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만 나면 껄떡대는 남자들, 갑 중의 갑이죠!"

[독서통] <예민해도 괜찮아> 쓴 이은의 변호사

포털 검색창에 '성폭력'이라는 키워드를 쳐봅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뉴스가 실시간으로 보도됩니다. 병원, 예술단, 학교, 가정... 도처에서 성폭력은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약자는 24시간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2008년 큰 논란이 되었던 삼성전기의 사내 성폭력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 사건의 피해자였으나 오히려 사내 따돌림을 당하기까지 한 이은의 씨가 5년의 소송 끝에 승소한 후 변호사가 되었다는 소식도 이 뉴스에 관심 있으셨던 분은 아실 겁니다. 그가 변호사로 일하며 겪은 성폭력 피해자 사례, 자신의 경험담을 모은 책 <예민해도 괜찮아>(이은의 지음, 북스코프 펴냄)가 나왔습니다. <삼성을 살다>(사회평론 지음)에 이은 두 번째 책입니다.

19일 '독서통'은 이은의 변호사를 모시고 우리 사회의 성폭력 실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맡은 사건 일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알아봤습니다. 무엇보다, 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상화되는지에 대한 그의 생각도 들었습니다.

독서통은 김종배 <시사통> 대표와 강양구 <프레시안> 기자가 함께 진행합니다. 이날 서교동 독서통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인터뷰 전문을 정리했습니다.

▲ "한국 사회는 갑의 시선에 더 깊이 공감하는 것 같아요." ⓒ프레시안(최형락)




성희롱 피해자, 성 문제 담당 변호사 되다

김종배 : 매주 화요일 오후 찾아뵙는 독서통 시간입니다.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 나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강양구 : 네, 안녕하십니까.

김종배 : 오늘 소개할 책, 어떤 책입니까?

강양구 : <예민해도 괜찮아>라는 책입니다. 부제는 '불쾌한 터치와 막말에 분노하는 당신을 위한 따뜻한 직설'입니다.

김종배 : 직장을 포함한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넓은 의미의 성폭력 대처법을 이야기하는 책이죠?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강양구 : 이 책을 굳이 가지고 나온 이유는 저자가 약간 특별해서입니다. <프레시안>과 인연도 있는 분입니다. 이은의 변호사가 이 책의 저자입니다.

이은의 변호사는 변호사 직함보다 성희롱 피해자로서 대기업 삼성을 상대로 싸워서 이긴 최초의 여성으로 잘 알려졌죠. 한때 언론에 많이 오르내렸습니다. 회사 퇴직 후 로스쿨을 나와서 변호사가 되셨습니다. 변호사 사무실 연 지 1년 정도 된 새내기 변호사이십니다.

김종배 :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법 지식까지 버무린 책이군요?

강양구 : 현장에서 본인과 같은 고통을 겪은 여성을 법률적으로 지원하고 상담하고 계시죠. 그런 활동을 통해서 쌓인 여러 가지 고민도 이 책에 녹아들어 있고요.

김종배 : 저자인 이은의 변호사와 인사 나누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은의 : 안녕하세요.

김종배 : 변호사 생활 할 만하세요?

이은의 : 예, 좋습니다. (웃음)

김종배 :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세요?

이은의 : 일로써 적성에 맞고,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일이니까 더 그렇습니다. 힘든 누군가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것,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되게 좋습니다.

강양구 : 본인이 (성폭력) 피해자였는데, 많은 피해자를 접하는 게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지는 않습니까?

이은의 : (오히려) 좋은 쪽으로 발동해요.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이 사람이 이때 이렇게 느끼겠구나' '이쯤에 뭘 궁금해하겠구나' '이 지점에서는 법률 외적으로 이런 지원이 필요하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어요. 힘든 부분은, 그런 감정의 상태를 알다 보니 겪는 감정 노동이 분명히 있다는 점이고요.

김종배 : 변호사 업무를 하다 보면 (의뢰인과) 거리감을 둬야 할 때도 있잖아요. 사건을 객관화해서 봐야 할 상황도 있고요. 본인의 그런 경험이 객관적 판단이 필요한 순간에 심리적으로 의뢰인에게 감정 이입되어 버리는 쪽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강양구 : 너무 공감이 잘 되어서 힘든(부분이 있지 않을까요?)

이은의 : 아무래도 그런 면이 있긴 해요. 하지만 일은 일이고 감정은 감정이니까, 때로는 (일부러) 조금 더 냉정하게 대처하기도 해요. 제가 사건을 겪을 때 '이 부분까지는 범죄의 영역, 저 부분부터는 범죄의 영역이 아니다' '어떤 부분은 배상이 가능하고, 어떤 부분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돌아보면서 저와의 거리를 유지한 시간이 있었거든요. 그런 경험이 많이 도움되죠.

김종배 : 이은의 변호사께서 삼성 재직 시절 사내 성희롱과 싸운 전력을 알고 찾아오는 의뢰인이 많을 것 아닙니까?

