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공산당은 '장제스기념관', 박근혜도 '김일성기념관'?

[유라시아 견문] 대장정 : 중국의 길

두 개의 대장정

중국의 서부가 20세기 내내 적막했던 것은 아니다. 도리어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옌안(延安)과 시안(西安), 충칭(重庚)은 각기 현대사의 핵심 현장이었다. 다만 차이는 있었다. 서역으로 가는 옛 길이 求道(구도)의 여정이었다면, 서부로의 새 길은 救國(구국)의 행군이었다. 대장정이 그것이다.

중국공산당의 출발은 1921년 상하이였다. 태평양과 장강이 만나는 국제 도시에서 첫 깃발을 들었다. 그러나 장제스가 눈엣가시로 여겼다. 국공 합작을 선도했던 쑨원이 숨을 거두자 공산당 탄압으로 돌아섰다. 밀리고 밀려 끝내 옌안까지 쫓겨 간 해가 1935년이다. 국민당의 거점이었던 난징으로부터 멀찍한 곳을 찾았던 것이라고만 여겼는데, 근방에서 살피니 또 다른 이유가 짐작이 간다.

서북은 소련과 가까웠다. 북쪽의 몽골은 이미 아시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의 위성국이었다. 서쪽의 신장 또한 소련이 지원하는 군벌 하에 있는 '동투르키스탄'에 가까웠다. 몽골과 신장을 배후지로 삼아 와신상담을 도모하기에 제격이었던 것이다. 地理(지리)를 地利(지리)로 활용한 셈이다.

그럼에도 대장정의 실상이란 참담한 것이었다. 최초의 8만 명 중 최후까지 살아남은 이가 7000명에 불과했다. 그들 또한 토굴 살림을 견뎌야했다.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기에 붉은 신화로 보정되고 윤색될 수 있었다.

그런데 붉은 대장정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국민당 또한 대피난을 면할 수 없었다. 공산당이 국민당을 피해서 떠난 것이라면, 국민당은 일본을 피해서 거점을 옮겨야 했다. 1937년 11월 25일, 난징에서 충칭으로 천도한다. 장강을 따라서 1500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으로 중화민국 정부 자체가 피신한 것이다.

상하이 전투와 난징 대학살은 치명적인 피해였다. 상하이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비견될 만큼 치열한 싸움이었다. 양국의 정예 부대가 총력전을 펼쳤다. 난징에서 벌어진 강간과 학살의 비극 또한 상하이 대전투와 무관치 않다. 지금껏 경험 못한 중국의 결사 항전에 일본군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난징은 1927년부터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국민당이 추진하는 근대화 프로젝트의 총본산이었다. 식민 도시 상하이와는 다른 중국적인 근대 도시를 선보이고자 했다. 베이징에 있는 천단(天壇)과 워싱턴에 있는 국회의사당을 결합한 국민당 당사부터가 20세기 초의 중국몽을 상징한다. 그 난징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충칭으로 대장정을 떠난 것이다.

즉, 1937년의 충칭을 기억하는 것은 대장정에 대한 인식의 좌편향을 교정하는데 공헌한다. 더불어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에도 기여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37년 아시아에서, 더 정확히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중일 전쟁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출발이었다. 그래야 유럽과 태평양에 편중된 영미 중심의 역사 기억도 바로잡을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역은 명명백백 소련과 중국이다. 유럽에서는 소련이 독일을 물리쳤고,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일본을 버텨냈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70주년이었던 올해 러시아와 중국이 가장 성대하게 기념행사를 열었던 것이다. 둘 중에서도 중국은 가장 오래 전쟁을 치룬 나라이고,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나라이며, 가장 많은 피난민이 발생한 나라이다. 8년간 전역이 초토화되었다. 곳곳이 쑥대밭이고, 처처가 잿더미였다.

미국이 참전한 것은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이다. 중국보다 4년이나 늦다. 그 4년간 영국도 미국도 수수방관했다. 관심은 유럽이었지 아시아가 아니었다. 중국은 홀로 싸워야 했다. 그래서 진주만을 유독 강조하는 것도 편향된 기억이다. 게다가 일본은 당일 하와이로만 출격한 것이 아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은 태국(타이) 진주부터 시작했다. 30분 후에는 말레이 반도로 진격했고, 그 한 시간 후에 진주만 공습이 단행되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에는 싱가포르 폭격이, 한 시간 후에는 괌에도 상륙했다. 여섯 시간 후에는 필리핀의 클라크 공군 기지도 폭격했다. 보르네오, 자바, 수마트라로도 출전했다.

