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 리스크, '이슬람 분리주의'는 진짜가 아니다!

[유라시아 견문] 우루무치 : 중국화와 세계화

제국의 순환

신장은 크다. 중국의 6분의 1이다. 한국의 17배, 한반도의 8배이다. 유럽의 절반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합친 것보다 넓다.

신장은 멀다. 중국의 최서북단이다. 비행기를 타도 베이징에서 4시간, 상하이에서는 5시간이다. 시안에서 버스를 타면 우루무치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다.

신장은 걸다. 산맥과 사막으로 험하다. 북에는 천산이 남에는 히말라야가 우뚝하고, 사이로는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설산과 모래밭의 공존은 대기의 운동에도 영향을 준다. 눈보라와 모래바람이 동시에 일고, 더위와 추위가 하루에도 수차례 변덕을 부린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은 드물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머무는 사람보다 많았다. 드문드문 눈이 녹아 물이 고이는 곳에 풀과 나무가 자랐고, 옹기종기 오아시스가 생겨났을 뿐이다.

신장은 낯설다. 중국의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Wild Wild West)', 왕년에는 서역이라 불렀다. 西域(서역)을 新疆(신장)이라 고쳐 부른 것이 18세기이다. 이곳을 정복하고 대청제국에 편입시킨 건륭제가 '새로운 강역'이라는 뜻에서 새 이름을 붙인 것이다. 즉, 신장은 200년이 조금 넘은 최신 용어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중국의 시각이다. 서역도 신장도 중원의 관점이다. 유라시아의 지도를 활짝 펼치면 신장은 변방이 아니라 중심, 한복판에 자리한다. 문명의 물결 또한 주로 서쪽에서 밀려왔다. 2000년, 이란계와 투르크계가 유목 문명을 꾸렸고, 1000년, 이슬람의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서쪽에서는 이란-이슬람 문명이, 남쪽에서는 인도-티베트 문명이, 북쪽에서는 유목민들의 정치 군사적 압력이 신장의 역사를 주조한 것이다. 반해 동쪽의 중국은 간헐적이었다. 이 유라시아의 동서길항을 역전시킨 왕조가 바로 대청제국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크고 멀며, 험하고 설었다. 신장에 '성(省)'을 설치하고 중국식 제도의 도입을 시도한 것이 19세기 말이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동남부에서는 서구 열강과 일본이, 서북부는 러시아제국이 굴기했다. 조공국(자치국)과 번부(자치구)를 '독립국'으로 분리시켜 식민지로 삼으려 했다. 조공국도 번부도 대청제국의 판도라며 근대적인 어법과 법률로 항변해야 했다. 그러나 때가 늦었다. 1911년 대청제국이 붕괴함으로써 신장은 다시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난다.

대청제국을 벗어나자 오스만제국을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다. 혈통이 비슷하고 종교가 일치하는 투르크계 이슬람 제국이 유라시아의 서쪽에 자리했다. 우루무치에서 이스탄불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슬람적 근대화'에 필요한 교사와 관료들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에 빼어난 신청년들을 이스탄불에 유학 보내는 '서유' 운동도 일어났다. 1910년대 신장의 학생들은 오스만제국의 교과서로 공부하고, 오스만제국의 행진곡을 불렀으며, 오스만제국의 의상을 모방한 교복을 입었다. 오스만제국의 술탄을 최고 지도자라고 배웠다.

그러나 오스만제국도 곧 대청제국의 운명을 따른다. 서구형 민족주의가 주입됨으로써 오스만제국 또한 산산이 찢겨나갔다. 동유럽, 중동, 북아프리카에서 수십 개의 독립 국가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이다. 제국의 폐허에서 새로 일어난 터키공화국은 난징의 중화민국만큼이나 힘이 모자랐다. 신장은 난징도 이스탄불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무주공산이 된 것이다.

