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는 왜 소녀상 철거에 집착하나?

[기고] 12·28 위안부 문제 합의의 정치학 : '방법'으로서의 민주주의

지난 해 12월 28일 한국과 일본은 20년 이상 지속돼온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전격 합의했다. 하지만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선언한 양국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이번 합의는 격심한 갈등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로 빠져들고 있는 인상이다. 여기서 흥미있는 점은 이번 합의에서 최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합의문 내용도 문제지만, 정작 합의문에는 포함되지 않은 소녀상 철거 문제가 최대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2·28 합의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합의 자체에 대한 찬반은 거의 동수를 보이고 있다. 반면, 소녀상 철거문제에 대해서는 한국국민들 3명 가운데 2명은 철거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념비적인 12·28 합의가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한일 양국 사이에 가장 치우기 힘든 장애물을 없앨 것"이라던 <뉴욕타임스>의 기대 섞인 보도와 달리, 이번 합의가 한국과 일본은 물론 역내 국가들 간에 또 다른 갈등의 시작이 될 가능성이 오히려 높아 보인다. 일본의 법적 책임과 국가적 배상을 주장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요구는 정당하고 올바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올바름이 이 문제를 둘러싼 여러 행위자들의 입장이 다양하고, 때로는 상반될 수도 있다는 면에서 12·28 합의를 둘러싼 해석의 문제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한국, 일본은 물론, 미국 등 주변의 국가 행위자가 위안부 할머니들에 비해 더 큰 힘을 가지고 있고, 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게 현실이다. 한마디로, 현재는 12·28 합의 이후의 사태 전개에 대해 현명하게 판단하고 냉철하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고의 세월과 오랜 투쟁은 자칫 물거품이 될지도 모를 위기 상황이다.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미 하원 위안부 결의안, 그리고 사사에 안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발표한 '고노 담화'의 가장 큰 의의는 위안부 문제의 책임이 군에 있음을 일본 정부가 처음 인정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위안소에서의 생활 역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한 강제적인 상황 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고 하여 위안소에서의 강제성을 인정했다.

'고노 담화'에 대한 정치적 해석의 문제는 보다 격 높은 문서라 할 수 있는, 일본의 패전 50주년에 즈음해서 1995년 8월 15일 각의결정에 따라 무라야마 총리가 발표한 '무라야마 총리담화'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무라야마 담화'는 전후 최초로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라는 두 가지 과오를 정부 차원에서 공식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죄'를 표명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고노담화'에서 언급한 위안부 문제 역시 무라야마 담화가 표명한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통절히 반성하는 차원에서 해결하는 게 논리적으로도 타당하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담화 이후 일본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접근하는 관점과 해결책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반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왜냐하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그에 입각한 공식적인 배상을 실행에 옮기기 보다는 '법적 책임'이 아닌 '도의적 책임'이라는 미명하에 '아시아 여성기금'이라는 민간기금을 설립하여 '위로금' 지급만을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라는 공식적 레토릭과 달리,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일본정부의 해결방식은 전혀 그러한 입장표명에 전혀 걸맞지 않은 것임이 드러났다. 이쯤 되면 진즉부터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별로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보다 심각한 사태는 2006년 아베 1차 내각이 들어선 후 '고노 담화'마저 부정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일본정부의 책임회피와 역사왜곡에 쐐기를 박은 것이 바로 2007년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문제 관련 결의안이었다. 사실, 미 하원 결의안은 위안부 문제에 관련하여 국제적으로 인정된 표준인식을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 간의 외교적 특수 관계로 말미암아 미 하원 결의안은 일본정부에 다른 무엇보다도 큰 압력으로 작용했다.

이 결의안은 먼저 태평양 전쟁 이전과 전쟁 중에 수십만의 아시아계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성노예로 만든 책임이 일본군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의 성격 역시 엠네스티가 정의한 대로 "비인도적인 범죄"에 상응하는 것이다. 동 결의안의 내용은 별도의 해석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명료하고 직접적이다. 그 핵심내용을 요약한다면, 일본정부가 위안부 여성들의 고통에 대해 분명한 방식으로 공식 사죄해야하며, 민간기금 설립 등으로 사태를 오도하기 보다는 위안부 여성들에게 적절하고 공식적인 배상을 일본정부가 직접 제공해야 함을 강력히 촉구한 데 있다.

