 미쉘 푸코(Michel Foucault)가 [성의 역사(History of Sexuality)]에서 고대 그리스에 있었던 풍경이라고 묘사하는 "존재의 기술(art of being)"이 작동하고 있는 풍경이었다. 푸코가 이야기하는 "‘존재의 기술’이란 인간들이 그것을 통해 스스로 행동규칙을 정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들의 특이한 존재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그들의 삶을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닌, 그리고 어떤 양식의 기준에 부합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중하고도 자발적인 실천으로 이해해야만 한다."(Foucault 25) 물론 이러한 "존재의 기술"이 만드는 "행동규칙"과 "미학적 가치" 그리고 "자발적인 실천"은 이미 서구적 근대 이전에 사라진 풍경이다.

들뢰즈는 바둑을 두는 놀이의 풍경을 보면서 푸코가 이야기하는 "존재의 기술" 즉 인간들이 그것(바둑)을 통해 스스로 정하는 "행동규칙", 즉 바둑의 존재론적 세계를 보았다. "장기는 국가 또는 궁정의 놀이로 특히 중국 황제가 즐기던 것이다. 장기의 말들은 모두 코드화 되어 있다. 즉 행마나 포석, 그리고 말끼리의 적대관계를 규정하는 내적 본성 또는 내적 특성을 구비하고 있다. 즉 각각의 내재적 성질을 부여받고 있다. 마(馬)는 마이고, 졸(卒)은 졸이며, 포(包)는 포이다. 말 하나 하나는 소위 상대적 권력을 부여받은 언표의 주체와 비슷하며, 이러한 권력들은 언표행위의 주체, 즉 장기를 두는 사람 또는 놀이의 내부적 형식 속에서 조합된다. 이에 비해 바둑은 작은 낱알 아니면 알약이라고 할까? 아무튼 단순한 산술 단위에 지나지 않으며, 익명 또는 집합적인 또는 3인칭적인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며, 그것이 한 명의 남자나 여자 또는 한 마리의 벼룩이나 코끼리라도 상관이 없다. 바둑알들은 주체화되어 있지 않은 기계적 배치물의 요소들로서 내적 특성과 같은 것은 전혀 지니고 있지 않으며, 오직 상황적 특성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들뢰즈는 또한 바둑을 두는 놀이의 풍경을 보면서 푸코의 "존재의 기술"이 지니고 있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들의 특이한 존재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그들의 삶을 어떤 미학적 가치(로 만드는)", 즉 바둑의 인식론적 세계를 발견한다. "말끼리의 관계도 장기와 바둑은 완전히 다르다. 장기의 말들은 내부성의 환경 속에서 자기 진영의 말들끼리 또는 상대방 진영의 말들과 일 대 일 대응관계를 맺는다. 구조적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바둑알은 오직 외부성의 환경만을, 즉 일종의 성운이나 성좌를 가진 외부적 관계만을 구성하며, 이들 관계들에 따라 집을 짓거나 포위하고 깨어버리는 등 투입 또는 배치의 기능을 수행한다. 바둑은 단 한 알로도 공시적으로 하나의 성좌 전체를 무효로 만들 수 있는 반면, 장기의 말은 그렇게 할 수 없다(또는 통시적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장기는 전쟁이기는 하나 제도화되고 규칙화되어 있는 전쟁으로서 전선과 후방 그리고 다양한 전투를 포함해 코드화 되어 있다. 이에 비해 전선이 없는 전쟁, 충돌도 후방도 없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 전투마저 없는 전쟁, 바로 이것이 바둑의 본질이다."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푸코의 "존재의 기술"이 지니고 있는 개개인의 삶을 어떤 양식의 기준에 부합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중하고도 자발적인 실천", 즉 바둑의 실천론적 세계를 발견한다. "장기가 기호론이라면 바둑은 순수한 전략이다. 마지막으로 공간의 존재도 전혀 다르다. 장기의 경우에는 닫힌 공간을 분배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해 최소한의 말로 최대한의 장소를 차지해야 한다. 이와 달리 바둑의 경우에는 열린 공간에 바둑알이 분배되어 공간을 확보하고 어떠한 지점에서도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바둑알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목적도 목적지도 없이,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는 끝없는 생성이다. 바둑의 ‘매끈한’ 공간 대 장기의 ‘홈이 패인’ 공간, 바둑의 노모스 대 장기의 국가, 노모스 대 폴리스, 즉 장기가 공간을 코드화 하고 탈코드화 하는 데 반해 바둑은 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바둑은 공간을 영토화하고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바둑의 발견(그리고 바둑 인문학)

차례

I. 바둑의 발견과 바둑 인문학
제 1강. 질 들뢰즈의 바둑의 발견
제 2강. 문화연구와 바둑 인문학

II. 바둑의 존재론적 세계
제 3강. 체스의 국가철학과 바둑의 노마돌로지
제 4강. 내재성의 생명철학
제 5강. 세계의 구성

III. 바둑의 인식론적 세계
제 6강. 인문학과 인문과학
제 7강. 지식의 구성 – 예술과 철학과 과학
제 8강. 오이디푸스와 욕망기계

IV. 바둑의 실천론적 세계
제 9강. 이미지 생명론
제 10강. 시간의 재구성 – 크로노스의 시간과 에이온의 시간
제 11강. 대지의 길

V. 제 12강. 맺는 말
I. 바둑의 발견과 바둑 인문학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