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엽 런던 거리, 20세기 초반 창신동에?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창신동, 부르주아 유토피아의 추억

'건축왕 정세권'이 한옥집단지구를 건설한 지역, 창신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정세권 선생에 대한 연재에서 다소 벗어난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창신동 소재 대형 한옥이 곧 헐리기 때문이다. 해당 한옥은 어쩌면 창신동의 잊혀진 역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추억일지 모른다.

지난 연재에서 소개한 정세권의 건양사 광고에는 아래 내용이 나온다.

창신동 651번지. 예전 조병택 집 130칸은 금월 말에 허물어 닦을(훼별(毁撇)) 터이오. 그 대지 1157평은 분할 매각중인 바, 3월 중순이 지나도 매각되지 않는 것은 본사에서 방매가를 건축함

현재의 창신동은 동대문 패션타운에서 판매되는 의류를 제작하는 대표적인 패션공장지대이자, 많은 저소득 서민층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창신동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작은 가내수공업 형태의 공장들과 다세대 주택들이 혼재한 서민주거지역이다. 실제로도 해당 지역은 다세대 주택들로 꽉 찬 모습을 보여준다.

▲다세대 주택으로 꽉찬 창신동. ⓒ김경민

하지만, 시간을 100년 전으로 돌렸을 때, 과연 창신동은 현재와 같은 모습이었을까? 1910년대 창신동은 과연 서민집단지구였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 반증이 위 광고다.

정세권 선생이 매각하려는 부지는 1157평에 이르는데, 실제 해당 부지는 2000평이 넘는다. 해당공고는 2181평 부지의 일부를 매각한다는 것이었다. 조병택이라는 당대 거부가 창신동에 어마어마한 저택에 살고 있었고, 그가 사망하면서 집안이 기울자 저택이 매물로 나왔고, 이를 정세권의 건양사가 매입, 한옥집단지구로 개발한 것이다.

조병택은 창신동에만 대지 8곳 3622평, 밭 6곳 2153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당 저택은 조대비(헌종의 어머니이자, 흥선대원군을 도와 고종을 즉위시킨 신정왕후로 추정)의 가옥을 한일은행 창업자이자 초대이사장, 조병택(한일은행은 여러 은행과의 합병과정을 거쳐 조흥은행으로, 현재의 신한은행에 이른다)이 1905년 이전 매입한 것이다. 창신동은 대왕대비가 살았던 지역이요, 은행장이 살았던 지역이었다.

비단, 한일은행 창업자 조병택만이 창신동에 살고 있었던 당대의 거부가 아니다. 그보다 더 거부였던 임종상은 창신동에 아방궁을 짓고 살고 있었다. 임종상은 1935년 소득세액 기준 서울시 두 번째 부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三千里機密室 The Korean Black cham-ber', <삼천리>제7권 11호, 1935년 12월)

임종상의 창신동 저택에 대한 기록이다.

"동대문을 나서면 왼쪽 성 밑에 궁궐과 같이 우뚝 솟은 어마어마하게 큰 집이 있다. 이 집이 준공되던 당시에는 조선 안의 집으로 제일 굉장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골에서도 일부러 구경을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한참동안 한가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었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이 집 주인은 … 임종상 씨가 십여 년 전부터 자기의 손으로 설계를 해두고 마음에 드는 집을 짓고… 육천칠백 평을 매평에 삼 원씩 이만여 원에 사서 재작년 팔월에 짖기를 시작하여… (중략) 그런데 이백육십여 칸이나 되는 큰 집을 한 바퀴 돌려면 우렁이 속 같아서 혼자는 찾아 나오기 어려울 것이요. 이 집안은 어디로(가)든지 유리같이 닦아놓은 복도가 있어서 버선에 흙 한 점 묻히지 않고 다닐 수가 있게 되었으며 … 비단병풍과 방장으로 둘러싸서 창밖에 겨울을 모르고 추위와 주림에 신음하는 민중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분에 넘치는 호사와 끝없는 행락으로 날을 보내기에 알맞은 집이다." '霄壤二相(소양이상) (一(일)) 富豪(부호)의住宅(주택)과 極貧者(극빈자)의住宅(주택)', <동아일보>,1925년 1월 1일

"임 부잣집! 이크 말도 말아라. 서에는 윤대가리, 중앙에는 민대감, 동에는 임 부자 이것은 서울하고도 고명한 삼대가이다. 실로 아방궁 이상이니, 외견상으로는 감히 개구(開口)도 못하겠다(감히 구체적으로 나열도 못 할 정도다). 입만 딱 벌리고 '아구~ 굉장도 하구나' 할 뿐이다. 그저 그렇게 하고 하도 엄엄(嚴嚴)하야 들어가지도 못하고 왔다."'대경성 백주 암행기', <별건곤> 제2호, 1926년 12월

그뿐이랴? 해동은행 중역이었던 김성환, 남작 작위를 갖고 있었던 이근호와 민영린,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도 존재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재벌로 평가받는 백남승(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의 부친)의 저택 역시 창신동에 있었다.

