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교수 마지막 인터뷰 "먼 길 함께 걸었으면…"

햇볕 못 쪼이면 발병하는 '흑색종암'에 "담담합니다"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지난 15일 밤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가르침은 여전히 우리에게 일깨움과 감흥을 주고 있습니다.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웹진 <다들>은 지난해 10월 투병 중이던 신영복 교수와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고인의 마지막 인터뷰입니다. 인터뷰는 웹진 <다들>(바로가기)의 발행인인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김영철 원장이 진행했습니다. <다들>의 허락을 얻어 <프레시안>에 인터뷰 전문을 싣습니다.

"세상에,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렇게 예쁘고 고즈넉한 공간이 있었다니···."

신영복 선생이 인터뷰 장소로 정해준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대성당 뜨락에 막 들어섰을 때, 일행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선생의 안내로 성당 뒤켠으로 들어서자 한옥으로 단아하게 지어진 사제관과 잘 가꾸어진 앞마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을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오랜 가뭄으로 푸석해진 마당을 적시던 2015년 10월 26일 저녁, 사제관을 둘러싼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건축물들 사이에 옅은 어둠이 스며들었다. 어둠 때문이었을까? 이국풍의 주변 건축물들이 전통 한옥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사제관과 마주하고 있는 성가수녀원 건물 1층 휴게실에서 신영복 선생과 마주 앉았다. 성공회대 인문학습원이 주 1회 강의실로 쓰는 건물이다. 선생은 인문학습원 초대 원장으로 5년 넘게 일하다 2013년 같은 대학 신문방송학과 김창남 교수에게 원장 자리를 물려줬다. 항암 투약 탓인지 조금 수척한 모습의 그는 그러나, 1시간 넘어 진행된 인터뷰 내내 특유의 소년 같은 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인터뷰 자리에는 김창남 교수와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정책·홍보팀의 김혜영 팀장, 황미연 과장, 전아림 주임이 함께 했다.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다들

- 병마와 싸우고 계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디가 편찮으시고, 최근 병세는 어떠신지요?

지난해 가을에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미 그 때, 여러 군데 전이가 되어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하더군요. 의사인 후배 교수 두 분이 아주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증 암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실험 프로그램에 들어가 집중 치료를 받고 있구요.

- 어떤 암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흑색종암이라구요. 햇빛이 귀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암이라고 하더군요. 햇빛을 오래 못 받으면 걸릴 수 있다는 거지요. 통상적으로는 잘 발병을 안 한데요.

- 혹시 감옥생활, 특히 독방에 오래 계시면서 햇빛을 잘 못 받아 그런 것 아닐까요? 최근 상태는 어떠십니까?

임상 실험 프로그램을 시작한 뒤에는 한동안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7~8개월 지나고 약에 대한 내성이 생기면서 다시 조금 안 좋아지고 있네요. 지금은 다른 치료법으로 바꾸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암 판정 받아, 수술 불가능하나 담담한 심정

- 많은 분들이 빠른 호전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음 굳게 잡수시고 투병 생활 잘 하시길 바랍니다.

하도 고비를 많이 넘긴 사람이라, 가족들이나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서도 내가 제일 담담합니다.

- 몇 년 전 방송인 김제동 씨와 했던 인터뷰에서 20년의 감옥생활을 견딘 힘이 '깨달음'이라고 하셨더군요. '하루하루 찾아오는 깨달음'이라구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깨달음은 어떤 것이길래 그리 큰 힘이 되었습니까?

깨달음은 바깥으로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성찰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런 깨달음이란 게 우리가 느끼는 가장 깊이 있는 행복이지요. 감옥 가니까 일반수들이 저한테 무기수가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많이 보냐고 물어요. 그 사람들한테는 징역 만기날짜를 기다리는 게 생활의 전부입니다. 돌멩이로 벽에 달력을 그려놓고는 하루 지나가면 금 하나 긋고 또 하루 지나면 다시 하나 긋고, 그런 식이지요. 오늘이란 게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램 하나로 살아가는 겁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지루하니까 오전에 금 하나 긋고, 오후에 거기에 반대 방향으로 다시 금을 그어서 X자를 그리기도 하구요.

- 무기수는 사정이 다른가요?

