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매주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정책 현안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해 온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이슈페이퍼의 올해 마지막 호를 보내 드립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번 주 이슈페이퍼 제110호는 소설의 형식을 빌어 2015년 한국사회의 모습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흔들리고 휘청거리는 헬조선의 오늘을 젊은 작가 이소망이 청년의 시각으로 풀어봅니다.
말하자면 이곳은 잘려나간 시간들이 뒤엉켜 교미하는 곳, 조각난 기억들이 난잡하게 접붙여져 변종의 세월을 잉태하는 곳, 앞뒤가 사라진 순간의 삶만이 최선을 다해 반복되는 곳, 화자(話者)의 정령이 밤새도록 굿판을 벌이는,
메모리 실버 케어 센터.
여기는 지옥이고 너는 최악이야. 휴대폰 액정 조도를 최대한 낮추고 이불을 뒤집어 쓴 다음에야 겨우겨우 쓴 한 줄, 곁에서 모로 누워 자고 있는 김 선생이 깰까 조심조심 보낸 메시지에 홍은 두 시간이 넘도록 답이 없다. 예민한 성격에 잠귀가 밝던 홍은 용접을 시작하면서부터 한번 곯아떨어지면 앞에서 굿을 해도 모를 정도로 잠에 빠졌다. 그런 그에게 메시지 알람 소리쯤이야, 모기 날갯짓만도 못할 걸 알지만 어디다 퍼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그랬다.
한 달이 지났는데도 잠자리가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가운데가 움푹 꺼진 베개에 뒤통수를 이리저리 맞추며 어둠 속에 홀로 있을 작은 교목을 생각했다. 이것의 다른 이름이 머니트리(money tree)라는 것에 반해 홍이 직접 사들고 온 것이었다. 빛 한 톨이 들지 않는 반 지하 원룸에서도 교목은 곧잘 자랐다. 홍은 교목의 상태에 따라 우리의 앞날을 예감하곤 했는데, 그것이 대체로 잘 자라주는 탓에 홍이 예상하는 우리의 미래는 늘 긍정적이었다. 그의 엉터리 주술에 비난을 퍼붓던 내가 새삼 감응하게 될 줄이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누워있는 곳은 다시 한 번 지옥이 확실하다.
요새 나와 홍은 살고 있는 원룸에 다녀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외박이 잦다. 좁고 습한 방에서 살 맞대고 살 때는 누구 하나라도 며칠씩 나가 있어줘야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이 가능하겠다 싶었는데, 두 사람의 동시다발적인 출타는 다소 극단적인 변화였다. 반 지하를 떠난 홍은 경기도 모처에 머물며 용접을 배우고 있고 나는 치매 노인들을 돌보는 작은 요양원에서 퐁당근무를 하는 중이라 그렇다.
젊으시니까 퐁당당보다 퐁당으로 하시면 좋겠네요. 원장의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 받아야 했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하겠는 건 둘째 치고 돌을 던지자는 때 아닌 동요가 자꾸 생각나 곤란했다.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머릿속에서 돌이나 던지고 있는 나를 원장이 불러세웠다. 24시간 일하고 이틀 쉬는 근무가 퐁당당이고 하루 쉬는 근무가 퐁당이란다. 원장은 나를 퐁당근무하는 요양보호사로 채용했다. 지금 일하는 50대의 요양보호사들보다 아무래도 체력이 더 좋을 것 아니냐는 것인데, 원장이란 사람은 책상물림으로 경영만 할 줄 알았지 실무는 쥐뿔도 모르는 작자가 분명했다. 요양보호사가 갖춰야 할 제일의 조건은 강한 체력이 아니라 강한 비위이며 필요한 것은 젊은이의 신선함 보다는 반세기 동안 수련한 참을성임을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젊은 처자가 똥 치우러 왔대? 나이는? 결혼은? 집은 어디? 자기도 퐁당당으로 들어왔어? 선임 요양보호사들로 추정되는 아주머니들의 심문이 끝나자마자 내게 주어진 임무는 침대시트 갈기였다. 비교적 신체건강이 온전하신 어른들의 침대는 마른각질이 버석거릴 뿐 깨끗한 편이었다. 중증의 치매로 기저귀를 착용하거나 소변 줄을 달고 계신 분들의 침대가 고역이었다. 깨끗한 시트로 갈아놔도 쿠린 냄새가 풍긴다면 침대 밑을 보라. 그곳에 그것들이 떨어져 계신다. 더욱 곤란한 건, 그것들을 치우면 불같이 화를 내는 어른도 있다는 사실.