이은의 :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김종배 : 그렇다면, 의뢰인이 조금 더 쉽게 마음의 문을 여는 면도 있을 것 같네요.

이은의 : 그게 서로에게 큽니다. 사전 작업에 대한 조언을 아무래도 많이 하는 편이고, 상담 역할을 하는 편입니다.

김종배 : 법정으로 가느냐 마느냐, 수임하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카운슬링을 한다?

이은의 : 네. 그리고 (회사) 내부와 어떻게 이야기를 진행해 본다든가, 회사 차원에서 어떤 조치를 할 수 있을지 확인하면서 최대한 설득하는 과정을 가져보고요, 때로는 (의뢰인과) 같이 회사에 가보기도 하고요,

강양구 :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를 대리하는 것보다 가해자를 대리하는 게 훨씬 돈이 될 것 같은데요?

이은의 : 많이 되죠.

강양구 : 그런 유혹을 받지는 않으세요?

이은의 : 의뢰 오는 빈도도 (성폭력) 가해자가 더 많죠. 그런 분들이 법조의 도움을 아무래도 더 받고 싶어 하고요. 피해자는 수사 기관에 직접 간다든가, 어떤 기관에 가서 대처하다 보니까 먼저 찾는 빈도는 가해자가 더 많아요.

가해자 대리를 무조건 안 한다는 측면이라기보다는, (제 변호 업무는) 피해자에 더 방점을 찍고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고요. 피해자를 지원하면 돈은 조금 덜 되고 몸은 조금 더 고되지만, 보람이 커요. 전혀 수입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니까 피해자를 지원하면서 충분히 먹고 살고, 보람도 있고, 이렇게 책도 쓸 수 있으니 좋아요. (웃음)

피해자 '품행' 따지는 한국 조직

강양구 : 책을 읽고 깜짝 놀랐는데, (성폭력) 가해자 사이에 (처벌이나 소송을 피하는) 팁을 주고받고 노하우를 나누는 온라인 사이트나 카페가 있다면서요?

이은의 : 엄청나게 많아요. 온갖 정보가 정말 포털 사이트에서 넘칩니다.

김종배 : '가해자로 억울하게 몰린'이란 수식어를 내세우면서요?

이은의 : 아니에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김종배 : 아예 대놓고 그런다고요?

이은의 : 네.

강양구 : '내가 누구를 만졌는데, 얘가 나를 고소했는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 이런 정보를 주고받죠?

이은의 : 네. 거기 보면 변호사나 일반인이 답변을 달죠. 절대 전화가 오면 '~했다'라는 이야기를 하지 마라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팁을 주죠.

강양구 : 카카오톡으로도 대화도 주고받지 말고, 사과하지 말고 등.

이은의 : 네. 그렇죠. 그런 단서가 어떻게 변주되고, 어떻게 불리하게 작용하는지와 같은 팁을 주고받죠.

김종배 : 이은의 변호사도 그런 사이트에 가입하셨나요? (웃음)

이은의 : 종종 수색에 나설 때가 있어요. 피해자가 여럿인 사건이 있을 수 있거든요. 연예인 지망생 성폭력 피해 사건 같은 거요. 그러면 유사 피해자를 발굴하기 위해 그런 사이트에 들어가서 연예인 지망생인 척도 하면서 정보를 모으죠. (웃음) 인터넷에서 보이지 않는 전투가 진행 중인 거죠.

김종배 : 변호사로서 성폭력 피해자와 상담하기도 하고, 법정 대리인이 되기도 하실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케이스 하나만 말씀해주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이은의 : 모든 사건이 기억에 남죠. 지금 맡은 사건 중에 공기업 사건이 있어요. 공론화됐던 사건인데, 노동조합에서 피해자를 안 도와주고 회사는 징계하고….

강양구 : 어떤 일이 있었나요?

이은의 : 피해자가 해외 출장을 갔는데, 출장지에서 준강간에 가까운 성폭력을 당했어요. 문제는 이 공기업의 출장 관행이 약간 놀러 다니는 일정이 포함된 식이었다는 거죠.

강양구 : 실제로 업무는 4박 5일이면 되는데 앞뒤로 휴일을 붙여서 7박 8일, 9박 10일 정도로 가는군요.

김종배 : 사건 시말을 적다 보면 경위를 설명하게 되는데, 이러면 '너 왜 출장 가서 일 안 하고 술 먹었느냐'는 식으로 되겠군요.

이은의 : 그렇죠. 더구나 출장 가면 호텔 내 바에서 한잔할 수 있잖아요? 그런 사건이 일어나고 나니, 출장에 대한 비리부터 이야기하면서 회사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아웃' 하는 식으로 대처했죠. 그래서 가해자도 해임, 피해자도 해임, 이런 징계를 받았죠. 겨우 피해자는 해고는 면했지만요.