이 동/서의 힘의 공백을 메우고 등장한 세력이 북방의 소련이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만제국은 몰락했지만 소비에트연방은 굴기했다. 볼셰비키 혁명을 공산주의 국가의 등장이라고만 이해하는 것도 좌편향이다. 20세기형 유라시아 제국이 (재)부상한 것이다. 오스만제국, 합스부르크제국, 이란제국, 대청제국의 파편을 끌어 모았다. 즉, 스탈린 서기장은 서방의 술탄과 북방의 칸과 동방의 황제를 겸직한 꼴이었다.

'사회주의 국제주의'라는 제국의 이데올로기도 설파했다. 신장 역시 소련의 자장으로 끌려들어 갔다. 상인과 난민과 노동자들이 소련과 교통했다. 물류와 인류(人流)는 문류(文流)도 수반하기 마련이다. 소련의 지적 사조 또한 신장에 퍼지기 시작했다. 1920년대 신장은 나날이 적화(赤化)되었다.

1930년대 신장은 소련의 위성국, 동투르키스탄에 가까웠다. 지도자 성스차이(盛世才)부터가 소련이 간택한 인물이다. 그는 요녕성, 동북 출신이다.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면서 고향에서 쫓겨났다. 소련은 만주의 조선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고, 항일 의용군들은 서북으로 이동시켰다. 그들을 서북에 포진시킴으로써 몽골과 신장으로 침투하는 일본의 유라시아 진출을 봉쇄하려 든 것이다.

'위구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유포한 인물도 성스차이이다. 중화민국은 '5족공화'를 표방했다. 한족, 만주족, 몽골족, 장(티베트)족, 회족이 중화민국을 이룬다고 했다. 만주국 역시 '5족협화'에 그쳤다. 반면 성스차이는 스탈린식 민족 범주를 도입한다. 신장의 구성원은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카자흐, 타타르 등 14개 소수 민족으로 분류되었다.

스탈린주의도 만개했다. 신장판 공포 정치와 대숙청이 감행되었다. '인민의 적', '제국주의 스파이', '민족주의자' 등의 이름으로 10만여 명이 처형되었다. 즉, 신장의 성스차이는 몽골의 초이발산에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두 사람을 무척 아꼈다. 신형 유라시아 제국의 충직한 제후들이었다.

신장의 형세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37년이다. 국민당 정부가 내륙 깊숙한 충칭으로 천도한다. 동부를 일본에 내어준 중화민국으로서는 서부를 총동원해야했다. 신장 또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중화민국의 기구가 처음 신장에 설치된 것이 1943년이다. 소련은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중화민국을 배려하는 포즈를 취했다. 중화민국을 지원하는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여 신장에서의 위성국 만들기를 거두어들인 것이다. 마지못한 것이었다.

신장을 완전히 복속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1950년 인민해방군이 진입하고, 1955년 자치구로 만든다. 그러나 좌경적 오류는 반복되었다. 중원에서 통했던 토지 개혁이 서역에서는 화근이었다. 신장 주민들은 농민이 아니라 유목민이다. 토지 소유란 부질없고 무망한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에 천명을 하사했던 소농 경제형 '프티 부르주아 사회주의(인민주의)'가 초원에서는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는 땅보다는 말과 낙타, 양과 당나귀가 소중했다. 대약진 운동 역시 실패했다. 가축을 공유하자는 집단 농장화 시도에 유목민들은 동물들을 잡아먹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공산주의자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반동'적 작태였다.

좌경적 오류의 절정은 문화 대혁명이다. 중원의 홍위병들이 궐기했다. 내지의 계급 투쟁은 변경의 민족 탄압으로 변질되었다. 신장 지식인들은 소련의 주구라고 타박하고, 종교인들은 봉건의 잔재라고 질타했다. 수많은 모스크가 폐쇄되고 파괴되었다. 1949년 5만 개가 넘었던 모스크가 문혁을 거치며 1만 개 이하로 줄었다.