언니야.
날 부르는 소리였다. 입고 있는 빤스 색깔까지 물어볼 기세였던 선임들이 어째서 이름을 묻지 않았을까. 백 번 말해도 까먹는 단다. 여기 계신 어르신들과 당신들의 차이는 사실 한 끗이라며 깔깔 웃는다. 그러고 보니 선임들은 어른들의 성함도 제대로 부르지 않고 있었다. 내가 왕년에를 입에 달고 산다는 왕년 어르신, 눈 깜짝할 새에 요양원의 살림을 다 꺼내 놓는다는 주부 어르신, 눈만 마주치면 만원만 달라 조른다는 만원 어르신, 하루 종일 아들만 찾는다는 아들 어르신. 이런 식이다.
퐁당아 영어 공부는 하고 있어?
하루치 퐁을 마치고 퇴근을 서두르고 있을 때 아침을 먹고 있다는 홍이 대뜸 물어왔다. 너는 최악이야, 에 대한 대답 치고 다정했다. 퐁당근무가 어쩐지 귀엽다고 애칭을 저딴 식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영 맘에 안 들지만 지난 밤 악의에 대한 미안함으로 참아 넘기기로 했다. 일한답시고 기본을 놓치면 안 된다고. 홍이 당부에 가까운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한때는 둘이 영어공부에만 달라붙어 있던 적도 있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물론 서로에 대한 에너지까지 아껴가며 매달렸는데 겨우 얻어낸 것이 남들 하는 정도에서 약간 모자란 수준이었다. 그것으론 안 되겠다며 홍이 시작한 것이 용접이었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홍의 용접기술에만 의존하기에는 여전히 불안한 나날이었다. 아무래도 그것으로도 안 될 것 같아 내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급히 따고 일을 시작했다. 다른 업종보다 수요가 많아 안전한 편이라고 했다.
안전한 삶이라는 뭘까? 언젠가 내가 홍에게 물었다. 온전한 삶? 홍이 되물었다. 아니, 안전한 삶, 그런데 이 두 개가 같은 건가? 다르지. 홍이 답했다. 어떻게? 온전한 것을 불온하게 보면 생각나는 게 안전이거든. 그걸 어떻게 알아? 상구 형을 보면 알아.
상구 형은 태어나기를 손가락 하나가 짧게 태어났다. 상구 형보다 훨씬 늦게 일을 배우기 시작한 홍이 간단한 땜질을 하게 됐을 때도 형은 비지땀을 흘리며 용접자재를 날랐다. 용접공들은 상구 형에게 그 이상의 일을 주지 않았다. 상구야 그건 위험하다. 상구야 그거 조심해라. 상구야 그거 하지마라. 상구 형을 향한 걱정을 삼십 번 쯤 들었을 때 하루 일과가 끝난다고 했다. 그런데, 그거 알어? 뭐를? 상구 형 용접 진짜 잘해. 네가 봤어? 아니. 그런데 어떻게 알아? 내 손가락 하나 날릴뻔 한 거 상구 형이 잡아줬거든. 베테랑들만 알만한 각도를 그 형이 다 보고 있던 거야. 홍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보며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온전은 용접하는 상구 형 손가락이고, 안전은 자재를 나르는 상구 형 손가락이지. 그렇다면 홍, 완전한 것도 있어? 내가 물었을 때 홍이 감은 눈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용접해서 돈 버는 상구 형 손가락. 완전함.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목욕날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단 한 번의 목욕케어로 동료보다 훨씬 젊다는 자신감과 그래도 대학을 나왔다는 자부심, 왼쪽 방부터 치우라는 걸 오른쪽 방부터 치우며 세우고 있던 자존심 따위를 일시에 내려놓게 됐다. 이 일을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째 하고 있는 선임들의 뼈마디가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인간의 몸만큼 인간의 손길이 필요한 곳도 없다. 제 몸 가꾸기를 잊어버린 어르신들은 반나절만 방치해도 형색이 형편없어졌다. 제 손이 아닌 다른 손을 타야 하는 몸은 몇 배의 에너지를 더 필요로 했다.