제가 로스쿨 다닐 때부터 피해자에게서 연락 와서 계속 카운슬링을 했어요. 지금 가해자와 회사를 상대로 민사 소송 중인데, 회사로부터 피해자가 강한 비난을 받아요. 준비 서면을 받아보면 사실상 "피해자는 이렇게 나쁜 X이고, 이렇게 미친 X이고, 이렇게 무능한 X이다"라는 식이에요. 실제 욕이 안 들어갔을 뿐이지, 이런 내용이 수십 장이죠.

강양구 : 원래 품행이 안 좋던 (여성) 직원이 이런 사고까지 쳤다는 거군요.

김종배 : 출장 품위를 위반하고, 업무 규정도 위반하더니…

강양구 : 그러니 이렇게 준 강간당했다는 소리도 못 믿을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이은의 : 네.

가해자는 형사 처벌을 받았어요. 유죄 인정까지 됐는데, 회사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식이에요. 시끄러운 게 싫은 거죠. (조직 내 성폭력 피해자가) 법정 다툼 끝에 회사나 가해자로부터 얼마나 너덜너덜해지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건이에요. 그 당시 형사 재판받으면서 가해자가 반성하고 사과한다고 해서 감형받았는데, 지금은 역으로 반소장(피고가 원고에게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작성하는 문서)을 내서 손해 배상을 청구했어요. 명예 훼손이라고.

현재 치열하게 법정에서 공방 중이에요. 해외 출장 시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업무 시간으로 볼 것이냐는 논리, 회사가 사건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유를 들어 정직 6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내린 게 온당하냐는 논리 등이 붙고 있죠. 상대방 쪽에서는 변호사를 여럿 고용해서 법정에 상대방 변호사 네댓 명이 나오시고, 저는 혼자 상대하는 상황이죠.

그런데 즐겁습니다. 체급 강한 상대를 대상으로 하는 판을 깨면, 이 사건이 유의미한 족적이 되거든요.

김종배 : 그 과정이 피해자에게 너무 힘들잖아요.

이은의 : 네, 맞습니다.

김종배 :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자기의 인격까지 도마에 올려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견딜지 모르겠습니다.

이은의 : 지금은 정직 징계 후 복직해서 생활 아닌 생활을 이어가시는 상황이죠. 변호사가 이럴 때 역할이 중요해요. 변호사가 자기 대신 법정에서 해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피해자를 다음 변론 기일까지 버티게 해줘요. 이 사건이 그런 측면에서 저에게도 보람 있고, 당사자도 싸우는 과정에서 '힐링'하고 있죠.

▲ 여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 시대 이래로 일상의 성폭력 위협에 시달렸다. ⓒflickr.com

"네가 야한 옷 입어서 그런 것 아니냐!"

김종배 : 보통 이런 문제가 나오면 조직 내에서 2차 가해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잖아요. 피해자 주장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역으로 모는. 저는 이런 사건 볼 때마다 '왜 그럴까' 싶어요. 조직이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뭘까 말이죠. 차라리, 깨끗하게 이 사건을 정리하면 오히려 조직 입장에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은의 : 일차적으로 한국 사회가 갑의 시선에 더 깊이 공감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 모두 어릴 때부터 감정을 약자에게 이입하지 않고 강자에게 이입하는 걸 학습 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면 정치적 사안이든 일상의 사안이든, 강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체질화되어 있죠.

강양구 : 그래서 기업의 의사 결정권자나 동료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공감하기보다 가해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보려 한다는 거군요.

이은의 : 그렇죠.

제가 맡은 소송 중에 모 대학원생이 지도 교수의 친구에게 성폭행당했는데, 지도 교수에게 알리니 오히려 교수가 "화간"이라고 주장하며 피해자를 몰아붙인 사건도 있어요.

강양구 : 책에 나온 사례죠. 심지어 그 교수께서 교수 회의에서 이런 주장을 하셨다고요?

이은의 : 네. 직장 내 성희롱은 특히나 권력의 문제이다 보니 갑을 관계가 분명하거든요. 보통 피해자가 을이고, 가해자가 갑이죠. 가해자가 결국 결정권자 혹은 결정권자와 가까운 사이일 가능성이 크죠. 거기에 한국 사회의 특징이 더해지죠. '내가 잠정적 가해자로 몰리지 않을까'하는 괜한 두려움을 남자들이 가지는 것 같아요.

김종배 : 아,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저게 저렇게 해석되면 나도…' '저건 너무 심한 것 아냐?' 하는 생각 말이죠.

이은의 : 그렇죠.

김종배 : 그러면서 나오는 얘기가 "네가 유발한 것 아니냐" "네가 야한 옷 입어서 그런 것 아니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냐"는 거죠. 책의 제목이 <예민해도 괜찮아>인데, 결국 이런 조직 논리가 "아니다"라는 거군요.

이은의 : 그 표현은 중의적이에요. 약자인 여성에게만 예민해도 괜찮다는 게 아니고요. 가장 중요한 건 함께 바뀌는 거로 생각해요. 조금 예민하게 을의 처지를 고려하자. 그럼, 자기 삶에도 괜찮고, 조직에도 괜찮다는 거죠. 주변 사람에게도 조금 민감하게 을의 처지에서 감정 이입하자는 겁니다.