20세기 초반 창신동에 투영된 18세기 중엽의 런던

18세기 중엽 이후, 런던이 산업도시로 변모하면서 자본가 계층은 하층민과 한 지역에 섞여서 사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런던을 벗어나(대략 마차로 출근할 수 있는 거리) 한적한 농촌취락에 넓은 빌라를 지으면서 살기 시작한다.(<부르주아 유토피아>(로버트 피시만 지움, 한울 펴냄, 2000년))

20세기 초반의 창신동은 18세기 중엽 이후의 런던과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신흥 자본가계층들이 한양도성 밖으로 이주하여 넓은 지역에 저택을 건설하면서 살고 있었다. 한국식 부르주아 유토피아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부르주와 유토피아가 조성됨과 동시에 빠르게 창신동의 성격은 매우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경성에 지방의 조선인들이 몰려들면서 부자와 토막민 같은 최하층이 동시에 거주하는 지역이 된 것이다. 비록 한양도성 밖이기는 하나, 경성 중심지 종로와 코 닿을 거리에 있었기에 토막민들이 입지하기에 적격이었다.

"이같이 임종상(林宗相)) 장택상(張澤相) 조병택(趙秉澤) 등 백만장자의 대궐 같은 집들이 즐비한 부자촌에서 불과 수십 보 가량쯤 떨어져 있는 산 밑에는, 눈을 씻고 보아도 사람의 집 같아 보이지 않는 움집이 오육 채가 맞붙이고 있다. 이 집들의 터가 국유요 사정지외무번지라고 써 붙인 번지도 없는 집들이니 이 집에 들어있는 사람이 무슨 명망이 있을 리 없다. … 말벌이꾼, 지게꾼같이 눈이 쌓여 (돈)벌이가 떨어져 하루 한 끼 죽으로 입에 풀칠도 못 하고 온종일 얼음 언 거리를 떨며 헤매다가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 수 없어 기어드는 곳이다. 그러나 흙방에 거적자리 몇 입을 깔았을 뿐이오. 이부자리도 제대로 된 것이 없으니 추위에 언 발을 뻗고 편안한 잠을 잘 수도 없을 것이다. 지붕을 하지 못하여 비가 새어 생털 조각을 얻어다 덮었고 창에는 눈보라가 들이치니 겨우 공석닙으로 가렸을 뿐이다.

그나마 이 두꺼비 집 같은 움집도 자기의 소유가 아니요, 한 달에 이 원씩 세를 내고 사는 것인데, 세를 못 내는 때에는 눈 덮인 거리로 쫓겨날 수밖에 없다 한다. 더군다나 놀라운 것은 세 칸쯤 되는 움직 한 채에 3가구가 들어 사는 것이다. 컴컴한 들창 속으로 병든 노파의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와 밥 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부서진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霄壤二相(소양이상) (一(일)) 富豪(부호)의住宅(주택)과 極貧者(극빈자)의住宅(주택)', <동아일보>,1925년 1월 1일

이 창신동은 6.25 동란을 거치면서, 피란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그리고 현재는 패션산업의 집적지로 변모하게 된다. 하지만, 1960년대에도 창신동지역에 일부 저택이 존재하였음을 기억하는 증언이 있다.

"경기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대 의과대학 입학하기 전, 형편상 과외를 가르쳐야 했습니다. 동대문에서 창신동으로 올라가는 길에 아주 큰 한옥들 몇 채 있었어요. 그 집에서 학생을 가르쳤죠. 매우 큰 집이었습니다." 김풍명 의학박사 (전) 대한피부과학회 회장 인터뷰, 2015년 10월 1일

창신길 옆 대형 한옥 보존하라

그리고 아직도 창신동의 과거 모습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몇몇 남아있다. 정세권 선생이 건설한 한옥집단지구 내에 몇 채의 한옥이 남아있음과 동시에, 시기를 알기 힘든 대형 한옥이 창신길 중간에 현존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부르주아 유토피아 창신동의 기억을 보여줄 수 있는 이 대형 한옥이 곧 헐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부지는 종로구청이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가운데 주차장과 지역커뮤니티센터로 바뀐다.