언니야는 어르신 등 쪽을 깨끗하게 밀어줘. 나와 짝꿍이라고 할 수 있는 요양 보호사 김 선생이 왕년 어르신의 샅을 능숙하게 닦아내며 말했다. 나는 앙상하게 튀어 오른 어른의 척추 뼈를 따라 손에 쥔 때수건을 조심조심 문질렀다. 아이 썅 아파 이년아! 누구 거죽 벗길 일 있어? 너 내가 누군 지 알어? 왕년에 각하랑 대작하던 사람이야! 이 조카튼 것이. 왕년 어르신의 갑작스런 욕설에 놀란 건 나뿐이었다.
창밖으로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구름이 무겁게 내려와 있었다. 날궂이가 시작된 것이다. 점잖았던 분이 욕 하거나 쾌활하던 양반이 하루 종일 잠에 취해 계신 것은 평범한 정도다. 아들 찾는 어르신을 한쪽에서 달래면 다른 한쪽에서 잘 정리해둔 옷 무더기가 아무렇게나 쏟아졌다. 소변 줄을 찬 어른이 밤새 호출벨을 누르는 통에 아껴 자던 토막잠은 산산이 조각났고, 열 번 달려가면 열 번 모두 소변 호스가 빠져 있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열한 번 째 소변 줄을 끼웠다. 호스를 타고 어른의 노란 오줌이 쪼로록 흘렀다.
그때 나도 괴로워서 눈물이 다 나더라고. 그 오줌 호스 따라 눈물을 다 흘렸어.
모처럼 홍과 함께 누운 밤이었다. 오랜만에 같이 누운 반 지하 원룸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 내가 눈물을 흘렸다니까. 나는 홍에게서 듣고 싶은 대답이 나올 때까지 그를 채근할 작정이었다. 내가 울었다고요. 이쯤이면 화를 내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홍이 입을 뗐다. 어,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 자연이랑 가까운 동물이지 않아? 날씨 따라 행동이 막 변한다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놀랄 것도 없어. 되게 자연스러운 일이야. 아니, 홍아, 그러니까 내가 너무 괴로워, 치매 어르신들이 시도 때도 없이 종잡을 수 없는 말도 걸고. 이를테면? 이를테면, 여긴 기억이 어디서 끊기고 어디로 이어졌는지에 따라 각자 보고 있는 시계가 다 달라. 어떤 할머니는 지금 70년대에 사시고 어떤 할아버지는 90년대에 사시는 거지. 근데 이 두 분이 자주 대화를 해. 주제는 날마다 다른데 어제의 경우는 디제이가 대통령이 된다, 안 된다. 오, 그거 흥미롭다. 퍽이나, 어쨌든 두 분 사이에 30년이란 시간차가 있는데 말이 잘 통할 리가 있나. 그러니까 막 싸우신다고. 그러다 지나가던 나를 붙잡고 물어. 디제이가 대통령이 됐느냐고? 응. 그래서 난 어쩌겠어. 네, 됐었습니다. 했지. 그랬더니 60년대에 사시는 할머니가 뭣도 모르는 게 편든다고 난리를 쳐. 결론적으로 네가 편들어 준 할아버지는? 손에 용돈을 쥐어 줬지. 얼마? 오백 원. 푸하 오백 원이 뭐야. 오백 원을 주신대서 받아보면 오만 원이 손에 들려있게 되는, 그런 곳이야 거기는.