김종배 : 우리 일상에서 이런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아요. 강간이라는 물리적 힘의 행사는 배제하더라도 성희롱이나 성추행 같은 경우는 특히 피해자, 특히 여성에게 오히려 "유별나다" "왜 너만 그러느냐"는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죠.

이은의 : ‘다수가 즐거우니 소수인 너희는 조금 참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엠티가면 조금 야한 게임을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중 몇몇은 그 게임을 불편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불편하다"라고 이야기하면 나는 "(다른 게임인) '공공칠빵'을 하자"고 이야기하면 되거든요.

모두가 즐거운 걸 하면 되는데, 한두 사람이 굳이 인내해야 하는 특정한 게임을 굳이 해야 분위기가 좋아진다고 바라보는 시선, 이거 한 번쯤 다시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강양구 : 책을 보면 피해자가 되었을 때 행동 수칙이 나옵니다. 유용한 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현실에서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어요.

성폭행 피해를 입었을 시 행동 수칙(26~30쪽)

△ 즉시 경찰서 여성청소년과나 원스톱지원센터에 신고하라. 신고 행위 자체만으로 피해 사실의 유력한 정황 증거가 될 수 있다.
△ 강간 사건일 경우 범죄 구성 요건이 성립하든(기수) 그렇지 않든(미수), 신고했든 못 했든 서둘러 산부인과 진단서와 정형외과 상해진단서를 발급받아라.
△ 범죄 현장에 가해자의 DNA가 묻은 휴지 등의 증거물이 있는 경우, 될 수 있으면 48시간 이내에 경찰에 제출하라. 증거물은 비닐봉지 말고 종이봉투에 넣어 보관하라.
△ 사건 후 가해자와 모호한 내용의 문자 메시지나 톡을 주고받는 건 금물. 증거가 되기 때문에 명확하게 가해자에게 구체적 사실을 확인받고, 사과를 받은 내용이 없다면 오히려 역이용당할 수 있다.
△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상황을 타개해 줄 믿을 만한 전문가를 빨리 찾아 필요한 조언을 구하고, 적합한 방법을 찾고, 심리적 안정을 취하라.
이은의 : 가능하고요. 막상 해보면 별것 아닙니다.

강양구 : 중요한 대목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당하면 맞서 싸워라

이은의 :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 자리를 사수하는 게 중요해요. 피해자 대부분은 일단 그 자리를 회피하려 하고, 회사를 그만두는 식으로 일상을 회피하려 하는데, 모든 증거 사실이나 관계성은 범죄 현장 그 자리에 있습니다. 자기 자리를 사수해야 위증을 막는다든가, 사실을 소명할 수 있습니다. 증거는 거기 남아있어요.

또 자기 자리를 떠나면(회사를 그만두면) 수입원이 없잖아요? 전투에 임할 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량미가 필요합니다.

강양구 :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폭행으로 문제가 생겼다면 가해자와 얼굴 맞대기 싫으니 회사를 그만두거나 휴직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지 말고 일단 버텨라?

이은의 : 네. 성희롱뿐만 아니라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힘희롱, 모욕 다 마찬가지거든요. 일단 버티면서 그 자리를 사수하다 보면 과거의 증거는 남아있지 않아도 다시 발생하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생기기도 해요. 문제 제기할 가능성이 생겼다고 생각한다면 (남발하는 건 좋지 않지만) 녹취를 할 수도 있고요. 또 메신저나 이메일처럼 기록이 남는 것 있잖아요? 이걸 활용하세요.

상대방에게 '나는 이러이러한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할 때는 인사팀장이나 그 부서장의 이름을 함께 넣어서, 회사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책임지도록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해당 문제가 법정까지 가기 전에 회사 내에서 해결될 가능성도 커집니다.

김종배 : 가해자가 도망갈 구멍이 없다고 보고, 알아서 내려놓을 경우가 있다는 거군요?

이은의 : 네. 그리고 직장 내 성희롱이 계속될 경우, 차라리 CC(폐쇄회로)TV가 있는 곳으로 유도한다든가 하는 대응책도 고려하시는 게 좋습니다.

김종배 : 그런데 보통 이런 직장 내 성범죄가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잖아요?

강양구 : 책에서도 직장 회식 후 자기 방에서 강간당한 피해자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렇게 심각한 성폭력 피해자가 되면 그 상황 자체를 지우고 싶잖아요? 깨끗하게 씻고 싶고, 흔적은 다 버리고 싶고.

이은의 : 그러면 안 돼요. 큰일 나요. 일단 자리를 보전하는 것, 신고를 빨리하는 것. 가장 중요해요.