그날 히로히토 천황은 하루 종일 해군 군복을 입고 있었다. 대륙에서 해양으로, 유라시아에서 태평양으로 전선이 전환된 것이다. 이 노선 변경에 소련+몽골과 일본+만주국이 다투었던 할힌골 전투/노모한 전쟁(1939년)이 있었음은 몽골 견문에서 다룬바 있다.

1942년 5월까지 일본은 破竹之勢(파죽지세)였다. 유례없는 속도로 제국의 판도를 넓혀갔다. 함선 하나 잃지 않고 피지와 사모아까지 점령해서 미국과 호주(오스트레일리아)의 연결망까지 끊어냈다. 태평양에 산재한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구미 제국주의를 몽땅 몰아낼 태세였다. 그래서 아시아의 해방을 천명하는 '대동아 전쟁'을 선포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하와이도 독자적인 왕국에서 미국에 복속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베트남의 호치민, 버마의 아웅산,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모두 대동아의 남양 진출에 환호했다. 조선과 대만(타이완), 만주에서는 친일 문학이 쏟아져 나왔다.

친일의 기운과 대동아의 기세가 아시아를 휘감고 있을 때, 항일의 최전선에 서 있던 이가 바로 장제스였다. 대동아 전쟁이 본격화된 이후에도 일본의 주력군은 여전히 중국에 머물러 있었다. 달리 말해 중화민국이 육박전을 벌이며 대일본 제국의 진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일본의 선봉대가 영국령 인도까지 처내려가지 못하고 버마(미얀마)에서 멈춘 것도 국민당군의 저항 때문이다.

그 항일의 최후 보루가 충칭이었다. '자유 중국'이라는 표상 또한 군국주의 일본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충칭에서 처음 내세운 것이다. 그 '자유 중국'을 찾아서 수백만이 쓰촨 성으로 피난하고 이주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충칭으로 이전했다. 순식간에 '중화민국의 축소판'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 역시 충칭에 폭격을 집중시켰다. 충칭 시민들은 방공호의 공포에서 자그만 치 8년을 떨어야 했다. 강산이 한번 바뀔 만큼의 인고의 세월이었다. 이제는 옌안만큼이나 충칭을, 아니 옌안보다 충칭을 '항일의 수도'로써 더 기려야 할지 모른다. 역사 바로 세우기이다.

▲ 충칭 시 중심가의 항일 전쟁 승리 기념비. ⓒ이병한

남북 전쟁과 중일 전쟁

장제스는 일본을 저지했지만, 정작 중국을 차지한 것은 마오쩌둥이었다. 제국일본의 패망과 중화민국의 쇠락 속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일어선 것이다. 즉, 중일 전쟁의 이면에 중국 내전이 내연하고 있었다. 아니, 중일 전쟁으로 말미암아 중국 내전의 향방이 달라졌다고도 할 수 있다. 제국일본이 신중국 건설의 일등공신이 되는 커다란 역설이 일어난 것이다.

장기적인 지평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대청제국이 무너졌다. 밖으로는 제국주의가, 안에서는 군벌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중국은 사분오열, 구분십열로 갈라졌다. 곳곳에서 지방 군벌들이 난립했고, 외세와 결탁하는 매국노도 적지 않았다. 전형적인 亂世(난세)의 혼돈이 펼쳐진 것이다. 신해 혁명 이후 중국에서 전개된 내란과 내전은 그 규모와 기간 면에서 '유럽 내전'이었던 제1차 세계 대전을 훨씬 능가한다.

중국 내전의 균열선은 西北(서북)과 東南(동남)으로 크게 갈라졌다. 사실상의 남북 전쟁이었다. 동남을 발판으로 중국 재통일의 선두에 섰던 세력이 국민당이다. 쑨원은 광둥에 거점을 두고 민족, 민권, 민생이라는 삼민주의를 제시했다. 그러나 창업과 개국은 이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력이 절실했다. 그래서 세운 것이 황포군관학교(1923년)이다. 근대적인 군대를 확보해야 군벌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다. 장제스가 왕징웨이를 제치고 후계자가 된 것도 그가 武人(무인)이었기 때문이다. 삼민주의의 적통을 내세운 왕징웨이가 이론가라면, 장제스는 사령관이었다. 황포군관학교의 설립과 지휘를 주도함으로써 중화민국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 것이다. 남중국을 평정한 다음에는 북중국 수복이 지상 과제가 되었다. 이른바 '北伐(북벌)'이다. 1928년 베이징(北京)을 접수하고 이름을 '북평(北平)'으로 고쳤다. 12월 31일, 장제스는 수도 난징(南京)에서 중국 재통일 완성을 선언한다.