미 하원 결의안이 일본정부의 위신을 국제적으로 실추시킨 일이었다면, 한국정부로 하여금 위안부 문제 협상에 적극 임하도록 한 계기는 바로 2011년의 헌재 결정이었다. 헌법재판소는 한·일 양국 간의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해 구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상의 분쟁이 존재하며 협정 제3조에 따라 한국정부가 해결하려는 노력을 취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와 이명박 대통령 사이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등장한 해결책이 바로 '사사에 안'이다. 일본은 총리가 직접 사과 편지를 보내고, 정부 예산으로 피해자 보상을 진행하는 등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일본이 '도의적 책임을 전제로 한 인도적 조치'라고 표현함으로써 여전히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사사에 안'을 거부했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와 질식하는 일본 민주주의: 12·28 합의 분석

'사사에 안' 이후 한일 간 위안부 협상은 교착국면에 접어들었다. 다른 무엇보다, 2012년 제2차 아베 정권의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사회가 한층 우경화됨으로써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베 정권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가 식민지 지배와 태평양 전쟁 등 일본 현대사 전반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을 시도하기로 작정했다. 대표 사례가 중학교 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항목을 삭제하기로 한 결정이다.

국내적으로 아베 정권은 2013년 '특정비밀보호법' 제정을 통해 민주적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 이 법안이 실시되면 가령, 정부가 비밀로 지정할 경우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확산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알권리는 원천봉쇄 된다. 이에 더해 아베 정권은 2015년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는 안보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군사대국화로의 길을 노골화했다. 이 모든 게 궁극적으로는 평화헌법을 폐기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이 모든 사태전개를 종합해보았을 때, 아베 정권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전향적 해결책을 먼저 제시하거나 자발적으로 사과를 표명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12·28 합의와 같은 급격한 사태 전개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다른 무엇보다 미국의 역할이다. 미국이 위안부 문제에 관련하여 한일 양국이 조속한 합의에 도달할 것을 주문한 정황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 시발점이 미 국무부 실세인 웬디 셔먼 국무부 차관의 작년 2월 27일 워싱턴DC 카네기국제연구원 세미나에서의 기조연설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셔먼 차관은 이 연설에서 "한국과 중국이 소위 '위안부' 문제를 놓고 일본과 논쟁하고 있으며 역사교과서 내용, 심지어 다양한 바다의 명칭을 놓고 이견이 표출되고 있다"며 "이해는 가지만 실망스럽다"는 식의 비외교적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이 같은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고 예외적으로 비판했다. 이 언급이 주로 한국과 중국을 겨냥했다는 게 외교가의 대체로 일치된 의견이었다.

미국의 개입과 중재로 한일 간 위안부 협상이 급물살을 탔다고 봐야겠다. 그런데 미국이 한국과 일본 간 현안에 개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일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1951년 한국전쟁 한 가운데서 일본을 전쟁기지화 하기 위해 태평양전쟁을 법적, 정치적으로 종결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서둘러 매듭지은 것이나 오랜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한일 수교협상을 1965년 마무리 짓게 한 것도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던 미국의 국가적 이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12·28 합의가 미일 간의 이해관계에 맞춰 진행된 것으로 결국 일본으로 하여금 한반도 내 영향력 확대와 군사진출의 길을 터주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미국의 대외정책은 물론, 동북아 국제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단견이다. 한일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동북아 국제정치에 주요 현안임에 틀림없으나 역사적으로 다양한 층위와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전반적 외교과정의 일부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12·28 합의의 내용만 놓고 본다면, 미국의 중재와 조속한 타결 요구로 한일 간 이해의 균형을 꾀한 흔적이 역력하다. 미국은 일본에 2007년 미 하원 결의안이 정한 내용을 반영하여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총리가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일본군이 관여된 이상 법적 책임을 인정하여 피해자들에게 배상의 형식을 취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한일청구권 협정을 들어 법적 책임을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배상의 형식이 아닌 정부가 기금을 예산에서 지출하는 형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국가의 책임을 띠게 하는 것 이상으로는 합의할 수 없다고 답했을 것이다. 이후 미국 측 가이드라인에 대한 수정이 이루어졌고, 미국과 일본이 정한 초안을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이 수십 차례의 협의를 거쳐 나온 게 바로 12·28 합의다.