비밀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곳이 의료 기관과 수사 기관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런데 피해자가 오히려 이 두 군데를 찾으면 신상 정보가 유출될 것으로 우려해서 잘 안 하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법으로 신상 보호가 되도록 시스템이 되어 있습니다. 이곳을 이용하지 않음으로 인해 "왜 그때 신고하지 않았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더 문제죠.

강양구 : 친구나 동료와 상담하기보다, 차라리 병원을 찾아가고 수사 기관을 찾는 게 확실한 조치이고, 비밀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는 말씀이죠?

이은의 : 네. 다시 말하지만, 나중에 조사를 받을 때도 즉시 신고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 신고하면 진정성 부분에서 의심받고, 증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단 신고는 하자는 겁니다.

▲ 성폭력 피해자가 됐다면 가장 먼저 증거를 보존하고, 신고해야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홈페이지 갈무리. ⓒ프레시안

약자에게만 인내 가르치는 한국 사회

김종배 :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화해서 질문해 볼게요. 조직 내에서 이런 일이 자꾸 발생하는 이유로 우리 사회에 특별한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세요? 아니면, 다른 사회도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하는 건가요?

강양구 : 이어받아서 우리 사회에 특별한 뭔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한국 특유의 조직 문화가 문제인 건가요? 아니면 한국 남자가 문제인 건가요? (웃음)

이은의 : 둘 다가 문제인 것 같아요. 그리고 두 분이 하신 말씀이 다 결합하여 있어요. 인간이 사는 사회이기 때문에 힘의 논리, 권력의 문제는 항상 발생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군대 문화가 있잖아요? 가부장적 구조가 강하고, 그게 일반 조직에도 강하게 이식되어 있죠.

우리 어렸을 때부터 "어른 말에 말대꾸한다"는 얘기를 듣곤 하잖아요? "예쁘다고 쓰다듬었는데 왜 싫어해?"라는 구박과 같은 맥락이죠. 아이는 싫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아이라고 해서 인격이 모자라고, 영혼이 덜한 게 아닐 텐데 어른이 (마음대로) 특별히 부당하게 취급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인내하라는 사고방식을 어릴 때부터 주입하죠.

학교에서는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선생님이 너를 심하게, 예를 들어 슬리퍼로 따귀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면 (정당한 체벌이니) 참아야 한다는 논리를 가르치죠. 사랑의 매라고요. 사랑하는데 왜 매를 드나요? 군대 가면 그 안에서 상명하복을 배우죠.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면 그 문화가 그대로 이어지고요.

성희롱을 바라볼 때도, 혹은 어떤 청년이 장년 상사로부터 부당함을 당할 때도 "너무 심한 정도가 아니라면 웬만하면 참아라" "왜 그렇게 말이 많아"라는 논리가 당연시되는 문화가 있죠.

김종배 : 성폭력의 근간에는 계급의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이은의 : 예. 성폭력, 성희롱은 계급 문제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양구 : 동의합니다. 그런데 한국 남자에게 특별한 문제는 없나요?

이은의 : 그건 남성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여자가 꼭 피해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요, 이성 문제가 꼭 성폭력 문제도 아니고요.

김종배 : 최근에는 여성 상사에 의한 성추행도 간간이 보도되죠.

이은의 : 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 을로서의 예의는 너무 많이 주입받아왔는데, 갑으로서 을을 대하는 예절은 뭘 배웠던가?

김종배 : 중요한 문제 제기네요.

말씀 듣다 보니 느껴지는 게, 서너 살 된 꼬마들 보면 예쁘잖아요? "아유, 예쁘다"하고 머리 함부로 쓰다듬으면 안 된다면서요?

강양구 : 전 바로 엊그제 경험했는데, 우리 아이를 데리고 놀이방에 갔어요. 아이랑 조금 더 큰 여자아이가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죠. 같이 노는 게 귀여워서 "너 몇 살이니?"하고 물었는데 저를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보더라고요. 낯선 아저씨가 접근하면 경계하라는 교육을 받은 거죠. (웃음)

이은의 : 우리는 아이가 귀여우면 만지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방법이 있어요. 손을 아이 앞에 내밀면 아이가 손을 얹어요. 아이가 (손 내미는 어른에게) 동의하면 얹죠. 아이가 동의하면 하는 거고, 아니면 그냥 보는 거예요. 우리는 덥석 만지고, 덥석 안고, 덥석 뽀뽀하죠.

김종배 :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머리 쓰다듬는 것, 엉덩이 툭툭 치는 건 기본이었죠. 볼을 꼬집어서 당겼죠. 그래서인지 "이런 것까지 문제 삼아야 해?"라며 항변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있어요. 그런데 시대가 변화고, 문화가 변화고, 정서가 변한 걸 수용해야 하는 거죠.

강양구 : 삭막해졌다고 생각하기보다 개개인의 인권 의식이 올라가고, 상호 존중하는 문화가 확산하는 결과로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인권 감수성이 올라간 거죠.