많이 다릅니다. 무기수는 하루가 빨리 간다고 별로 좋을 게 없잖아요. 다만 오늘 하루가 보람 있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지요. 그 보람이란 게 사람마다 다 다르긴 하지만 제 경우는 세계에 대한 깨달음,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스스로가 아주 새롭게 변하는 걸 경험했습니다. 기약 없는 세월 속에서 유일한 보람이었지요.

- 바로 그 보람이 감옥생활을 견디는 힘이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폴 에르되시라는 헝가리 수학자가 있었어요. 세계적인 수학자인데,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이렇게 묘비명을 써 놓았답니다. "마침내 나는 더 이상 어리석어지지 않는다." 하루하루 깨달아가면 모르는 게 더 많아지거든요. 점점 깨달을수록 어리석어진다는 말이 실감 나게 됩니다. 그런데 죽으면 더이상 어리석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그런 식으로 한 것이지요. 이 무한한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아주 미미하다는 표현이기도 하고, 공부하고 성찰할 게 엄청나게 많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이 기약 없는 무기징역을 견디는 힘이었지요.

- 방금 말씀하신 것들은 감옥에서 읽은 책들의 영향인가요?

나는 감옥에서 책 몇 권 읽고 나왔다, 뭐 이런 얘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책이 중요하지 않고,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자기 재구성 능력이 훨씬 중요하지요. 감옥에서는 전혀 예상치도 않게, 자기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들, 밖에 있으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그런 사람들과 만나게 되지요. 수많은 사람들의, 엄청 많은 사연들을 접하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팔만대장경이지요. 기상 한 시간 전인 새벽에, 옆 사람 깨지 않게 무 뽑듯이 몸을 뽑아서 벽에 기대면 냉기가 온몸에 확 퍼집니다. 몸서리가 처지고 정신이 깨어나지요. 바로 그 시간에 어제 많은 사람들에게 들었던 팔만대장경 같은 수평적 사연들을 수직화하는 작업을 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다양한 수평적 정보들을 수직화하는 능력을 필요로 하지요. 절대로 많은 정보를 얻는다고 깨닫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오히려 혼란만 더하지요. 그 많은 정보를 수직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인식을 심화시키면서 재구성 능력을 높여가는 게 바로 공부이고 학습입니다.

책 많이 읽는 것 중요하지 않아, 삶 속에서 깨닫는 능력이 우선

- 공부, 학습, 이런 말이 나온 김에 여쭙겠습니다. 최근 들어 '평생교육', '평생학습', 이 두 말이 마구 뒤섞여 쓰이고 있습니다. 'life long education'과 'life long learning'을 혼동해서 사용하는 셈이지요. '교육'이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학습'은 자발적이고 상호소통적인 측면이 더한 것 같아서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을 설립할 때 '평생학습진흥원'이 더 맞는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교육부에 유권해석을 의뢰했는데, 법적 용어가 '평생교육'으로 되어 있으니 '평생교육진흥원'이라고 해야 한다는 거예요. 공공 영역으로 갈수록 '평생교육'이란 표현을 많이 쓰는 편이고, 민간이나 현장쪽에서는 '평생학습'이란 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육'과 '학습', 의미상 명료한 구분이 가능합니까?

확연히 다른 말이지요. 논어 첫 구절이 '而時習之'입니다. 여기서 '習'을 '復習'의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習'자를 보면 날개 '羽'자 두 개 밑에 휜 '白'자가 있지요? 부리가 하얀 어린 참새가 바깥의 엄마 도움을 받아 막 나르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실천'이라는 의미이지요. 이 구절에서 '時'도 '자주', 혹은 '때때로'라는 의미라기보다 적절한 시기, 여러 조건이 성숙한, 딱 맞는 때라고 해석하는 게 옳습니다. 이렇게 풀이하면 '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는 구절은 우리가 흔히 아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풀이보다 '주객관적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실천하는 게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해석하는 게 맞습니다.

- 결국 실천의 문제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단순히 배우기만 한다고 기쁜 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개인적, 사회적 실천과 연결이 되어야 진정한 공부라는 거지요. 그래야 참된 기쁨이기도 하구요. 그런 맥락에서 '교육'보다 '학습'이 실천의 의미를 더 많이 함축하는 것이고, 우리가 추구하는 참된 공부이기도 합니다.