알라를 모시던 경건한 모스크가 마오를 섬기는 학교가 되었다. 교재 또한 코란이 아니라 붉은 표지의 마오 어록이었다. 심지어 일부 모스크는 돼지우리로 사용되었다. 돼지고기를 금기로 삼는 무슬림들로서는 더없는 치욕이었을 것이다. 근대의 우매가 전근대를 향해 가하는 테러의 결정판이었다. 모스크를 후원하고 이슬람 성직자들을 존중하고 마드라사(이슬람학교) 졸업생들을 관료로 채용했던 대청제국과는 도저히 견줄 수 없는 혁명파의 만용이었다.

유라시아적 지평에서 살피면 유럽의 좌/우 도식은 피상이고 허울이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다툰 동/서유럽보다 훨씬 넓은 강역에서 자유주의/공산주의라는 세속적 이데올로기에 이슬람주의가 길항했다. 좌/우보다는 고/금 간의 항쟁이 훨씬 치열했던 것이다. 그 동력이 이란 혁명을 촉발시켰고, 소비에트연방을 해체시켰고, 유고슬라비아공화국을 무너뜨렸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승리한 것이 아니다. 이성과 계몽의 독재에 영성과 신성이 도전한 것이다. 20세기 말에는 소련과 동유럽을 와해시키고, 21세기 초에는 미국과 서유럽에 충격을 가하고 있다. 사회주의/자유주의를 막론하고 근대의 세속 문명을 내파해 간다. 좌파의 무신론은 물론이요 우파의 물신주의까지 배격하는 이슬람의 재부상은 긍/부정을 아울러 21세기를 추동하는 주요 동력이다.

▲ 우르무치 설산. ⓒ이병한

서부 대개발

헌데 이례적으로 신장만은 '위구리스탄'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이웃 나라들과 운명을 달리했던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노선이 변경된 탓이다. 역시 1979년이 분기점이다. 이란에서는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바로 그해에 중국에서는 개혁 개방이 발진한다.

개혁 개방 또한 좌/우의 시각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사회주의를 거두고 자본주의로 투항한 것이 아니다. 혁명 국가임을 거두고 제국성을 회복해간 것이다. 문혁 기간 삭제된 초기 헌법이 복구되었다. 소수 민족의 평등한 권리 및 정치적, 재정적 자치에 대한 내용들이 복원되었다.

신장에서는 바자르가 다시 열리고 모스크가 새로 지어졌다. 메카 순례를 포함한 이슬람 국가로의 여행 또한 자유로워졌다. 근대 국민 국가의 경직성을 떨쳐내고 고전적 제국의 톨레랑스를 재가동시킨 것이다. 자유주의적 쿨함(다문화주의)의 과시가 아니라, 大德(대덕)의 호방한 발현이었다.

덩샤오핑이 몸소 신장을 순방한 해가 1981년이다. 열흘간 신장을 주유하며 '선부론(先富論)'을 역설했다. 당장은 동남부 연안부터 발전하겠지만, 한 세대 후에는 서북 내륙에도 투자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다독였다.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 100년 대계였다.

새천년, 약속은 이행되었다. 2000년 3월, 서부 대개발이 닻을 올린다. 중국 영토의 6할,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서부에도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초창기 신장의 구호는 '一黑一白(일흑일백)'이었다. 검은 것은 석유요, 하얀 것은 면화이다. 양대 산업을 기둥 삼아 신장 경제를 다져나갔다.

영판 새 바람만은 아니다. 덩에 앞서 신장 개발을 주창한 최초의 지도자로 건륭제를 꼽을 수 있다. 신장을 복속시킨 그는 한족 이주와 토지 개간으로 새 강역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한족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관철하지 못한다. 너무 먼 곳인지라 전략적, 환경적, 문화적으로 취약하다며 황제의 의사를 기각시킨 것이다.