이은의 : 서로가 이렇게 예민하게 배려하면, 갑이 을을 배려하기 시작하면 을이 갑에게 마음을 열 수 있어요. 훨씬 많은 소통과 훨씬 많은 교감이 가능한데, 우리는 (갑의 처지에서) 그걸 일방통행하면서 친한 것으로 치환해버려요. "어이" 하면서 두드리고, 격려한다며 손 만지면서 "우리 친하다"라고 하는데, 정말 친한가요? 그거 친한 거 아니거든요.

갑이 을을 배려하고, 을이 갑을 진짜 존경하면서 상호 소통하고 교감해야 친한 건데 일방통행이 마치 소통인양, 친한 관계인양 둔갑하는 현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죠.

지더라도 싸워야 이긴다

김종배 : 변호사께서도 직접 겪으셨을 텐데, 특정 (성범죄 관련) 사건이 보도되거나, 특정 이유로 사회적 시선이 쏠리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때 피해자의 경우 가해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시선으로 인해 상처받는 경우도 많죠?

이은의 : 많죠. 제 사건을 감당할 때는 몰랐어요. 그때는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컸으니까.

강양구 : 이은의 변호사의 경우 본인의 일을 적극적으로 알리신 편이잖아요.

이은의 : 네. 저쪽은 항공기로 공격해오는데, 저는 항공모함이 없잖아요? 그럴 때 박격포라도 어떻게 쏠 것인가 고민을 했죠. 저에게는 언론이 그런 수단이었던 거죠.

시간이 지나고, 사건의 당사자로 공론화가 되고 나니 삶이 남잖아요. '내가 낙인 찍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회사를 퇴직하고 나서 로스쿨에 가서 생활할 때도 그런 낙인이 따라오더라고요. '이건 문제 있다'고 생각하고 말만 하면…

강양구 : "쟤 또 유별나게 저런다"는 식의 반응이 나왔죠?

이은의 : 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더 위축되는 부분이 있었고, 그런 것 때문에 상처받기도 했죠.

김종배 : 아무튼 본인은 결국 이겼단 말이에요. 그런데 소송으로 가더라도 100% 이기는 건 아니잖아요. 억울함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단 말이에요. 이런 분에게는 타격이 더 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은의 : 그렇지만 자기가 그 순간 얼마나 노력했는가? 내가 나를 위해 어떤 소명의 절차를 거쳤는가? 내가 그저 망각으로 치유했는가, 아니면 나를 위해 노력했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며 노력하는 과정이 의미가 있습니다.

강양구 :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부당함에 저항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싸우는 게 힐링의 과정일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이은의 : 네. 왜냐하면 (침묵할 경우) 굴욕감이 그대로 남고, 좌절하면 그것도 학습되거든요.

제가 가끔 강의하러 갈 때 하는 말이 있어요. 좌우명이 뭐냐고 물어보시면 "섬싱(something)이 애니싱(anything)보다 좋겠지만, 낫싱(nothing)보다는 애니싱이 낫죠"라고 해요. 뭐라도 있는 게 좋죠.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그리고 그 문제가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면, 내가 나를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의 기억이 애니싱이 될 수 있고, 결과마저 좋다면 그게 섬싱이 될 수 있죠.

김종배 : 결과가 꼭 승리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당당함을 확인하면서 치유할 수 있다는 말씀이죠. 그런데 쉬쉬하고, 혼자 끌어안고 마는 경우가 사실 훨씬 많잖아요. 이런 분도 많죠?

이은의 : 그런 분이 상담하러 많이 오세요. 법적 다툼은 아니라도 그냥 말하고 싶다.

아,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덧붙일 게 있어요. 때로 가족이 더 큰 상처를 줘요. "그 정도면 괜찮잖아" "너 그때 거기 왜 갔어" "그런 술자리 따라다니지 말라고 했지" 하면서요.

▲"(한국 남성은) 소통할 줄 몰라요." ⓒ프레시안(최형락)

"사실 가해자도 불편한 상황을 알아요"

강양구 : 책을 보면 이런 얘기도 나오죠. 성폭력 상담하는 활동가 중에서도 푸념처럼 "요즘 여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왜 그 시간에 클럽에 있고, 낯선 남자와 술 마셔요" 하는 식으로요. 그런 얘기를 듣고 답답했다는 대목이 기억이 납니다. 실제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 사이에서도…

이은의 : 더 심할 수 있죠. 앞서 말씀드렸듯 한국 사회가 가진 고정관념은 남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거든요.

이 책은 어떤 스타트라고 생각해요. 여성에 대한 책처럼 보이지만, f(x)=y, 한국 안에서 권력의 문제, 갑을의 문제에서 이번에 을(x)에 여성이라는 변수를 넣었을 뿐이에요. 예민해도 괜찮은 건 청년의 문제, 빈곤의 문제, 노동의 문제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자신을 위해 뭘 했던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권력 문제에 얼마나 둔감했던가, 내가 갑이 되었을 때 나는 을에 대해 어떤 배려를 했으며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김종배 : 직장 내 성폭력 예방 차원의 인권 교육을 하잖아요? 이런 데 나가보시죠?