홍은 킬킬대며 웃을 뿐 끝내 그만두라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내 투정도 거기까지였다. 경력자가 되어야 함을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철근에서 튄 불꽃이 살갗을 지져대는 줄도 모르고 기술을 익히고 있을 홍을 생각하자니 지옥 한 가운데 있더라도 버텨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이 한 나라에 발붙이고 살기위한 준비운동이란 사실이 기막혔지만, 적어도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시작이었다. 홍은 요즘 철공소의 젊은 피가 되어 맹활약 중이라고 했다. 조금만 더 배우면 일거리도 물어 올 수 있겠다는데, 일이 들어오면 저보다는 상구 형을 밀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건, 있을 게 없는 채로도 자연스럽고 쓸모 있는 인생이야. 어떤 형태로 있어도 불안하지 않는 거. 상구 형마저 그럴 수 없게 된다면 내 선택에 확신은 하게 되겠지만 정말 슬플 것 같아. 홍이 머리맡에 있는 교목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는 그가 또 이파리를 만지작대며 소원을 비는 머저리 짓을 한다는 걸 눈치 챘지만 눈감아 주었다.
홍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한 게 인생에서 해본 가장 큰 오해라고 했다. 집 안에 화장실은 있었지만 욕조는 없었고, 홍을 포함한 네 식구가 모두 일했고, 작은 홍보대행사에 계약직 직원으로 있는 누나의 건강보험에 나머지 식구가 피부양자로 올라가 있었다. 순수한 학구열로 도서관에서 밤을 새는 바보는 없다는 걸 홍은 잘 알고 있었고, 학자금 대출 상환의 압박은 긴장을 유지할 만한 생활 스트레스라고 여겨왔었다.
그런데. 그건 엄청난 착각이었어. 나는 살면서 계속 베타버전 게임만 하고 있던 거야. 본 게임은 제대로 시작도 못해봤어. 내가 베타버전으로 익힌 룰이 본 게임에선 다르게 적응되더라. 심지어 갖고 있는 아이템도, 살 수 있는 아이템도 없어. 그런 몸으로 왕좌에 도전한다? 세상에 가여워라. 그런 리그는 깔끔하게 털고 나오는 게 나아.
용접은 홍이 지금 살고 있는 리그를 정리하고 다른 리그로 옮겨 갈 열쇠 같은 거였다. 새로운 리그에서 요양보호사 일이 유망하다는 것도 홍이 들고 온 정보였다. 나는 홍이 내 열쇠까지 챙겨오고 나서야 그가 얼마나 간절한지를 알았다. 나 역시 계속 되는 취업실패로 지금 살고 있는 리그에 그나마 있던 미련을 갉아 먹는 중이었다. 이곳을 뜨겠다는 결심을 갖기까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준비가 되면 언제든 가자고, 우리는 어두운 방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약속했다.
홍이 떠났다. 나는 남아 메모리 실버 케어 센터에 다니고 있다. 그 사이 일이 익숙해졌기도 했거니와 당장 그만두고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없었다. 나는 그저 퐁당퐁당하고 살았다. 사소한 다툼이었다. 손길을 뜸하게 주던 교목의 잎이 한꺼번에 떨어져 버렸고 그것이 예지하는 청록의 앞날에 더 이상 흥분할 수 없었던 홍이 괜한 짜증을 부렸다. 이후 우리는 샤워횟수와 식성까지 지적하며 서로를 물어뜯었다. 자꾸만 어긋나는 시간과 생활의 고단함으로 서로에게 적당히 무관심해 질 때 홍의 입국비자가 나왔다. 최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장기체류가 허가 되었고 현지에서 경력을 쌓으면 최종심사에서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나보다도 홍에게 철공소 일부를 맡겨 보려던 사장이 크게 아쉬워했다. 전복죽 쒀서 개주게 생겼네. 그를 신뢰했던 사람들이 보내준 투박한 진심이었다. 마지막으로 홍은 상구 형을 용접공으로 기어이 밀어 넣고 철공소 일을 정리했다.