뒤를 이은 것은 장제스이다.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대동아 전쟁이 격화되자 '서부로 오라!(到西北来!)'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인다.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진 동남부로부터 서북으로 이주하라는 전국적 운동이었다. 교사와 공무원, 기술자를 모집했고, 동반 가족에게는 정착 보조금도 지급했다.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서북에 경제적 토대를 건설하는 한편으로, 빈곤한 변경 지대에서 공산당이 세를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양수겸장이었다. 덕분에 캘리포니아와 알래스카로의 서부 개척(Go West!)에 필적할 만한 프런티어 붐이 일어났다. 즉 서부 대개발은 대청제국,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이어지는 200년의 숙원 사업이다.

▲ 덩사오핑의 신장 방문(우르무치 역사 박물관 소장 사진). ⓒ이병한

중국화와 세계화

1991년 소련의 해체가 서부 대개발의 기폭제가 되었다. 19세기 이래 중국을 위협하던 국경 너머의 거대한 경쟁자가 사라진 것이다. 20세기형 유라시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 들어섰다. 일부는 은근하게 신장의 분리 독립도 예측했다. 소비에트연방에 이어 중화인민공화국마저 주저앉아 '역사의 종언'에 마침표를 찍기를 희구했다.

그러나 기민한 쪽은 도리어 중국이었다. 러시아가 공급해주지 못하는 소비재를 중국이 대신했다. 철강 및 석유를 비롯한 원자재도 중국이 수입했다. 신장은 이들 국가와 중국을 연결하는 가교로 부상했다. 우루무치와 알마티를 잇는 철도가 완공된 것이 1992년이다. 당시에 이미 '유라시아 대륙 철교'의 개통이라며 크게 선전했다. 즉, 유라시아를 약동시키는 엔진이 모스크바에서 베이징으로 교체된 것이다. 축의 이동이다.

오래 숨죽였던 위구르인들에게도 기회였다. 국경 자유화로 보따리 상인들의 활로가 열렸다. 적지 않은 위구르인들이 이웃 국가로 진출하거나, 중국의 동부로 이동했다. 아랍어를 읽을 수 있고, 중국어와 러시아어도 능했던 위구르인들의 세계 시민적 잠재력이 십분 발휘되었다.

금세 유라시아적 규모의 위구르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혈연과 지연의 오프라인은 물론이요, 송금 경제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비롯한 온라인 연결망도 약진했다. 이 위구르 중산층들의 취향은 민족적이면서도 중국적이고 또 세계적이다. 우루무치에는 바자르 풍 쇼핑 센터가 들어서고, 스카이라인을 다시 그려가는 고층 아파트와 마천루의 내부는 램프와 양탄자로 앤티크하게 꾸민다.

인구 또한 급격히 늘고 있다. 자연 증가가 아니라 이주 때문이다. 기회의 땅을 찾아 동부의 한족들만 진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서쪽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이란과 터키, 러시아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실제로 우루무치는 카자흐스탄에서 1시간 반, 파키스탄에서 3시간이다. 베이징과 상하이보다 테헤란과 뉴델리가 더 가깝다. 그래서 당일 출장하는 비즈니스맨들도 적지 않다. 유라시아의 한복판에 '범 이슬람 1일 생활권'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유학생들의 이동 역시 활발하다.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의 신장 유학이 갈수록 늘고 있다. 20세기 초의 '서유' 운동과 방향을 달리한 21세기의 '동유' 운동이다. 우루무치 대학의 캠퍼스는 퍽이나 특별했다. 유라시아의 4대 언어, 영어와 중국어, 러시아어와 아랍어가 공존했다. 어느덧 유라시아의 교차로, 왕년의 복합 문화 공간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 갈등을 운운하며 분리주의를 과장하는 언설들은 호들갑으로 여겨진다. 針小棒大(침소봉대)가 도를 넘는다. 신장의 현재는 지난 300년 이래 중국에 가장 통합적이기 때문이다. 위구르 중산층은 중국공산당의 든든한 우군이다. 이를 발판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대륙형 연결망의 허브가 되고 있다.