(인터뷰가 꽤 오랜 시간 지속되는데도 선생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말은 명료했고, 말씨는 부드러웠다. 선생의 부드럽고 나지막한 말씨에 실려온 덕일까? 딱딱하고 낯선 개념어들도 편안하고 쉽게 다가왔다. 하지만 '실천'과 '성찰'을 강조할 때는 어조에 힘이 느껴졌고, 표정에도 단호함이 묻어났다.)

감옥에 있을 때,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 아래서 책을 읽기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려고 했지요.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 무작정 읽기, 목표 없는 지식 쌓기보다 읽은 것, 쌓은 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내면화하는 게 참다운 공부, 즉 '학습'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교육은 그야말로 어떤 대상을 일방적으로 키워낸다는 의미가 강한 것이구요.

지식 넓히기보다 생각 높이려고 안간힘 썼다

- 감옥을 대학으로, 감옥살이 할 때를 '나의 대학 시절'로 표현하면서 그 안에서 참으로 많은 걸 배우고 깨우쳤다고 하셨습니다. 영락없는 '평생학습의 원조'인 셈인데요. '원조'입장에서(웃음) 우리나라 평생학습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랄까 가치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공부의 '工'자가 장인 공,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뜻하는데, 하늘과 땅을 연결해서 통합적으로 인식한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夫'자에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통합하는 주체가 사람으로 되어 있구요. 갑골문에는 호미 같은 게 '공'자이고, '부'자는 사람으로 표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농기구를 가지고 생산한다는 의미이지요. 결국 참된 공부는 사람이라는 주체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거라는 뜻입니다. 근대적 세계관에서는 세계가 주체인 나와 관계 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겁니다. 그런 세계는 없어요. 나라는 주체가 먼저 존재한 뒤 세계와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세계가 재구성되는 것이지요. '천지인'(天地人), 그러니까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 통합되어야 참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은 진리를 뜻하는 '眞'이고, 지는 모든 걸 길러내는 땅으로 '善'에 해당됩니다. 이 두 개를 조화시키는 사람의 주체적인 능력이 아름다울 '美'구요. 이렇게 진선미를 통합하는 게 진정한 공부입니다.

- <담론>에서 공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대목 역시 실천의 의미를 강조하신 겁니까?

머리로 이해하는 게 소위 말하는 합리주의적 사고입니다. 그런 공부는 텍스트에 밑줄 치고 암기하면서 하는 건데 크게 어렵지 않아요. 가슴까지 와야 한다는 건 공부 대상에 대한 공감과 애정으로 나가야 진정한 공부라는 뜻입니다. 처음 5~6년 감옥살이할 때 함께 징역 사는 숱한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얘기를 들으면서 그 사람들을 대상화하거나 분석하곤 했지요. 그러다 차츰 '아, 나도 저 사람 부모 같은 사람 만나 저런 인생 역정을 거쳤으면 똑같은 죄명으로 감옥에 앉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더라구요. 대상화하고 분석하는 근대적 인식틀이 조금씩 깨져나갔던 것이지요. 그 사람들과의 공감과 애정, 이런 게 생기면서 내 공부가 가슴까지 온 것입니다. 스스로 대단한 발전이라고 여겼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담론>에도 썼듯이 감옥에서 집을 그리는데, 책을 읽으며 머리로만 공부했던 나는 지붕부터 그려나간 반면, 같이 징역을 살았던 노인 목수는 집을 짓는 순서 그대로 주춧돌부터 그리더군요.

바로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노인더러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나는 지붕부터 그립니다' 하면서 '우리 사이의 차이와 다양성을 승인하고 평화롭게 공존하자'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그럴 듯 한데,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서구 근대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윤리가 공존과 톨레랑스인데, 톨레랑스에는 강자의 패권적 사고가 스며 있습니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존을 승인할 것이 아니라 이 차이를 정확하게 인식해서 자기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차이란 것은 자기 변화의 교본입니다. 이런 변화를 위한 실천으로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공부라는 겁니다. 그래서 참된 공부는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다들

참된 공부는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

-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다. 스승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우리 시대의 스승, 우리 당대의 사표는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개인에게서 전인격적인 사표를 찾으면 안 됩니다. 그보다는 집단 지성이 한결 중요하지요.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모아 하나의 종합적인 지혜를 만들어 가는 것, 함께 공부하는 평생학습의 가장 뛰어난 점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함께 공부하고 더불어 학습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벗이며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집단 지성이 표출되면 그게 바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사표가 되는 것이지요. 중국 명나라 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친구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스승이 될 수 없고, 스승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친구가 되지 못한다'.