우리는 정식으로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시 만날 기약을 하지도 않은 채 열일곱 시간의 시차를 두고 살았다. 나는 열일곱이라는 시간이 아득해질 때마다 요양원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부러 뛰어 들었다. 이 땅에 쓰인 모든 역사를 되짚으며 하루에도 수 없이 펼쳐지는 다양한 층위의 시간들. 나는 어르신들이 뒤죽박죽 쏟아내는 시간들을 순서대로 나열해보다 문득 저 지난한 시간들이 여태 모여 만든 게 겨우 오늘이구나 싶었다. 기억을 뭉텅이로 잃은 사람들이 온돌방에 앉아 민화투를 치는 오늘, 그들이 찬 똥 기저귀를 확인하는 오늘, 잘려나간 사람들이 뒤엉켜 구르는 오늘, 조각난 돈이 빚을 잉태하는 오늘, 앞뒤가 사라진 순간의 사실이 모든 진실이 되는 오늘, 화자(話者)의 정령이 구슬피 울어도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오늘,
기막힌 삶을 견디고 견뎌도 기막힌 것만 남아 있는 오늘, 홍을 떠나게 만든 오늘, 오늘이 결국 홍을 잃어버리게 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날궂이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는 세계가 넓은 사람을, 상구 형의 온전함을 알아봐 주던 눈이 고운 사람을, 소박한 삶이 완전함의 가치로 알고 있던 사람을 끝내 떠나게 한 것이 서럽고 분해서 울었다. 아무래도 그것을 홍의 개인적인 선택이었다고 하기 에는 내 딴에서 억울한 구석이 많았다.
각시야 우지마라 딱하다. 서방한테 시앗이 들었어? 내가 고년 아주 요절을 낼라. 요양원 구석에서 울고 있던 나를 끌어낸 건 주부 어르신이었다. 각시 울린 시앗년을 쳐 죽이겠다고 신발을 꿰고 있는 걸 간신히 말렸다. 어르신이 요절 낼 수 있는 시앗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눈물범벅을 하고 묻는 내게 주부 어른신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팥죽 물 올려 논다는 게 여기서 이러고 있네.
해가 바뀌기 전에 홍과 살던 집을 처분하기로 했다. 내가 보증금을 내는 대신 그가 월세를 더 내고 같이 살던 집이라 세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곰팡이가 선 웬만한 살림살이는 다 내다버렸다. 옷가지와 그릇 몇 개, 노트북, 그리고 작은 교목이 단출하게 남았다. 홍이 떠날 무렵 가지만 앙상하던 교목은 역시 그 무렵에 다시 잎을 내기 시작했다. 가지 끝에서 번져가는 잎사귀들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홍은 이 작은 교목이 실은 그늘에서 잘 자라는 음지식물이었던 사실도 모르고 떠났다. 나는 그가 앞에 것은 한번쯤 보러 와주었으면 하고 뒤에 것은 끝까지 몰랐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 자리 잡은 그 땅에서 이 교목의 민낯을 만날 지도 모른다.
그의 손에서 나던 쇳가루 냄새가 무척 그리운 밤이다. 나는 잎사귀에 코를 갖다 대고 있다가 내가 쥐고 있는 열쇠가 떠올랐다. 비릿한 홍의 냄새는 사라졌지만 그가 묻어 둔 주술적 기운이 숨을 타고 들어왔다. 팥죽을 먹지 않은 동짓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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