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새 책이 나왔다. 그의 이름만으로도 이 책을 덥석 집어 들 독자가 꽤 되리라 생각된다.
<장정일의 악서총람>(장정일 지음, 책세상 펴냄)은 장정일이 읽은 음악책 혹은 음악을 모티프로 한 책 174권의 이야기를 116편의 독서 일기 형태로 담은 책이다. 그야말로 방대한 도서 목록이 '우르르' 쏟아진다.
다루는 음악 장르를 가리지 않아 즐겁고, 다독가 장정일이기에 가능한 재치 있는 그의 해석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먼저 이 책이 다루는 장르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한계란 없다. 영미권 팝을 다룬 책을 당연히 포함했고, 그보다 많은 양의 서양 고전음악 관련 책과 재즈 책도 소개한다. 국악, 모던 포크, 케이-팝 관련 서적을 이야기하는 한편 중국의 옛 사상가, 서양 대문호의 이야기에서 음악적 영감을 캐내기도 한다. 대중문화론 전반을 다룬 책 중 음악을 다룬 부분을 빼내 소개하고, 악기·레코딩 등 음악 산업계의 한 축을 이루는 부분을 설명한 책도 충실히 소개한다.
이 책은 그야말로 우리에게 여러 방면으로 알려진 '다독가 장정일' '재즈 애호가 장정일'의 진면목을 직접적으로 증언한다. 작업실을 꾸민 음향 장비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독자는 그가 대책 없는 오디오파일(Audiophile)임도 기어이 알게 된다.
(사실 나도 취미 겸 외부 일로 인해 음반을 충실히 사 모으고 있지만, 정말 기기에는 문외한인 탓에, 장정일이 온갖 전문 용어와 고유 브랜드명을 동원해 자신의 작업실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는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장정일의 해석은 책 전반에 걸쳐 빛난다. "신디 로퍼에게"로 시작하는 이 책의 첫머리와 어울리게, 장정일은 책 후반부에 지난 2014년 나온 신디 로퍼의 자서전 <신디 로퍼>(신디 로퍼·잰시 던 지음, 김재성 옮김, 뮤진트리 펴냄)를 소개하는데, 이 대목에서 그는 동성애자를 옹호한 신디 로퍼를 추켜세우며 우리나라 성 소수자 집단이 (신디 로퍼 대신) 마돈나를 좋아하는 아이콘으로 꼽은 점을 두고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는다.
<오디오의 유산>(김영섭 지음, 한길사 펴냄)을 소개하는 대목은 음반 사 모으기, 오디오 꾸미기 등 그야말로 고약한 중증 질환(?)을 앓는 이는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주체할 수 없는 취미 생활(자동차 튜닝가, 피규어 수집가, 카메라 수집가 등이 당장 떠오르는 질환자 목록이다)로 행복한 고역(?)을 견뎌야 하는 이 땅의 모든 이를 위한 변명서이자 위로문이다. 이 대목 덕분에 이들 '덕후'는 "공공연한 이중생활"을 즐김으로써 현실을 극복해낼 "마술적 능력"을 지니게 되었고, 그 덕분에 "정신 분열"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야말로 끝내주는 수집의 이유를 얻게 되었다.
'순자와 묵자의 음악관'을 비롯해 동양 철학가의 음악관을 다룬 여러 대목에서도 장정일의 혜안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고, 여러 차례에 걸쳐 소개되는 고전음악, 재즈 관련 책 이야기에서는 그의 전문가적 음악 지식에 놀라게 된다. 아울러 음악 이야기와 곁들여 전해지는 역사, 철학 이야기를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덤이다. 나치의 괴벨스가 음악을 어떤 식으로 대중 통치에 이용했는지, 플라톤의 음악관이 어떻게 그의 전체주의적 사고 관과 통하는지 등을 간략하게 짚어볼 수 있다. 서태지의 문화 현상을 이야기하는 한편, 걸 그룹으로 대변되는 케이-팝의 현주소와 시대 전복적 의의를 설명하는 대목에 이르면 속이 시원해진다. 따라서 <장정일의 악서총람>은, 좋은 책이라면 늘상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읽는 이가 더 넓은 지식의 세계로 나가게 해 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책의 후기에 장정일은 "이번 책에서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악서총람>류의 책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기대되는 몇몇 책에 대한 언급이 빠진 것"이라고 했지만, 기실 여기에 등장하는 책의 목록만 해도 멋지다 말하기 손색없다. 아울러 이 후기는 언젠가 이 책의 후속편이 나오리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서이기도 하다.
다만 굳이 음악 팬 입장에서 아쉬운 점을 꼽자면 전자음악을 다룬 책이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전자음악이 하나의 장르 음악으로서 온전히 대접받지 못한다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지난해 음악평론가 이대화의 수작 <백 투 더 하우스(Back to the House)>(엠스퀘어코리아 펴냄) 정도의 책이 나오기 전까지, 전자음악을 비평의 주류에 놓고 온전히 해석한 책은 좀처럼 한글로 만나기 쉽잖았다. 아마 지금 장정일은 이 책을 비롯해 몇몇 전자음악 관련 책을 구매해두고 읽기 시작했으리라 확신한다.
전자음악을 비롯해 힙합, 인디 팝 등 최근 대중음악 조류는 아무래도 <장정일의 악서총람>에 소개되지 않는데, 그 이유에는 앞서 말한 관련 저작물의 부재와 더불어 장정일의 취향도 포함된다. 장정일은 이 책에서 스스로 30대 이후 록에서 재즈, 서양 고전음악으로 관심사를 옮겼다고 증언해뒀다. 저자의 취향이 이처럼 분명히 드러나니 오히려 반갑다. 특히나 이런 장르 서적물에서 저자의 취향은 중요한데, 그래야 쓴 이의 태도와 관심사를 고려하면서 책을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실, 재즈와 서양 고전음악 평론은 이들 음악의 역사적 지위 때문에 지금도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점을 염두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더 많은 서적이 출간된다는 얘기다.
장담하건대,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구매 희망 도서 목록을 채우게 될 것이다. 아울러 책에 간접적으로 소개되는 음반 몇 장을 구매하려고 시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 경우에는 두 가지가 모두 해당하는데, 예전부터 사고자 벼르기만 하고 구매리스트의 뒤켠에 미뤄뒀던 존 콜트레인의 명반 <어 러브 슈프림(A Love Supreme)>의 2002년판 딜럭스 버전을 결국 다른 음반을 사는 김에 함께 질러버렸다. 사놓고 쌓아두기만 했던 책들, 조금 읽다 만 책들도 다시 손에 잡게 될 것 같다. 나아가 몇몇 책을 벌써 구매 목록에 포함해뒀으니, 참으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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