이은의 : 네.

김종배 : 수강생 반응이 어때요?

이은의 : 반응 좋아요. 처음에는 시간 때우러 오시는데, 그래서 사건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러면 약간 귀 기울이시죠. 특히 남성. (웃음) 끝에 가서 얘기해드리죠. "갑으로서 예민해야 을의 목소리가 들리고, 을의 목소리를 들어야 내 마음의 목소리도 들린다. 내가 상대를 배려해서 친하자고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상대에게 밀어붙이는 건지"하고요.

갑이 이런 준비가 되어야 을도 이런 문제에 과민하지 않고 '이건 아닌데' 싶을 때 "부장님, 저 조금 불편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지금과 같은 소통 구조에서는 이게 안 돼요. 그거는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강양구 : 책에 공감되는 부분이 있는데, 가해자는 자기가 미처 몰랐다고 하지만 사실 피해자도 알고, 가해자도 이게 불편한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하셨죠. 공감했습니다.

이은의 : 항상 제 강의의 마지막이에요. '너목듣 나목듣'. 네 목소리도 듣고, 나의 목소리도 들어라. 귀를 열면 네 목소리도 들리고 자기 목소리도 들린다는 겁니다.

김종배 : 일반 강연도 많이 하실 거잖아요? 단순화해서 여쭤보면, 남성과 여성의 성 인권 감수성의 차이를 느끼세요?

이은의 : 차이를 느끼고요. 그런데 남성 가운데도 힘들어하는 분이 많아요. 술자리에서 "이 대리, 결혼했는데 애는 언제 나와?" 이런 얘기 들을 때 누군가는 '내가 성생활 잘하느냐고 묻는 건가'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누군가는 의학적으로 불임일 수 있고, 누구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이가 안 생길 수 있잖아요? 이런 얘기를 여성만 민감해 하고 힘들어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다만, 대체로 우리나라 여성은 개방적 행동이 미덕이 아닌 거로 배우는 반면, 남성은 개방적이고 과시적인 행동이 매력적이라는 식으로 교육받아와서 양자 사이에 감수성에 분명히 차이는 있죠.

강양구 : 대중문화에서도 이런 사고방식을 주입받고요?

이은의 : 맞습니다. 그래서 성적 감수성을 갖기 힘든 거죠.

소통할 줄 모르는 한국 남성

강양구 : 책에서 잠깐 언급하시지만, 현빈이 하면 로맨스, 평범한 중년이 하면 준강간, 이런 상황이 있잖아요. (웃음)

이은의 : 거기서 본질은 이런 거죠. 서로 교감하는 상태에서 남성이 박력 있게 밀고 들어오면 현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놈이 뭐지? 싶은데 현빈 흉내 내는 사람은 성폭력이 되는 거죠. (웃음)

김종배 : 연예 초기에 숙맥이 있을 수 있잖아요? 이 여성이 정말 나를 싫어해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나를 싫어해서 저러는 건지 구분 못 하는 사람이요. 그래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처럼 생각하고 밀어붙이는 사람도 있죠.

이은의 : 그게 성폭력 만들고, 스토킹 만드는 사고죠. (웃음)

김종배 : 거기다 대고 남자 선배들이 부채질하죠. "너는 남자가 왜 박력이 없느냐" 하면서요.

강양구 : 여성 중에도 "키스해도 돼?" 하고 묻는 남자를 두고 "바보 아니냐"고 놀리는 분들이 있잖아요? (웃음)

이은의 : (웃음) 사실 당사자들은 다 알아요.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이 상황에서 스킨십의 진도를 나가도 되겠구나, 이렇게 다 교감해요. (상대방이 싫어하는데 억지로 밀어붙이는 사람은) 네 목소리를 안 듣겠다는 거예요. 내 목소리를 밀어붙이면 네 목소리도 바뀔 거라고 생각하겠다는 거잖아요? 나쁜 사람이죠.

김종배 : 몇 년 전 경범죄처벌법이 개정되면서 스토킹 처벌 조항이 들어갔죠. 한편에서는 "약하다"는 반응이 컸지만, 정반대 측에서는 "스토킹과 구애를 어떻게 구분할 거냐"는 반론도 나왔어요. 주로 남성 사이에서요. (웃음)

이은의 : 앞서 한국 사회에 특별한 뭔가가 있느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있어요. 그게 뭐냐면 소통이에요. 소통할 줄 몰라요. 나직이 물어보면 돼요. "나는 네가 좋은데, 너는 내가 어때?"하고 물어보면 돼요. 그런데 자꾸 생략하려 해요.

강양구 : 여기도 소통 문제가 있군요. (웃음) 궁금하면 물어보면 될 것을.