필자는 창신동이 뉴타운으로 묶여 있던 시기인 2013년부터 <프레시안> 연재와 저서(리씽킹 서울, 2013)를 통해 창신동 패션산업지구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뉴타운 해제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Urban Hybrid라는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여 2013년 창신동에 사무실을 개소하여 활동 중이기도 하다. 지역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들의 요구가 타당함을 나름 이해한다.

창신동 지역은 주차할 장소가 없기에 주차장에 대한 요구와 지역커뮤니티 시설의 필요성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시설들을 마지막 남은 대형 한옥을 부수고 그 위에 지어야 할지는 고민해야 한다.

현재 서울시는 역사도시 서울을 모토로 내걸고 있고, 한양도성을 유네스코역사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심사숙고해야 할 부분은 과연 한양도성 밖 창신동에 우리가 보여줄 것이 1950년대 이후의 기억 (패션산업지구) 밖에 없는지이다. 아직 제대로 된 연구가 없었기에 우리가 창신동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기억을 모르거나 잊혀 졌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창신동에 부르주아와 유토피아의 추억이 있었음을, 20세기 초반 산업도시 경성이 급변하면서 지역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고 있다면, 마지막 남은 기억은 보존해야 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양도성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었을 때 노리는 효과는 주변지역 관광활성화가 아닐까. 외국인들이 한양도성에 올라가서 '아, 성벽은 이렇게 생겼구나'라고 생각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 커피를 마시든 점심을 하든 아니면 숙박을 하게끔 하여야 한다. 즉, 주변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안 되는 유네스코 등재는 무슨 보람이 있나? 그렇다면, 가장 한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그 정취를 다세대 연립주택에서 느끼게 할 것인가? 아니면 대형 한옥에서 느끼게 하는 게 맞나?

현재, 서울시는 창신동에 봉제박물관을 건설하려고 한다. 단순한 봉제박물관 한 가지로는 사람들을 모으는 데 한계가 자명하다. 하지만, 주변에 역사적 자원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창신동 641번지 소재 대형 한옥, 대략 700여 평의 대지에 대형 한옥과 저택입구에는 60/70년대식 2층집이 있다. 오랜 기간 사람이 살지 않은 상태이다. 가장 번잡한 창신길에 위치하여, 지역 주민들을 위한 주차장과 커뮤니티시설로 개발될 예정이다. ⓒ김경민

교차보조를 통한 새로운 전략을 세워라.

대형 한옥을 보존하면서 주차장과 지역커뮤니티 시설을 개발할 수 있고, 이를 위한 다양한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현재 중앙 정부와 서울시는 수백억의 예산을 투하하여 창신동에서 도시재생사업을 벌이고 있다. 해당 사업 목적 역시 경제활성화다. 그리고 이 경제활성화는 지역 산업 활성화와 더불어 패션/디자인을 매개로 한 관광산업 활성화 전략이 요구된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지역에 와서 돈을 쓰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핵심은 리테일(레스토랑과 상점)과 숙박이다.

대형 한옥은 B&B 숙박시설로 활용하면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생긴 수익을 지역 커뮤니티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수익시설의 수익 극대화를 통해 비수익시설을 보조하는 교차보조방식 개발을 실행하는 것이다.

또한, 도시재생사업의 몇백 억 예산 중 일부를 활용하여 다른 곳에 주차장과 커뮤니티 시설 건설을 요구한다면 이는 무리한 것인가?

우리는 종로구 익선동 대형한옥지구 (역시, 정세권의 건양사가 건설한 지역이다) 바로 앞에 있던 오진암을 부수고 지역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비즈니스 호텔을 지었던 과오가 있다. 현재의 주차장과 커뮤니티 건설계획은 그것보다는 진일보한 것이다. 최소한 지역커뮤니티를 위한 것이기에.

(관련기사 ☞ : "박정희 시대 요정 정치 산실, 꼭 헐어야 했나?")

그런데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성을 날려버리는 과오를 또 다시 범하지 않기 바란다. 오진암과는 비교도 안 되는 누추하고 작은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인 익선동 166번지(한옥집단지구)에 지금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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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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