그러나 성급한 주장이고, 과장된 언명이었다. 당장 수도를 난징으로 삼은 것부터가 북중국에서의 약세를 반영한다. 장제스는 북경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했다. 북중국 군벌들과 접견할 때는 항상 통역을 대동했다. 북중국에서는 '동북의 풍운아' 장쉐량을 비롯한 군벌들의 입김이 여전했다. 실은 남중국에서도 철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쓰촨, 윈난, 광시 성 등 서남부 또한 독자성이 여실했다. 군벌주의를 일소했다기보다는 장제스 아래 재배치한 것에 불과했다. 난징의 구심력이 약해진다면 언제라도 재분열할 수 있는 미봉책에 그쳤던 것이다.

이 중국의 남북 전쟁에 깊숙이 개입해 들어온 세력이 일본이다. 거점은 북방의 동쪽, 만주였다. 남중국을 통일한 중화민국과 북중국의 동편을 떼어간 제국일본이 길항했다. 남경과 동경의 대결, 북벌과 남진의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만주국이 세워진 이후에도 중일 전쟁이 당장 일어나지는 않았다. 장제스는 일본과의 전면전보다는 내전에 집중했다. 그 중에서도 공산당 토벌에 총력을 기울였다. 내부 단속부터 해야 일본과 맞설 수 있다고 여겼다. 일리가 없지 않았다. 그는 지방 군벌도 아니고, 공산당 같은 소수파도 아니었다. 도쿄를 방문한 경험도 있는 장제스는 일본의 군사력도 익히 알고 있었다. 시간을 벌어 실력부터 축적하자는 大計(대계)는 합당한 면이 없지 않았다.

以夷制夷(이이제이)는 장제스가 즐겨 구사하는 전략이었다. 만주국 건국으로 동북을 상실한 장쉐량을 서북으로 보냈다. 옌안에 터를 잡은 공산당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릴 작정이었다. 지방 군벌을 공산당 토벌의 최전선에 투입함으로써 정적 제거와 군벌 약화의 이중 효과를 노린 것이다.

헌데 장쉐량이 공산당에 패하는 낭패가 일었다. 일본의 남진으로 장쉐량은 퇴로마저 차단되었다. 처음에는 진퇴양난의 출로를 북방에서 찾았다. 소련에 접근했다. 자신의 무력과 소련의 지원으로 서북에 독립 국가를 세우자고 유혹했다. 몽골(인민공화국)과 신장(동투르키스탄)과 유사한 형태의 위성국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일본의 유라시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장제스의 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을 더욱 약화시키는 것은 자칫 소련에도 패착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의 북진을 막기 위해 중화민국을 방파제로 활용하는 책략은 미국의 북진을 염려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이용했던 한국 전쟁에서도 반복되었다.

장쉐량은 다시 기지를 발휘한다. 국공 합작에 기반을 둔 항일 통일 전선의 구축이라는 묘수를 낸 것이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력해야만 본인도 살 길이 열릴 수 있었다. 만주의 패자였던 그로서는 일본이 주적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 장쭤린을 죽인 원수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시안 사건'이라는 돌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일개 군벌이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납치하고 감금한 후 협박하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공산당 소탕을 멈추고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항일 전쟁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총통이 사살될 것인가, 풀려날 것인가, 2주간 전 세계의 이목이 변방의 고도, 시안에 집중되었다.