-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훌륭한 개인이 우리 시대의 스승 혹은 사표가 되어서 길을 밝혀주길 바라는데요?

원래 '스승' 혹은 '사표'는 당대 사회에는 없는 법입니다. 당대에서는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계급의 이해관계, 혹은 집단간의 갈등,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다산 정약용도 당대에는 전혀 사표가 아니었어요. 연암 박지원도 마찬가지구요. 정약용 같은 사람이 역사에 실존했었다는 게 우리에게 큰 자산이고 교훈이지만 다산도 당대에서는 그냥 죄인이었거든요. 사표와 스승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 은평평생학습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 가운데 '숨은 고수'라는 강좌가 있습니다. 실생활의 다양한 분야에'서 고수가 된 분들이 자신의 경험과 기술, 지혜, 깨달음 등을 나누는 강좌인데, 아주 인기가 많아요. 이런 강좌야말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평생학습과 많이 닿아 있는 것 같은데요?

필요한 강좌이고 좋은 아디이어라고 생각합니다.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사유를 학습하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부니까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죄다 공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강좌는 참된 공부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역시 이렇게만 끝나면 안 됩니다. 공부는 이 사회를 보다 나은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당대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모순과 부조리, 변화시켜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과 분석이 있어야 되지요. 숨은 고수가 단순한 생활의 달인의 기술 전수이면 안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공부는 절대 실생활의 실용성에 머물면 안 됩니다.

-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공부하게 되어 있다"고 말씀 하셨는데, 풀이가 필요한 말씀 같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공부는 생명의 존재방식이니까요. 국화 한송이가 뿌리를 뻗어가면서 어디에 물이 있는지 더듬어 가는 것처럼. 지난 여름 폭풍우 때 달팽이도 나뭇잎 위에서 생존을 위해 엄청난 공부를 했을 겁니다. 숨은 고수 프로그램처럼 실생활에 유용한 게 공부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장 자기에게 무언가를 안겨주는 유익한 것을 찾는 사람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진짜 공부를 잘 하는 법이지요. 사람을 크게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두 부류로 나누기도 하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추기보다 세상을 자기에게 맞출 수 없을까 고민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이 그나마 변화한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 때문이지요. 그래서 공부는 어리석게 해야 합니다. 당장의 이익을 쫒지 말구요.

당대에는 스승이나 사표 없어, 우리 시대의 스승은 '집단 지성'

- 거의 모든 대학들이 평생교육원을 개설하고 있지만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탓에 제대로 된 평생교육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성공회대 인문학습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한 평생교육원으로 뿌리를 내렸는데요. 인문학습원 설립자 입장에서 대학이 평생교육에 제대로 기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교육하고 공급하는 기능도 대학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이긴 합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기능은 대학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곳들이 많습니다. 대학에서는 기본적인 교육만 시키고 기업들이 비용을 들여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들면 되지요. 기업이 요구하는 사람을 가르치고 배출하기 위한 대학 교육은 기업이 국가나 학부모한테 자신들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교육 자체를 망치는 것이지요.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하지 않아요? 진짜 대학 교육은 10년 뒤, 100년 뒤 우리 사회에 필요한 대안적 미래 담론을 만들어 내고 이를 가르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대학들이 당장 돈벌이 되는 것, 사회적 수요가 많은 것들만 뒤따라가면서 이를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건 대학의 진짜 사명과 기능이 아니지요. 현재 우리 대학들은 기업들의 막강한 자본력에 완전히 포획되어 있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까울뿐입니다.

- '감옥'이라는 대학에서 20년 동안 공부하다가 졸업한 지 어느덧 30여년이 가까워 옵니다. 출옥 후에도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학습하신 것으로 아는데, 공부 혹은 학습 장소로 감옥과 사회, 어느 쪽이 좋습니까?(웃음)

당송 팔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한유라는 사람이 '성인은 무상사'라는 말을 했습니다. 성인은 정해진 스승이 없다, 성인,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한테는 모든 게 다 스승이라는 말이지요.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도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는 반면교사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한유의 말은 결국 '정해진 학교는 없다, 학교는 도처에 있다'뭐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공부란 이런 것이다' 하는 데 대한 틀에 박힌 관념을 걷어내면 사람살이 모든 게 공부가 됩니다. 이 세상 모든 곳이 다 학교구요.

