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노조'면 어때? 연봉 1억이 넘는데…"

[박점규의 동행] 어느 대기업 노조 지부장이 쓴 반성문

매년 임금 협상 시절이 돌아오면 기아자동차에는 "차별 철폐"라는 구호가 온 공장을 도배합니다. 지난 연말에도 어김없이 차별을 없애라는 구호와 현수막, 대자보와 선전물이 공장에 차고 넘쳤습니다. 같은 그룹 '큰 집'인 현대자동차 노동자들과 차별을 없애라는 요구입니다. 홍보물에는 현대자동차와 비교한 온갖 표들이 난무합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의 차별에는 무심합니다. 대기업의 '납품 단가 후려치기', '갑질'로 신음하는 부품사 노동자들, 인근 공단의 가난한 하청 노동자와의 차별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기아차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250일 넘게 고공 농성을 하고 있는 서울시청 옆 광고탑을 찾은 정규직 노조 간부는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동안 기아자동차는 임금 교섭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기본급을 똑같이 올렸지만 성과급은 차별을 두어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80% 수준을 지급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임금 교섭에서 회사는 정규직보다 300만 원이나 적은 성과급을 주겠다는 안을 제시했습니다. 주식도 정규직에게만 주겠다고 했습니다. 예년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줄어들기는커녕 차별이 더욱 커지게 된 것입니다.

'연내 임금 협상 타결'이 불가능하게 된 2015년의 마지막 날, 기아자동차 전 공장에 김성락 노조지부장 명의의 성명서가 뿌려졌습니다.

"기아자동차의 눈부신 발전과 성과는 경영진의 것만도, 정규직 조합원의 것만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주변에서 함께 일했던 기아자동차 구성원 모두의 땀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기아자동차 구성원 모두가 땀 흘린 성과를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기아자동차 발전과 성과의 몫을 최고경영진만이 독점해서는 안 되지만, 임금 협상에서 정규직만이 성과를 차지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김성락 지부장은 "이런데도 합의를 하게 되면 대기업 노조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무책임한 모습이자 우리는 또다시 대기업 귀족 노조, 제 밥그릇 챙기기만 하는 집단이라는 무거운 굴레를 안고 가야 한다"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차이를 더욱 확대하는 것에 합의한다면 이는 노동조합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라고 호소했습니다.

정규직 노조위원장의 반성문


지부장의 호소문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대기업 정규직노조 지부장이 "귀족 노조라는 오명은 반드시 벗겠다"며 쓴 호소문은 현장에서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현대차 노조도 하지 못했는데 가능하겠냐는 우려도 있었고, 노조에 지지를 보내는 조합원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정규직 양보론'이 아니냐는 비난 여론도 있었습니다. 임금 교섭이 해를 넘겼지만, 비정규직 차별 문제로 교섭이 난항에 빠졌습니다.

노조는 "비정규직과의 차별을 줄이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예년 수준인 80%라도 맞추라"고 요구하며 파업까지 벌였습니다. 정규직과의 차별 해소를 위해서 정규직도 어떤 식으로라도 참여할 의향이 있으니 사측에서도 일정 부분이라도 책임을 다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큰 집'인 현대차에서 차별을 더욱 확대하고, 정규직에게만 주식을 주는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1월 4일에는 주야 4시간 파업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기아차에서도 현대차와 같은 합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노조의 합의안은 64% 이상의 찬성을 얻었습니다. 전체 조합원 3만4000명 중 비정규직은 3000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노조는 "차이와 차별의 벽을 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현실적 어려움에서 차별을 해결하지 못했다"며 "사내 하청 동지들께 머리 숙여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습니다. 노조는 "나눔과 연대, 정규직·비정규직의 행복한 동행을 위해 더 많은 준비를 통해 실현시키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기아자동차에서 벌어진 일은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사실 정규직 노조위원장이 비정규직 문제를 핵심적인 요구로 걸고 파업까지 하는 일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귀족 노조'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비정규직과의 차별이 더욱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규직 노동자들을 설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이번 교섭에서 회사가 만들어놓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의 골이 얼마나 큰 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 또한 확인되었습니다. 교섭이 길어지자 빨리 교섭을 타결하라는 정규직의 목소리가 커지고, 결국 노조 지도부가 현장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차별을 더욱 확대하는 안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귀족 노조'의 오명을 벗으려고 했지만