장제스가 석방된 날은 12월 25일, 성탄절이다. 국공 합작을 수용한 장제스가 구세주처럼 보였다. 중국 전역이 환호했다. 항일 민족주의가 전국적으로 고취되었다. 마침내 단일대오가 형성됨으로써 중일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중일 전쟁은 대청제국 붕괴 이후 분열을 거듭했던 중국에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현대 중국은 남/북, 좌/우를 막론하고 抗日(항일)에 근거해 재탄생한 것이다. 중일 전쟁은 청일 전쟁과도 성격을 달리 했다. 청일 전쟁이 제국주의 대 제국주의의 전쟁이었다면, 중일 전쟁은 제국주의 대 반제국주의 전쟁이었다. 현대 중국이 역사적인 도덕성을 확보하는데 중일 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1945년 이후 중국은 미국, 영국, 소련과 더불어 '빅4'로 대접받는다. 전후 질서의 기틀이 된 유엔(국제연합)의 상임이사국에도 유일한 아시아 국가로 참여할 수 있었다. 아편 전쟁 이후 100년 만의 위상 회복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 장제스는 예수와 쑨원을 호명하며 국민 혁명의 역사적 과업을 마침내 완수했다는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그의 목소리는 옅게 떨렸다.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급했다. 공공의 적이 물러나자 국공은 재차 분열했다. 게다가 역학 구도 또한 크게 달라져 있었다. 국민당은 일본과의 총력전 속에서 약화되었다. 반면 공산당은 크게 성장했다. 대장정의 홍군은 북중국의 팔로군과 남중국의 신사군으로 발전해 있었다. 이들의 주된 역할은 항일 전쟁이 아니었다.

일본군과 국민당군이 싸우고 떠난 자리에 들어가 마을을 재건하고 인민을 동원하고 농촌을 조직하는데 더 능숙했다. 그래서 중일 전쟁 동안 군사력이 소진된 것이 아니라 갈수록 세를 늘려갔던 것이다. 1937년 당시 4만 명에 그쳤던 공산당원은 1945년 270만 명으로 증가했다. 팔로군과 신사군도 130만 명에 육박하는 대군이 되었다.

서북의 오지에서 기사회생한 공산당은 동북의 대지에서 대역전의 발판을 마련한다. 일본이 떠나간 만주가 국공 내전의 주 무대가 된 것이다. 만주는 일본 본토를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산업화된 곳이었다. 북중국에 거점을 둔 마오쩌둥에게도 사활적인 장소였다.

다시금 地理(지리)가 공산당에 유리했다. 만주의 북쪽에는 소련이, 서쪽에는 몽골이 자리했고, 남쪽에는 갓 북조선이 들어섰다. 만주 벌판이 어느덧 소비에트의 바다에 둘러싸여 있던 것이다. 만주에서 국민당을 제압한 공산당은 일사천리였다. 만리장성을 넘고, 황하를 건너고, 장강마저 넘었다. 장강을 따라 충칭으로 피신했던 장제스는 바다 건너 대만으로 패주했다.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대 역전패였다. 타이베이로 향하는 길 위에서 그의 억장은 무너졌을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된다. 수도는 재차 북경이 되었다. 정권의 교체가 아니라 국가의 교체, 새로운 건국이었다. 신해 혁명 이래 40여 년 지속된 난세를 평정하는 대일통의 과업, 즉 天命(천명)을 중국공산당이 완수한 것이다.

어쩐지 기시감이 인다. 17세기 일본이 중원의 명나라를 흔들자, 동북의 만주족이 중국을 접수하고 대청제국을 세운 역사가 있었다. 20세기에는 대일본제국이 중화민국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변방의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것이다.

20세기에도 중국은 진보를 향해 내달린 것도 아니고, 좌/우의 세력 교체를 경험한 것도 아니다. 누천년 一治一亂(일치일란)의 중국적 순환(Chinese Cycle)을 다시 한 번 반복했을 뿐이다.

▲ 장제스와 마오의 충칭 국공 담판(1945년). ⓒ프레시안

중국의 길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은 미국도 소련도 원치 않던 바였다. 미국은 응당 비공산주의 중국의 지속을 원했다. 장제스가 마땅치는 않았지만 국민당을 계속 지원했던 까닭이다.

소련도 거대한 붉은 중국의 등장을 바라지 않았다. 스탈린은 장강에서 진격을 멈추고 북중국에 족하라고 요구했다. 남/북 분단을 꾀함으로써 동독과 북조선과 같은 또 다른 위성국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1950년에는 최남단 하이난 섬과 최서단 신장까지 복속시켰다. 1951년에는 티베트 고원까지 접수했다. 외몽골을 제외하면 대청제국의 영토를 거의 복구시킨 것이다. 주체 노선의 실현이었고, 자력갱생의 성공이었다.