- 2013년에 제정된 평생교육법에는 '평생교육'을 "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을 제외한 모든 형태의 조직적인 교육 활동"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법적인 개념이나 정의가 늘 그렇지만 평생교육, 평생학습의 다양한 내용에 비해 비해 너무 메마르고 단조로운 규정이라는 느낌입니다. 평생교육, 평생학습을 신영복 식으로 정의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마디로 '먼 길을 함께 가는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공부는 여럿이 함께 하는 게 맞습니다. 혼자서 하는 공부는 참된 공부가 아니지요. 돌이켜보면 내 경우에도 선생님한테 배운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동료나 친구, 후배들한테 배운 게 훨씬 많구요. 사실 그렇게 배운 게 더 선명하고 더 직접적입니다. 비슷한 환경과 조건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의견 교환이나 충고, 공감과 교감, 이런 것들이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우리 모두 경험으로 다 알잖아요? 여럿이 함께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게다가 먼 길을 함께 가는 사이라면 더욱 깊은 영향을 주고 받게 되구요.

평생학습 활성화가 우리 사회 인간화 촉진시킬 것

- 현실을 보면 우리를 압도하는 이런 비인간적 공세가 너무 무지막지한 나머지 이를 극복해 보려는 여러 노력이나 움직임들이 너무 나약하고 실효성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런 비인간적 가치를 확대 재생산하는 게 교육이고, 그게 학벌사회, 서열사회를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학습에 참여하게 하는 것도 우리 사회의 인간화를 위한 좋은 실천일 수 있습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지배담론, 기득권세력에 대항하고 저항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음모의 작은 숲'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거듭 역설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붓글씨로 '더불어 숲'이라고 쓰고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더불어 숲이 되어 지켜주세요'라고 강조하고 다녔지요. 여기서 숲은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서 숨통을 틀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옛날에 며느리들이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수다를 떨었잖아요? 그러면서 가슴에 쌓인 것들을 풀어내고 카타르시스를 하는 건데, 그런 공간, 작은 숲을 생활 속에 계속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계신 평생학습의 공간들은 아주 효율적이고 가치 있는 숲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작은 숲들이 서로 만나면 상당히 중요한 사회적 역량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평생학습의 작은 숲들이 만나서 새로운 역량으로 증폭되는 곳이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서울 진흥원의 웹진 <다들>의 주요 독자층은 서울에서 평생교육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분들입니다. 정책 담당자들은 물론이고 자치구 일선 현장에서 땀 흘리는 평생교육사 분들, 평생교육을 전공한 학자나 교수 분들, 평생학습을 하고 있거나 평생학습을 통해 동아리 활동을 하고 계신 수많은 시민들도 독자이십니다. 이 분들께 선생님의 특별한 격려 말씀을 전해주시지요.

평생학습이야말로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가장 중요한 작은 숲입니다. 평생학습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깨닫고, 더불어 실천하는 것이 곧 작은 숲들을 확산하는 일입니다. 질식할 것 같은 우리 사회의 숨통을 트는 일이기도 하구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길게 보면서, 먼 길을 함께 걸었으면 합니다. 저도 그 길에 동행할 것을 약속 드리지요.

(장시간의 인터뷰를 감당해 주신 선생께 스케치북을 슬며시 내밀었다. 몰염치하게도 <다들> 창간 축하 글씨를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다. 얼마나 자주 글씨 부탁을 받는지, 선생은 아예 속주머니에 붓펜을 가지고 다녔다. 붓펜을 꺼낸 뒤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곧바로 써내려 갔다.)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다들

(헤어지기 직전, 일행이 가지고 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담론>, <강의>에 일일이 저자 사인을 해주는 선생께 슬쩍 물었다.)

- 글씨는 어떤 태도와 자세로 써야 합니까?

잘 쓰려고 해선 안 됩니다. '무법불가, 유법불가'이지요. 글씨 쓰는 법이 있어도 안 되고, 글씨 쓰는 법이 없어도 안 됩니다. 교육과 학습의 이상적 형태도 바로 이런 자유로움과 다양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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