한국정부는 당연히 12·28 합의안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전의 '고노 안'이나 '사사에 안'보다 진전된 것으로 여겨졌기에 수용하려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이 합의 이후로는 더 이상 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외교적 분쟁의 자제를 권고했고, 이를 아베 총리가 자기 식대로 해석하여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함"이라는 문구를 합의문에 삽입해 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합의문 하나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위안부 문제는 20년 이상 끌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간의 사정을 알면서도 이 문구를 삽입할 것을 아베 총리가 강력히 주문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이후 위안부 문제 관련 분쟁이 재발할 경우 책임소재를 한국 측에 돌리기 위한 국제적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독도 및 역사문제를 포함한 한일 간 분쟁이 전적으로 한국에 의해 도발된 것임을 자국 국민들에게 선전하기 위함이다. 결국 아베 등 일본 우익의 기본계획은 위안부 문제를 한국 민중 대 일본 민중의 대립으로 몰아감으로써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급기야 민족주의적 성향을 분출시킴으로서 재무장화를 포함한 전전(戰前) 체제로의 복귀를 시도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다.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 철거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공식합의문을 보면 소녀상 철거와 관련된 어떤 언급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번 합의가 성실히 이행되는 것을 전제가 한국정부가 소녀상 이전에 협조할 것이라는 수준에서 양해가 이루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와 언론이 12·28 합의와 소녀상 철거가 마치 사전에 맞교환(trade-off) 된 것인 양 선전하고 기정사실화 하는 것은 양국 국민들, 특히 한국 국민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선을 자극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기획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러한 참주선동에 기존 우익신문인 <산케이신문>에 더해 리버럴 내지 자유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언론으로 잘 알려진 <아사히신문>이 적극 가담하고 나선 정황 역시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것은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에 관한 한, 일본 내에서 보수와 진보, 수구와 자유주의 세력 가릴 것 없이 일종의 국민적 컨센서스가 형성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본 보수우익의 정치적 야심이 일반 국민들 수준에서 상당히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년 10월에는 일본의 한 우익단체가 백주대낮에 하토야마 전 민주당 총리를 도쿄 내 도심 교차로 가운데서 수십 대의 차량으로 에워싸고 위협을 가하는 차량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집단자위권을 용인한 안보법안이 통과된 데 한층 고무돼있던 우익단체는 광복 70주년인 작년 8월 서울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한 하토야마 전 총리의 행동을 문제 삼기도 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한 나라의 총리를 역임한 사람에게 가해진 명백한 범죄사건에 여론은 물론, 일반 국민들 역시 쉬쉬하다가 두 달이 지난 12월이 돼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게 바로 질식하는 전후 일본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민주적 연대와 평화를 위하여

돌이켜보면, 위안부 문제는 2009년 전후 최초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민주당 정부 하에서 합의에 도달하는 게 그나마 가능한 최선의 시나리오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사사에 안'이 일본 민주당 정권 하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베 내각이 자발적으로는 절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2011년 일본 민주당이 제시한 '사사에 안'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국제사회의 외부 압력이 아닌 자체의 동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최대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20년 전 '종전50주년 담화'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반성하고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아시아 민중에 대해 통절한 사죄를 약속했다. 하지만 어떤 실효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정은 이제 더 나빠져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는커녕 반성의 언술조차 사라진지 오래다. 쇼와시대의 민주투사 무라야마 역시 일본정치무대에서 곁방 노인으로 취급받는다. 이러한 조건에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면, 그러한 시도는 궁극적으로 한국 민중과 일본 민중 간의 대립을 단단히 각오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위안부 문제는 일제가 식민지 시대와 침략전쟁 시기에 저지른 극악무도한 '비인도적 전쟁범죄'다. 이러한 성격규정은 미 하원 결의안은 물론, 유엔인권이사회의 결의, 그리고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주 고등학교 교과서에 '성노예'로서의 위안부 문제를 포함시키기로 한 결정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적으로도 보편성을 획득했다. 이를 방증하듯, 소녀상 역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건립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일본만 예외라는 것이다. 일본 시민들 대부분은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도 합법적이었다고 생각하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길 꺼려한다. 더 심각한 사실은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역사왜곡에 그대로 노출되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 우익의 주장을 여과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이 한일 간 미래를 어둡게 하고, 이후 한층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내셔널리즘이 사태를 지배하는 한, '정의'는 국경을 넘지 못한다. 또한 국가 간 갈등에 있어서는 한 나라의 사법부와 같은 판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족 간 대립의 최종 해결책은 말이 아니라 전쟁이었음을 역사는 잘 가르쳐준다. 사정이 이러할 때,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한국과 일본에서 민주주의의 확산과 한일 민중 간의 민주적 연대에 기대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 길이 비록 멀고 험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려면 우선 이번 12·28 합의에 대해 굴욕적 협상이라고 무조건 반대하기보다는 공론장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토론함으로써 다중의 지혜와 중의를 모아내는 게 중요하다. 이에 더해서 가급적 일본시민들의 동의를 구하고 그들의 지지를 모아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가령, 12·28 합의에 대한 한일 시민공동의, 가칭 '한일 만민공동회'와 같은 대토론회를 조직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으로 여겨진다.

평화를 세우고 싶다면 민주주의를 택하라. '방법'으로서의 민족주의냐, '방법'으로서의 민주주의냐?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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