자력갱생의 기원이 옌안에 있다. 대장정이라는 고난의 행군 속에서 프랑스와 소련 유학파들은 떨어져 나갔다. 토박이 마오쩌둥이 카리스마를 확립했다. 충칭의 장제스가 전장을 진두지휘할 때, 옌안의 마오쩌둥은 토굴에서 독서하고 사색하고 집필했다. 베이징 대학교 사서 출신이었던 그의 지적 재능이 폭발적으로 만개한 것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한 장본인이지만, 정작 그는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사상가에 가까웠다. <모순론>, <실천론>, <신민주주의론> 등 마오 사상의 핵심이 되는 문건들이 모두 이 시기에 발표된 것이다. 냉전기 신중국이 과시했던 독자 노선의 바탕 또한 이 사상적 독립에 있었다고 하겠다.

비운의 장제스가 눈을 감은 해가 1975년이다. 천운의 마오쩌둥도 1976년 세상을 졌다. 두 거인이 삶을 다함으로써 한 시대가 저물었음이 확연해졌다. 새 천년 충칭에 장제스 기념관이 들어섰다. 그가 항일 전쟁을 이끌었던 관저가 박물관으로 복원된 것이다. 장제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를 20여년이나 이끌었던 정치 거물이자 항일 전쟁의 영웅이다. 마땅한 대접이다.

대중문화에서도 변화의 기운이 여실하다. 올해 CCTV에서 방영된 항일 전쟁 특집 드라마들은 공산당 일색이었던 왕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좌편향을 탈색함으로써 상하이 대전투, 난징 대학살, 충칭 대공습 등 그간 국민당의 역사라며 대륙에서 삭제되었던 중일 전쟁의 기억들이 차근차근 복원되고 있었다.

중일 전쟁의 기억 재편이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대륙과 대만, 양안 간 화합과 직결된다.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이었던 올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 시진핑과 중화민국의 총통 마잉주가 최초로 회합한 것도 우연만은 아니지 싶다. 국민당도 공산당도 항일로 하나이다.

그런데 마잉주의 직책이 국민당 주석이 아니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국공 합작'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양당의 합작이 아니라 양국의 화합이다.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대통합으로 가는 또 다른 대장정의 출발인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이번 세기 중에 '中華國', 혹은 '中國'을 국명으로 삼는 통일 국가의 출현을 목도할지 모른다.

▲ 2015년 11월 7일, 역사적인 만남을 가진 중국 시진핑과 대만 마잉주. ⓒnetworks.org

더 중요한 것은 세계 속의 중국의 위상과 역할 조정이 항일 전쟁의 기억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갈수록 항일 전쟁보다는 '항일 반파시스트 전쟁'이라는 명명을 선호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특정 국가에 대한 항전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라는 반인류적, 반세계적 조류에 대한 저항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공헌이 필요할 때 중국은 전심전력을 다 해 그 몫을 수행했던 바이다. 그 역사의 환기로부터 '책임대국'이라는 최신의 국책 담론을 도출하는 것이다. 덤으로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 일본은 물론이요, 그 일본을 거들고 부추기고 있는 미국과도 대비시키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즉 '책임대국'을 표방하는 중국은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20세기형 '강대국'을 추구하지 않는다. 무력에 의존하여 패도를 행사하는 패권국이 아니라, '왕도의 근대화'를 도모한다.

20세기의 대장정이 21세기의 일대일로와 접속하는 연결고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세기의 대장정이 구국이었다면, 21세기의 대장정은 救世(구세)이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반복하느냐, 개조하느냐의 갈림길에 일대일로가 있는 것이다. 중국이 미국을 복제하면 인류의 장래가 암담하다.

고도성장이 예외적으로 지속되는 20세기에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현한 미국이 인류의 문명을 이끌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저성장이 '신상태(新常態, New Normal)'로 되돌아가는 21세기에는 고전 문명의 정수였던 중국이 새로운 문명의 표준을 제출하는 막중한 사명감을 가진다.

과연 중국이 패권의 교체가 아니라 문명의 교체를 선도하는 '책임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그 실상과 여부를 가늠해보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서쪽 깊숙이 들어가기로 한다. 올해로 자치구 성립 60주년을 맞이한 신장(新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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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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