▲250일 넘게 고공농성 중인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연합뉴스
지난 연말 노조위원장 선거 결과 한국 노동운동의 주축인 현대차, 기아차, 한국지엠 자동차 3사에 모두 '좌파', '진보' 성향의 집행부가 들어섰습니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장에는 금속노조 전 박유기 위원장이 당선됐습니다. 언론은 강성노조 등장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박유기 지부장의 10대 공약 중 7가지는 정규직의 고용 안정과 처우 개선 내용이고, 3가지는 비정규직과 관련된 공약입니다. 박 지부장은 촉탁직 제도 전면 재검토, 비정규직 차별 철폐, 불법 파견 철폐, 사회적 연대 사업 강화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이와 함께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을 강화하고, 180만 자동차 산업 연대를 구축하며, 박근혜 정권의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을 벌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좌파로 분류되는 기아자동차 김성락 지부장도 박근혜 노동시장 개혁 저지와 사내 하청 5.12 직권 조인 합의서 폐기 및 재협의를 8대 핵심 공약으로 걸었습니다. 비정규직 없는 공장 로드맵으로 불법 파견 특별 교섭을 진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5.12 합의는 기아차 회사와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3500명 중 465명만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한다는 내용으로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반대한 합의입니다.

그러나 완성차 3사 모두 박근혜 정부의 일반 해고 지침 발표 강행에 맞선 파업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현대와 기아차 모두 임금 협상 결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더욱 커지고 말았습니다. 정규직 조합원들만의 성과급 잔치라는 대기업노조의 관행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규직만의 임금 인상이라는 오랜 관행

2015년 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은 둘 다 9700만 원입니다. 지난해에는 1억 원을 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노동자들의 절반이 비정규직인 사회,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들이 넘쳐나는 나라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멀리 있는 동경의 대상입니다.

현대자동차 공장에는 정규직, 1차 사내 하청, 2~3차 하청, 촉탁 계약직이라는 4개의 계급이 있습니다. 울산에는 현대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중견 부품 회사들도 있지만, 현대모비스 사내 하청 업체를 비롯해 최저 임금을 받는 부품 회사들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는 대법원에서부터 지방법원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불법 파견 판결을 받았습니다. 며칠 전에는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시험용 차량의 도장 업무를 해 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현대차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불법 파견을 인정받고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체불 임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컨베이어벨트라는 자동 흐름 방식의 자동차 생산 조립 공장이 아닌, 시험용 차량 공정까지 불법 파견을 인정한 것입니다. 쪼개기 계약으로 2년이 지난 촉탁 계약직 노동자들에 대한 정규직 판정도 잇따라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 현대자동차가 불법으로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있다는 판결입니다.

설령 합법적인 용역이나 도급 노동자라고 하더라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이 없다면 현대자동차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현대자동차의 성과를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불법 파견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지역의 부품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찾아가는 노력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거꾸로 정년퇴직을 앞둔 정규직 노동자들은 정년을 연장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장기 근속 조합원 자녀들에게 정규직 채용의 가산점을 부여해달라고 하고 합니다. 55세 이상에게 파견을 전면 허용하는 박근혜 정권의 파견법 개악안처럼 정년퇴직 이후에도 사내 하청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오랜 관행과 싸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조합원들의 낡은 의식을 바꾸는 작업은 만만치 않습니다. 뼈를 깎는 각오가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과거 한나라당은 불법 정치 자금 차떼기 사건으로 추락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여의도 당사를 나와 천막 당사를 차리면서 재기했습니다. 대기업 노조가 노조 사무실을 나와 현장에 천막 당사는 치는 심정으로 사업을 해나가야 하지 않는다면 오랜 관성을 끊기 어려울 것입니다.

현대차, 기아차, 한국지엠 정규직 노조 간부들이 일주일 중 절반은 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에, 절반은 비정규직과 지역의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에 나서기로 결의한다면 어떨까요?

촉탁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노조 가입원서를 나눠줘 금속노조에 가입하도록 만들고, 공단의 부품사 노동자들을 찾아가 최저 임금과 근로기준법을 알려주는 소식지를 나눠주는 활동을 일주일에 하루씩이라도 한다면 어떨까요? 고공 농성을 비롯해 힘겹게 싸우고 있는 장기투쟁 노동자들과 하루를 같이 보내는 실천을 할 수는 없을까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차이를 더욱 확대하는 것에 합의한다면 이는 노동조합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나눔과 연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행복한 동행을 실현시키겠습니다."

기아자동차 김성락 지부장의 각오와 다짐이 이루어진다면, 대기업노조로 향한 '귀족 노조'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평등과 정의를 구현하는 노동조합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박점규의 동행>은 이번 회를 끝으로 마무리합니다. 새로운 연재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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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점규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서 선전홍보, 단체교섭, 비정규직 사업을 담당했습니다. 2008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사회적 기구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2010년 11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25일 점거파업에 함께 했고, 이후 한진중공업, 현대차 비정규직, 밀양 희망버스에 함께했습니다. 저서로는 <25일>, <노동여지도> 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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