이은의 : 그렇죠.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 해요. 앞서 제가 아이에게 손 내밀고 부탁해보라고 했잖아요? 그건 어른이 아이를 대할 때만이 아니라, 남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지금 네가 아주 좋다고 말할 수 있잖아요? 꼭 "내가 지금 너에게 키스해도 되겠니?"라고 물어볼 필요는 없다는 거죠. 소통할 줄 모른다면, 내가 숙맥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소통을 위해 노력해야죠.

강양구 : 이 책에 한국 유부남 얘기도 나와요. 가해자 중 유부남도 많잖아요?

이은의 : 유부남인데도 그러는 분이 계시죠.

강양구 : 책에는 '껄떡댄다'는 표현도 쓰셨던데. (웃음) 한국의 적잖은 유부남이 '젊은 (미혼) 여성이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한다면서요?

이은의 : 제가 작년에 30~40건의 유사 사건을 맡았는데요, 대질신문 가서 깜짝 놀랄 경우가 많았어요. 가해자가 "저 여자가 나를 좋아했다. 서로 좋아해서 했다"라고 하는 경우가 놀랄 정도로 많아요.

김종배 : 그것도 대부분 갑의 위치에서 착각하는 건가요?

이은의 : 그렇죠.

강양구 : 좋아했다는 신호가 기껏해야 "나에게 커피를 사줬다" 정도라면서요?

이은의 : 네. "이 여자가 혼자 가도 되는 회의에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다." 이런 거죠. 같이 회의 가자는 게 사귀자는 얘기는 아니잖아요?

제가 피해자일 때 언론 보도를 부탁하며 <프레시안> 기자를 만났는데 째려보겠어요? '나 좀 도와주세요' 하는 눈빛을 하겠죠. 학생이 자기 학점을 매기는 선생님을 대할 때 '저 좀 봐주세요' 하는 눈빛을 가질 거 아니에요? 후배가 상사를 대할 때 눈빛이 어떻겠어요?

강양구 : 존경한다는 눈빛, 인정받고 싶다는 몸짓?

이은의 : 그럼요. 그걸 구별하지 않는다는 거죠. 저도 직장 생활할 때 그런 얘기 많이 들었거든요. 술 먹고 물어보기도 하시고. (웃음)

강양구 : 책에서는 심지어 "한국의 처녀는 유부남을 절대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까지 하셨어요. (웃음)

이은의 : '절대'는 당연히 아니죠. 누군가는 유부남을 사랑할 수 있겠지만, 사랑의 속성 중 하나는 배타성이잖아요. 유부남은 주말에 못 만나고, 밤에 함께 있다가도 후다닥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연애를 누가 하고 싶겠어요? 유부남의 로망일 순 있지만, 정상적 연예 관계로 보기는 어렵죠.

저질 언론은 2차 가해자

김종배 : 개별 케이스로 따지자면 얘기가 끝없을 것 같고요. 이 책 <예민해도 괜찮아>를 읽어보시면 많은 사례가 소개되고, 특히 상담 사례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책을 읽으시면서 여러 가지 생각해 볼 거리를 얻으실 겁니다.

우리나라의 인권 감수성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보세요?

▲<예민해도 괜찮아>(이은의 지음, 북스코프 펴냄.) ⓒ프레시안
이은의 :
더디죠. 제가 사건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고, 저보다 더 심하게 회사에 당한 사례도 많아요. 회사 측을 대리하는 변호사가 피해자 인신공격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데 그게 안 됩니다. 법정에서 좋은 판사님도 만나지만, 가끔은 드라이하게 쓴 소장을 보고도 "주관적으로 쓴 건 배제해주십시오"라고 하는 분도 있죠. 피해자들은 그런 말 하나하나에 상처받거든요. 수사 기관, 언론도 마찬가지고요.

김종배 : 2차 가해가 더 문제 된다는 건가요?

이은의 : 지금은 더 문제 돼요. 앞서 말씀드린 지도 교수 '화간' 사건의 경우, 모 케이블 언론이 일방적으로 자극적 취재를 들어왔어요. 어떤 식으로 됐는지 모르겠지만, 피해자 정보가 그 언론에 털렸죠. 기자가 피해자 집 앞까지 주말에 찾아오고, 전화했어요. 제가 기자와 전화해서 결국 담당하던 여기자를 울리기도 했고요. (웃음) 당시 그 기자께서 "특종 준다고 약속하면 지금 보도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거래를 시도하더라고요.

김종배 : 최근 언론 환경이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간다고 느끼는 게, 종합편성채널 생기고 방송이 무한 경쟁 구도로 가면서 사회성, 사건성 뉴스가 중계 방송되고, 그것이 시청률을 올리는 주된 공신으로 취급받으면서 더 자극적으로 치닫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어요.

강양구 : 언론이 사회의 공기라는 표현이 있는데, 인권 감수성, 을의 시각에 서는 노력을 어느 기관보다 언론이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갈수록 그게 안 되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 같아서 언론에 몸담은 입장에서 참담한 심정입니다.

김종배 : 이제는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이은의 변호사 모시고 독서통 진행했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독서통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은의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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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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