서부 대개발이 일대일로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까닭이다. 중국 내지와 신장을 잇는 고속도로와 고속철이 서아시아로, 남아시아로, 유럽으로 거미줄처럼 엮여간다. 송유관과 전신망과 정보망도 구석구석 뻗어간다. 중국의 공산품이 중앙아시아의 바자르를 채우고, 아랍어를 장착한 알리바바는 아라비아 반도까지 진출한다. '디지털 유라시아'의 탄생도 머지않았다.

고로 신장의 화두 또한 분리와 독립이 아니다. 이 '새 강역'이 '새로운 세계 체제'의 초석이 될 것이냐의 여부가 관건이다. 문명 간 공존 체제, 중화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공생과 공영이 요체이다. 본디 중국사의 역동성은 서역에서 비롯했다. 서쪽의 이슬람 문명과 남쪽의 불교 문명과 북쪽의 유목 문명이 중화 제국을 유라시아 제국으로 진화시켰다. 20세기 서구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한족 중심, 유교 중심, 농경 중심, 강남 중심의 중국상이 도드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중국이 서진을 거듭하면 할수록 胡漢(호한) 융합을 일구어냈던 과거의 찬란한 유산이 미래의 프로젝트로 회귀할 것이다. 즉, 탈냉전 이후 유라시아는 중국화와 세계화의 상호 진화로 운동한다. 중국적 세계화와 세계적 중국화가 공진화한다. 새 천년 우루무치에 '장안의 봄'이 어른거린다.

ⓒ이병한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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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不仁(천지불인)

그러나 마냥 장밋빛만은 아니다. '우루무치의 봄'이 그리 길지 않을 수 있다. 일대일로의 곳곳에 자리한 미군 기지가 걸림돌이라는 말이 아니다. 온-오프라인에서 유라시아의 四通八達(사통팔달)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 메가트렌드이다. 人力(인력)으로는 쉬이 꺾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다르다. 천지는 어질지 않다고 했다. 정확하고 객관적이다. 인과응보로 응대한다. 이미 설산이 녹아내리고 있다. 지구 온난화는 북국과 남극의 빙하만 녹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의 지붕, 천산과 히말라야의 만년(萬年)설도 녹아들고 있다. 오아시스의 신비를 제공했던 사막의 물줄기가 메말라 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레 사막의 면적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생명수는 줄어들고, 황무지는 넓어진다. 개발의 속도만큼이나 생존의 토대가 잠식되고 있는 것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직면하고 있는 진정한 위기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天地人(천지인)의 불화가 깊어지고 있다.

본디 인적이 드물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미 2500만 명을 돌파했다. 소도시만 산재했던 공간에 국가 규모의 공동체가 들어선 것이다. 더 이상의 인구를 지탱하기 어려운 생태적 한계치에 도달했다. 이미 우루무치에 조성되어 있는 녹지의 나무들은 눈물과 빗물이 아니라 지하수를 먹고 자라난다. 즉, 석유와 전기의 인위(人爲)를 통해서 오아시스 도시가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인공 도시가 되어버렸다.

임기응변이다. 지속 가능할 수 없다. 아메리카의 서부를 개척했던 야망과 야심을 반복해서는 유라시아의 서부 개발도 도루묵이다. 신장 자치구 60주년을 맞이한 지난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5중 전회는 생태 문명 건설을 유난히 강조했다. 신장의 모래바람이 베이징의 스모그를 가중시키는 와중이었다.

한 달 후 파리에서는 신(新)기후 체제를 모색하는 다국적 협정도 체결되었다. 서쪽에서 발족한 글로벌 거버넌스와 동쪽에서 발기한 제국의 방책이 인류의 중지(衆智)로 합류하지 못한다면 '오아시스의 봄' 또한 일장춘몽에 그치고 말 것이다. 天山(천산)의 설경을 우러러보며 天地不仁(천지불인)을 되새기는 까닭이다.

▲ 천산의 만년설.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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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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